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1일
코맥 매카시의 소설 세 권을 읽고 쓰는 이 글은 그의 소설에 관한 독후감이라기보다는, 그의 소설을 낳은 미국 문화에 대한 짧은 논평이다. 가장 먼저 읽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사피엔스, 2008)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조직 범죄자들의 돈 가방을 우연히 차지하게 된 탐욕스러운 남자 모스와 그를 추적하는 청부살해업자 시거, 그리고 사건을 해결하려는 보안관 벨. 이 삼각관계에 모스를 죽이기 위해 고용된 또 다른 청부살해업자 웰스가 있지만, 그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이 간단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모스와 웰스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퇴역 군인이라는 것과, 벨 또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력이 있다는 점이다.
정의로운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귀국해서는 전쟁 범죄자나 머저리 취급을 당한 끝에, 참전 용사가 반영웅으로 변해가는 인물들은 미국 영화에 흔하디흔하다. 걸프전쟁 이후에야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군인으로 바뀌는 추세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 병사들이 진짜 정의로웠을까?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유문화사, 2002)을 보면,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던 1969년부터 미군들 사이에서 유행한 말이 “수류탄으로 해치워!”였다고 한다. 이 말은, 마음에 안 드는 장교를 사병들이 해치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가리켰고, 실제로 1969~70년 사이에 83명의 장교가 수류탄 사고로 죽었다. 사병들은 인기 없는 장교를 살해하기 위해 여러 명이 돈을 모아 현상금을 걸기도 했는데, 액수는 50~1,000달러였다. 미군 지휘부는 “장교들이 수류탄으로 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군대의 기강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지상전에서의 승리는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일화는 미국 영화에 곧잘 정의로운 반영웅으로 묘사되는 베트남 참전 병사에 대한 정형화된 이해를 경계하게 만든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탔던 벨은 고향에 돌아온 25세 때, 그 경력 덕에 보안관 선거에서 보안관직을 꿰찬다. 그러나 그가 훈장을 타게 된 것은, 적에게 포위된 근무지를 이탈하여 혼자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는 그 부끄러움을 벌충하고자 무려 41년 동안이나 보안관직에 충실했다. 그가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그동안 자신의 구역에서 미해결 살인 사건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과, 그동안 자신이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근무 성적표로 드러난다. 특히 후자에 대한 자긍심이 무척 커서 “나는 아무도 죽여야 한 적이 없었는데, 이 점을 아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자찬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이어지는 “예전의 보안관들은 총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으려고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는 증언을 신빙할 수 있을까?
폭력은 미국 문화에 깔려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집단무의식이다. 미국은 자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모두 전쟁으로 해결했다. 개척자들이 북미 원주민(인디언)을 멸종시키고 식민지를 건설할 때는 물론이었고,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 또 멕시코와의 국경 분쟁을 벌일 때나 노예 해방을 해결하기 위해 벌인 남북 전쟁에서도 미국인이 최종적으로 의지한 데는 전쟁이었다. 그래서 O. T. 넬슨의 『내일은 도시를 하나 세울까 해』에 나오는 13세 이하의 아이들은, 어른이 모두 죽고 없는 상태에서 만든 그들만의 나라를 찬양하며 <내가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When I Frist Came to This Land>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내가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우린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네
우린 모두 군대를 만들었고
우린 이제 힘을 얻었네
우린 선포하지 이 땅을
그랜드 가의 땅으로
그랜드빌, 그랜드빌로.
많아 봤자 13세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이 ‘군대를 만들고서야 행복해졌다’고 노래하는, 이런 소설이 미국 청소년들의 애독서라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메카시의 범작으로 치부되는 반면, 『로드』(문학동네, 2008)를 극찬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그러나 ‘총이 곧 생명’이라는 미국식 미션(mission)에 사로잡혀 있는 이 작품이, 『내일은 도시를 하나 세울까 해』보다 더 낳을 것도 없다. 작가가 추상적으로 처리해 놓았지만, 이 작품은 핵전쟁과 같은 세계대전으로 문명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 물론 그 재앙이 핵전쟁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자연재해나 전염병 혹은 외계인의 습격 탓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작품에 묘사되는 추위로부터 핵겨울을 연상하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 역시 간단하다.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아버지와 아들이 기아와 강도들의 공격을 견디며, 무작정 생존 공간인 남(南)으로 향한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서 총은 생존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핵전쟁이라는 재앙에도 불구하고, 재앙을 가져온 총(폭력·전쟁)에 대해 아무런 반성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불’, 즉 문명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자처하고 있으니, 그 문명은 어떤 것일까? 아버지가 자식을 보호하는 것은 본능이다.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새삼 그 주제에 눈길을 팔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는 미국 문화에서 총은 시민의 자유와 생존 조건을 뜻하며, 그런 규범이 핵전쟁과 같은 비극을 당하고도 아무런 의문 없이 유지된다는 게 흥미로웠다.
덧붙이자면, 이 소설의 아버지와 아들은 물론이고, 또 다른 생존 인물들이 살길을 찾아 남으로 내려가는 것도 마뜩잖다. 상식적이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 남쪽에도 누군가가 살고 있다고. 다시 말해 그들이 남쪽에 근착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쫓아내거나 죽여야 한다. 대개의 독자들은 남쪽을 그저 ‘희망’을 나타내는 문학적 상징으로만 해석하는데, 문학 읽기를 도와주는 ‘상징’이 어떨 때는 미학적 폭력 말고는 아무것도 드러내는 게 없다는 것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미국인에게 텍사스를 비롯한 중서부를 빼앗긴 멕시코인들에게 『로드』의 주인공들이 감행하는 남행은, 그 자체로 재앙이다. ‘총과 이주’라는 두 동기에 주목해서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코맥 매카시가 ‘프런티어 정신(the frontier spirit)’이라는 미국의 건국 신화에 대해 정통하면서, 그 관례를 벗어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앞의 두 작품은 잊거나, 내던져 버려라. 여기 매카시 최고의 걸작이자, 미국 현대소설의 성취라고 할 수 있는 『핏빛 자오선』(민음사, 2008)이 있다. 1849~1850년 사이, 텍사스 일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약간의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소설이 시작되기 한 해 전인 1848년 2월, 멕시코 시의 북쪽에 위치한 비야데 과달루페 이달고에서 미국과 멕시코 간의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이 체결됐다. 1846년부터 2년간 멕시코의 땅이었던 텍사스를 놓고 미국과 벌였던 멕시코-미국 국경 분쟁은, 전쟁이 패한 멕시코가 미국과의 국경선을 리오그란데강을 경계로 합의함으로써 텍사스는 물론이고 애리조나·캘리포니아·콜로라도 서부·네바다·뉴 멕시코·텍사스·유타 지역을 미국에게 넘겨주었다.
국경 분쟁에서 패배한 멕시코는 내란에 돌입하게 되고, 아직 국경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텍사스 일대는 멕시코 반란군의 소굴이었다. 멕시코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미국 용병을 고용하게 되는데, 멕시코 정부는 용병이 벗겨온 반란군의 머리 가죽 숫자에 따라 대가를 지불했다. 『핏빛 자오선』은 멕시코 정부에 고용된 미국인 ‘머리 가죽 사냥꾼’들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았던 글랜턴 일당의 원정기를 뼈대로 한다. 많은 머리 가죽 사냥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온갖 인종과 범죄자들의 조합인 이 소규모 부대는 멕시코 반란군과 싸우기보다는, 무장되지 않은 아파치 마을과 멕시코 유민(流民)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해서 머리 가죽을 벗겼다.
저명한 문학 평론가인 해럴드 블룸은 자신이 선정한 고전과 고전 읽기 비법을 소개한 『독서 기술』(을유문화사, 2011)의 한 장을 매카시의 바로 이 소설에 바쳤다. 그러면서 이 소설이 묘사하는 압도적인 학살 장면에 주춤한 때문에, 두 번이나 이 책을 읽는 데에 실패했다고 밝히고 있다. 야만성과 잔혹성을 기준으로 삼자면, 이 작품은 지금까지 내가 읽은 소설 가운데 가장 끔찍했던 모옌의 『탄샹싱』(중앙M&B, 2003)이나, 쥴퓨 리반엘리 『살모사의 눈부심』(문학세상, 2002)에 뒤지지 않는다.
글랜턴이 대장이지만 『핏빛 자오선』의 진짜 주인공은, 머리 가죽 사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며, 고유 명사로 불리는 숱한 등장인물과 달리 유독 ‘판사’와 ‘소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두 사람이다(판사에게는 홀든이라는 이름이 있긴 하다). 열네 살 때 집을 가출한 소년은 허클베리 핀처럼 자유와 인식을 찾아 유랑하는 존재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처음 총을 맞아 보았고, 열여섯 살 때 글랜턴의 용병부대에 들어가서 만 1년 동안 지옥과 같은 학살극을 체험한다. 그 일이 끝났을 때, 그는 “노인”으로 보일 만큼 갑자기 늙어버렸다.
그러나 글랜튼 일당에 섞여 머리 가죽 사냥을 나섰던 1849~50년에 이미 중년을 훨씬 넘었을 판사는,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1878년 마흔다섯 살이 된 소년을 만났을 때도, 여전히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매카시는 판사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특별한 인물로 조탁해 놓았는데, 우선 그는 2미터 10센티의 키에 몸무게는 100킬로그램을 넘었다. 그리고 바위 같은 대머리일 뿐 아니라, 수염이 난 흔적도, 눈썹도 속눈썹도, 코털도 없다. 그런데다가 알비노(색소결핍증)인 그는 눈처럼 희다!(백색 야만인!)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하고, 철학·식물학·지질학·고생물학에 대해 정통하며, 전투가 끝나면 항상 스케치에 몰두한다.
글랜턴이 살인 기계라면, 판사는 살인 기계를 움직이는 혼이다. 그는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전쟁은 인간을 기다렸”다고 주장하며 “전쟁이 계속되는 건 젊은이들이 전쟁을 사랑하고, 노인들이 젊은이의 전쟁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네. 싸우는 자도 싸우지 않는 자도 전쟁을 사랑하지”라는 논리를 펼친다. 전쟁은 “가장 진실한 형태의 예언”이며, 인간의 의지는 전쟁이라는 “더 큰 의지”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 기계와 짝지어진 것이 “똥을 질겅질겅 씹”는 저능아라는 사실은 재미있다.
글랜턴 일당은 어느 개척민 마을(요새)에서, 한 사내가 미주리 주에 사는 어머니가 임종하면서 보내왔다는 저능아 동생(그냥 상자에 넣어 배에 실었는데, 5주일 만에 도착했다)을 구경하게 된다. 동정이나 선행과는 담을 쌓은 판사는 그 저능아에게 세례식과 같은 의식을 치러 주고, 그 아이의 보호자가 된다. 이때 동료들은 판사가 저능아를 유사시에 자신의 ‘비상식량’으로 삼기 위함이라고 수군댔다. 소위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로 불리는 미국의 위인 가운데 벤자민 프랭클린과 가장 흡사할 판사와 똥을 먹는 저능아의 조합은, 악에도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여기는 미국의 초절주의 철학과, 미국 제국주의의 맹목성을 동시에 암시한다. 이쯤에서, 소년과 대결을 하기 위해 불쑥 자신을 드려낸 판사의 기이한 모습을 기억해 두자.
기묘하게도 판사는 썩은 [짐승]가죽을 [짐승]의 갈빗대에 펼쳐 가죽끈으로 묶어 만든 양산을 들고 있었다. 손잡이는 뭇짐승의 앞다리였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옷이 커다란 체구에 조각조각 찢겨 마치 색종이를 군데군데 붙인 듯했다. 무시무시한 양산과 목줄을 한 저능아 때문에 그는 마치 분노한 주민들에게 쫓겨 달아나는 별 볼 일 없는 약장수 같았다.
소년과 판사의 첫 대결은 무승부로 끝났다. 그러나 28년 뒤에 우연히 만난 주점의 옥외 변소에서 판사는 소년을 살해하고 승자가 된다. 그런 직후 그는 주점의 무도장으로 돌아와 벌거벗은 채 괴물처럼 춤을 춘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판사는 최고의 인기를 끈다. 모자를 휙 던지자 달덩이 같은 대머리가 램프 아래로 하얗게 지나가고, 활기차게 춤을 추다 바이올린을 빼앗아 들고는 한 발을 들고 빙그르르 돈다. 한 바퀴, 두 바퀴. 그는 춤을 추는 동시에 바이올린을 켠다. 발은 가볍고 민첩하다. 그는 결코 자지 않는다.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빛과 어둠 속에서 춤을 추고 최고의 사랑을 받는다. 판사, 그는 결코 자지 않는다. 그는 춤을 추고, 또 춘다.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판사가 쉬지 않고 추는 저 흥겨운 춤이 “전쟁과 피에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를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출 수 있는 “전사의 권리”라는 것은 별도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악이 존재하는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면, 자연은 악을 물리치기 힘들다. 그런 세계 속에서는 악이라고 해서 결코 없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 매카시의 작품이 염세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핏빛 자오선』의 판사가 죽지 않는 것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청부 살해업자인 시거 역시 끝내 잡히지 않은 채 “불가사의한 남자” 또는 “유령”으로 명명되었으며(그래서 보안관 부부는 『요한 계시록』에서 답을 찾고자 하며), 『로드』에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 아들의 운명은, 진짜로 저능아를 ‘비상식량’으로 간수하고자 했을지도 모르는 판사와 같은 길손에게 맡겨졌다.
그럼에도, 세 소설의 공통점이 있다. 먼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마지막 문장.
[꿈속에서] 나는 아버지가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을 머금은 뿔피리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안에 담긴 불빛으로 뿔피리를 볼 수 있었다. 달빛 색깔과 비슷했다. 꿈에서 나는 아버지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그토록 춥고 어두운 세상의 어딘가에서 불을 피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언제든 닿으면 아버지가 거기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다음은 아버지와 아들이 이별하는 『로드』의 한 장면.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
제발.
안 돼. 너는 불을 운반해야 돼.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요.
모르긴 왜 몰라.
그게 진짠가요. 불이?
그럼 진짜지.
어디 있죠?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왜 몰라. 네 안에 있어. 늘 거기 있었어. 내 눈에는 보이는데.
마지막으로 『핏빛 자오선』의 본문 뒤에 붙은 반 페이지 분량의 에필로그.
새벽녘 사내 하나가 땅바닥에 구멍을 내며 평야를 나아가고 있다. 사내는 손잡이가 두 개 달린 도구를 쓴다. 그것을 푹 찔러 구멍을 내고는 구멍 속 돌을 강철로 부딪쳐 불을 지핀다. (…)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는 불구덩이를 따라 한 명씩 나아가지만, 그것은 추적의 연속이라기보다는 인과 관계라는 원칙을 확인하기 위함인 듯하다.
매카시가 매번 강조하는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 심심치 않게 나오는 잠언들로부터, 그가 꺼트리지 않으려는 불이 무엇인가를 가까스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이런 대목.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보안관님의 담당 군에서 범죄가 그렇게 만연하게 되었을까요? 정당한 질문처럼 들렸다. 꽤 정당한 질문인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례를 용납하게 될 때 모든 게 시작됩니다. 더 이상 존칭과 경어를 듣지 못하는 순간 눈앞에 종말이 보이는 거지요. (…) 그러다 보면 마침내 상업 윤리가 무너지고 사람을 죽여 차에 집어넣고 사막에 버려지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때는 모든 게 너무 늦게 됩니다.
존칭과 경어가 문명을 지탱하는 따듯한 불이 될 수도 있다. 누가 그것을 부인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핏빛 자오선』에서 매카시가 보여준, 미국 건국 신화와 건국 서사에 대한 적나라한 직시가 더욱 뜨겁게 느껴진다. 『핏빛 자오선』은 공식화된 미국의 건국 신화와 건국 서사가 왜곡하거나 은폐한 비공식적 역사를 과감하게 드러냄으로써, 과거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불이 되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소년은 마크 트웨인이 창조한 허클베리 핀의 환생이라면, 판사는 허먼 멜빌이 창조한 에이허브 선장의 환생이다. 판사는 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의지에 초자연적인 정의 개념을 부여했던 에이허브 선장과 같이, 전쟁이라는 집단적 의지에 정의라는 개념을 부여한다.
해럴드 블룸은 앞서의 책에서 『핏빛 자오선』의 “과장된 풍부함과 강렬함”을 셰익스피어-멜빌-포크너의 스타일 속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예로 들어 보인 몇몇 일화에서 맛볼 수 있었듯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도 아홉 개의 입이 더 필요한 이 작품의 뛰어난 스타일은 마르케스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핏빛 자오선』의 무대인 텍사스, 특히 머리 가죽 사냥꾼이 날뛰던 그 시절의 멕시코-텍사스 국경은, 거의 라티노(Latino)의 세계다. 내가 보기에 그 라티노의 세계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이, 미국 소설의 특별한 전통 가운데 하나인 로맨스(romance)가 남미 소설의 대표적 스타일인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변전하고 말았다.
사족: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은 『교양인의 책읽기』(해바라기, 2004)라는 제목으로 나온 바 있으나, 이 독후감에서는 절판된 해바라기본 대신, 을유문화사본을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