3월 30일
루쉰의 『악마파 시의 힘』(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지만지고전천줄0062)을 읽다. - 이 책의 원제는 ‘마라시력설摩羅詩力說’로, 풀이하면 하면 ‘악마파 시의 힘에 대한 설’ 정도가 된다.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만 굳이 살 필요가 없었던 것은, 이 책을 옮긴이가 오래전에 번역했던 『무덤』(선학사, 2003, 수정판)에 「마라시력설摩羅詩力說」이란 제목으로 이 책 전체가 고스란히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책방에서 새 책 상태로 발견된 『악마파 시의 힘』을 사게 된 것은, 옮긴이 해설에 나오는 다음 대목 대문이다: “옮긴이는 이미 『무덤』을 완역하여 2001년 도서출판 선학사에서 출간한 바 있으며, 이번의 이 책은 이전의 번역을 기초로 원문을 대조하여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이, 아예 읽지 않을 양이라면 모르되, ‘번역을 다시 했다’는 말을 듣고 그냥 지나쳐갈 참된(?) 독서가가 어디 있겠는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글은 루쉰의 많은 산문집 가운데서 논문 성격에 가까운 에세이를 모았던 『무덤』에 실린 것으로, 루쉰의 문학론의 ‘정수’에 해당하는 논문이다. 루쉰은 책의 첫머리에 민족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시가詩歌라면서, “문사文事가 쇠미해지면 민족의 운명도 다”한 것이며, “민족이 힘을 잃게 되자 문사 역시 함께 영락”하게 된다고 쓴다. 다시 말해 루쉰에게 민족과 문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런 주장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나남, 2003)로부터 자신의 문제틀을 차용해 온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과 상당히 맞아떨어지는 데가 있다. 가라타니는 ‘근대 국가 만들기’에 근대 문학 특히 소설이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루쉰은 아예 예레미아 시절의 이스라엘에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근대 국가와 근대 문학(소설)만 그랬던 게 아니라, 모든 ‘국가 만들기’나 ‘민족 정체성 형성’에는 문학이 필요 불가결했다는 것이다.
루쉰이 가라타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추론하건대, 나폴레옹을 물리친 것은 국가도 아니요, 황제도 아니요, 무기도 아니요, 바로 국민이었던 것이다. 국민은 모두 시를 가지고 있었고 또 시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결국 망하지 않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이 아닌 시가가 국가 만들기와 민족 정체성 형성의 몫을 떠맡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시가는 활자 해독력이 낮고 출판 시장이 없는 시대에도, 충분히 선전을 감당할 수 있는 장르였던 것이다.
루쉰은 한 나라와 민족을 깨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악마와 같아야 한다면서, 전통에 안주하는 문학(문화)은 나라와 민족의 정신을 좀먹는다고 말한다: “오래된 민족의 문학(心聲) 유산은 장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숭고하고 위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오늘과 호흡이 통하지 않으니,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어루만지며 읊조리게 하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손자에게 물려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예전의 그 영광을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지금의 적막을 가리려고 하니, 도리어 새로 일어나는 나라만 못하다. 그 나라의 문화는 아직 번성하지는 못했지만 미래에 충분히 존경할 만하게 될 것이라는 큰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고古 문명국이란 처량한 말뜻이 들어 있고 풍자의 말뜻이 들어 있는 것이리라!”
중국 혁명의 죽창이고 죽비였던 루쉰은 “문명이 꽃이라면 야만은 꽃받침이고 문명이 열매라면 야만은 꽃이어서 전진이 여기에 있고 희망도 여기에 있다”며 “문화가 멈춘 오래된 민족”인 중국을 질타한다. 그러면서 루쉰은 중국 시의 원류인 『시경』에서 비롯된 “시는 사악함이 없다”는 시론을 공격한다. 시를 사회규범과 일치시키려는 주자류의 『시경』 해석에 찌들어 있는 한 “가령 중국에 문예부흥의 날이 온다면, 이 설을 내세워 애써 그 싹을 자르려는 자가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이어지는 “그리고 유럽의 비평가들 역시 이러한 설을 가지고 문학을 규제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보아, 루쉰은 시가(문학)를 국가 만들기나 민족 정체성 형성의 시녀가 아닌 적극적인 비판자로 보면서, 문학의 자리를 권력과 불화하는 곳에 놓았다. “군중이 보는 앞에서 피 흘리는 자가 없다면 그것은 사회의 재앙이다”라는 말은, 단 줄로 요약된 루쉰의 시인관이다.
위와 같은 서론이 끝나면 “이제 옛일은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다른 나라의 새로운 소리(新聲)를 탐구해 보자”면서, 루쉰은 악마적 힘으로 자기 나라의 문학 전통을 갱신했을 뿐 아니라, 그 힘으로 국가 만들기와 민족 정체성의 도우미 구실을 톡톡히 해낸 시인들의 약전을 쓴다. 바이런·셸리(영국), 푸슈킨·레르몬토프(러시아), 미츠키에비치·슬로바츠키·크라신스키(폴란드), 페퇴피(헝가리)가 그들로, 이 시인들이 쓴 시들은 대개가 전쟁터의 영웅이나 이민족과의 투쟁을 그린 장편 서사시다. 그러니까 근대 이전을 무대로 삼은 이 장편 서사시들은, 근대 문학(소설)이 근대 국가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 것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열거한 시인들이 쓴 장편 서사시가 대부분 전쟁터의 영웅담이나 이민족과의 투쟁사라는 것은, 문학을 바라보는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구하게 말하지 않고,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소명출판, 2003)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오선민의 「전쟁서사와 국민국가 프로젝트」에 나오는 두 구절의 글로 대신한다: “국가를 역사적으로 실체화하려는 기획과 전쟁에 대한 글쓰기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왜 역사도 논설도 아닌 소설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을까?”(133쪽), “국가를 역사적 실체로 만들려는 기획에 가장 능동적으로 참여한 텍스트 가운데 전쟁서사가 있다.”(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