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3일
최인호의 『타인의 방』(문학동네, 2002, 최인호 중단편 소설전집 1)을 읽다. - 최인호의 초기 단편 14편을 모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견습환자」다. 이 작품은 작가가 스물세 살 때 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이 작품은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타인의 방」이 보여주는 비극적 세계인식으로 가는 도입구이자, 이보다 훨씬 훗날 쓰게 될 『구멍』(동화출판공사, 1991)으로 완성될 비극적 세계인식의 단초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나는 지금껏 그 사람들에게서 웃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시작되는 「견습환자」의 주인공은 늑막염에 걸린 이십대 청년이다. 그는 병원에 입원한 지 꼭 열닷새가 되는 날, 의사와 간호사들에게서 한번도 ‘웃음’을 본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명민한 관찰자에게 웃음이란, 세계와의 거리두기이자 자기객관화이며, 실존(저항)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나 간호원이 웃는 일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세계와의 거리두기와 자기객관화에 게을리하지 않고, 실존에 성공한 ‘관리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이 관리 권력의 대리자이거나 관리 권력 그 자체라는 것은, “그러나 내가 정말로 아프기 시작한 것은 늙은 간호원이 병실 앞에 내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걸어준 후, 수의囚衣 같은 환자복을 주었을 때였다”라는 주인공의 말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환자복이 곧 ‘수의’라는 말 속에, 병원이 법원이나 학교·군대와 같은 관리 권력이라는 확연한 암시가 들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내가 환자가 된 것은, 환자복을 입고 나서’라는 반문화적인 저항 인식이다. 이 작품이 1967년 신춘문예 당선작이므로, 최인호는 적어도 그 이전에 ‘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이반 일리히의 반문화론을 간파하고,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주인공은 관리 권력의 관리 기술에 균열을 내기 위해 몇 가지 책략(거짓말)과 실없는 농담을 준비한다. 하지만 병원은 그의 시도를 번번이 무로 되돌렸고, 오히려 점점 초조해지는 것은 주인공이다. 퇴원 하루 전날 밤, 그는 “병동 전체가 달라질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으면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다. 1병동과 2병동 입원실의 문패를 모조리 바꿔버린 것이다. 결과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 나는 어젯밤 내가 기를 쓰며 가까스로 바꾸어놓았던 병실 문패가 제각기 제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 틈엔가 고등동물인 그들은 제 스스로 미로를 제거할 줄 알게 사육된 것이다. 나의 마지막 시도는 그들 앞에서 완전히 좌절되고 만 것이다.”
관리 권력의 철옹성 같은 관리 기술은 그의 저항을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의 ‘버그bug’ 제거하듯이 간단히 제압해버렸다. 퇴원하기 위해 동생이 불러온 택시에 올라탄 주인공은 차창 너머로, 그가 골탕을 먹이기 위해 온갖 애를 써보았던 “그 젊은 인턴이 어떤 아름다운 여인과 파라솔 밑에서 콜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그 모습을 보면서, 주인공은 비로소 자신의 퇴원을 실감하게 된다. 철없던 주인공은 병원이라는 작은 세상에서 치료를 받고, 세상이라는 더 큰 병원의 환자, 다시 말해 ‘정상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스물세 살에 이미 능란했던 이 작가는, ‘견습’ 딱지를 뗀 ‘정식’ 환자를 환영하듯이, “동생은 내게 유혹하는 목소리로 자기가 최근에 발견한, 술값이 싼 술집과 재미있는 영화를 하는 극장이 어디인가를 알려주었다”라는 의뭉스러운 문장으로 작품을 맺었다.
이 작품집에 실려 있는 「2와 2분의 1」·「사행斜行」·「예행연습」은 「견습환자」가 미리 보여준, 관리 권력에 대한 실존인의 도전과 투항을 변주하고 있다. 최인호의 전체 작품 속에서 하나의 경향을 차지하고 있는 이 작품군 가운데서 「타인의 방」은 실존인의 투항이 이르른 비극적 최후를 보여준다. 출장을 다녀온 주인공은 아내가 사라진 빈집에서, 집안의 사물들이 낯설고 적대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을 대면한다. 소외를 견디지 못한 주인공은 스스로 사물이 되는 것으로 난국을 돌파한다. 자신의 집을 ‘타인의 방’으로 느끼게 되고, 자신의 집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주인공과 그가 감행하는 사물로의 변전은, 관리 사회 속에서 사물화를 강요받는 현대인의 궁색한 처지를 웅변한다.
관리 권력이 지배하는 관리 사회에서 인간의 주체는 한갓 부품(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인식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까닭은, 아무리 해봤자 그 쇠우리를 벗어날 방도나, 벗어나 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견습환자」의 주인공이 보여준 선선한 투항과, ‘기쁘다, 사물되었네!’를 환호하던 「타인의 방」의 주인공은, 모두 꽉 닫힌 비극적 세계인식의 ‘막장’을 보여준다.
최인호는 「침묵의 소리」에 나오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것 봐. 오히려 좀 광기가 있는 녀석들이 더 잘 사는 세상인 줄 나도 알고 있어”라고 말한 바 있다. 최인호의 ‘광인 되기’는, 현대인들이 정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약간씩의 광인일 수밖에 없는 사정과 관리 사회의 쇠우리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을 한꺼번에 뜻한다. 정상적으로 살기 위해 광인 되기를 택한 동시에,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비정상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거듭 광인 되기를 택하는 최인호의 분열증적이고 악순환적인 세계인식은, 좀체 기억하는 이가 없는 그의 장편 『구멍』이 탁월하게 그려 놓았다.
『구멍』의 주인공은 광기 어린 중년 의사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과 파라솔 밑에 앉아 “한 폭의 그림”을 연출했던 「견습환자」의 젊은 인턴이다. 앞서 세계와의 거리두기와 자기객관화에 게을리하지 않고, 실존에 성공한 관리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의사의 완전무결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쳐가는 『구멍』의 중년 의사를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관리 사회의 외부는 없으며, 관리 권력의 최상층부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