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
최상규의 『최상규 작품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0546)을 읽다. - 이 책은 어제 읽은 『강용준 작품집』과 함께 읽었으나, 독후감은 하루 늦게 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짜에 출간된 두 작품집의 작가들은, 실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최상규는 1934년생으로 1956년에 등단을 했고, 강용준은 1931년생으로 1960년에 등단을 했다. 연배나 등단 시기가 비슷한 두 사람은 실존주의에 경사된 작풍마저 같았다. 서로 친교가 없지 않았던지 『최상규 작품집』의 해설 가운데는, 강용준이 최상규를 일컬어 “지적인 작가요 스타일리스트”라고 평한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
이 작품집에는 차례대로 「사각死角」·「신지군 申之君」·「열외」·「꿩 한 마리」·「모래 헤엄」이 수록되어 있는데, 내가 이십 대에 쓴 어떤 중편에 줄거리를 인용하기도 했던 「유리의 성城」은 아쉽게도 누락되었다.
맨 앞에 실린 「사각死角」은 작가의 실존주의에 대한 이해를 잘 드러내고 있는 수작이다. 원래 사각은 ‘어느 각도에서도 보이지 아니하는 범위’를 말하지만, 군사 용어로는 ‘총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으면서도 무기의 구조나 장애물 때문에 쏠 수 없는 범위’를 말한다. 주인공은 복무연한이 지나고도 제대 이후의 삶을 계획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장교로, 어서 제대해서 기반을 닦으라는 아내의 채근에도 섣불리 제대 결정을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사회와 대면할 패기가 없는 그에게 군대생활은 사각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잡화상을 하고 있는 옛 동료를 만나게 된다. 상이군인으로 먼저 제대했던 친구는 적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잠시 사각에서 생명을 부지했던 체험과 거기서 뛰쳐나와 죽음과 대면했을 때 느꼈던 황홀감을 들려준 끝에, 이렇게 말한다.
요는 ‘번득임’이야. 그게 굉장히 귀한 거야. 내 일생에 단 한 번 있었던 일이고 영원히 다시 있을 수 없는 거지. 그때 나는 살았어. 내 한평생보다 더 긴 인생을 살았지. 무슨 충동으로 그걸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 모든 결정이나 결단조차도 초월한 그리고 의미를 초월한 확고한 그리고 냉담한 결정된 마음… 내가 말솜씨가 없어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게 바로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인지도 모르지, 그 원리에 의해 나는 산다. 사각 안에 들어서 위험이니 안전이니 생각한 것은 쓸데없는 낭비의 사치였지. 그러니까 그 옛날 너하고 나하고와의 웅대한 포부와 자부도 잊고 나는 잡화상도 할 수 있는 거고…
주인공은 친구가 체험했다는, 한평생보다 더 긴 세월을 산 것 같았다는 ‘번득임’에 설복되어 제대하고, 아내의 친구 아버지가 경영하는 버스 회사의 버스 기사가 된다. 첫 출근을 하기 전날 저녁, 아내는 이브 몽땅이 어떤 영화에서 맨 것과 같은 스카프를 선물한다. 이 작품에서 아내가 선물한 스카프는 ‘연극적 소도구’다. 아내는 그 스카프로 남편의 사기를 진작하는 양 하면서, 남편이라는 허수아비에게 ‘가장의 굴레’를 씌운다. 스카프를 받은 남편은 “쌩큐!”라고 화답하면서, 남편의 역할을 수긍한다. 이것은 “피차에 다 기쁜 일이다.”
스카프를 목에 매고 첫 출근을 한 날 청명한 아침, 주인공은 개 한 마리를 치어 죽인다. 개를 치어 죽인 일은 별 게 아니었지만, 그는 스카프를 풀어 호주머니에 꾸겨 넣고 근무지를 이탈한다. 그에겐 왠지 그 개가 “바퀴 밑으로 죽음을 향해서” 굴러든 것처럼 느껴졌고, 바퀴를 향해 달려들던 개의 눈에서 자신은 가져보지 못했던 번득임을 본 것처럼 여겨졌다.
“그 개에게 그러한 번득임이?”
불현듯 그의 생각은 꼬리를 내렸다. 그러면서 그 개의 영상 외에 또 하나의, 이미 죽음과 삶을 초월해 사각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 친구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 두 개의 영상이 한동안 서로 엇갈리면서 돌다가 드디어 네 개의 눈알이 일치되는 것이었다. 바퀴 밑으로 굴러들던 개의 눈알과, 총탄의 빗발 속으로 뛰쳐나가는 친구의 두 눈알과 - 순간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서 거리로 뛰쳐나오고야 말았다.
실존주의자들에게 선택이란 실존이나 자유와 동의어이다. 제대를 결정하고 사회생활과 맞서기로 한 주인공의 결심은, 얼핏 보기에 무기력한 안주보다는 번득임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그는 실존하기보다, 실존을 면하고자 연기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연기란 ‘나’가 아니라, 누군가의 맞상대가 되어, 누군가가 원하는 무엇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나’가 되는 것보다, 누군가의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며, 배우자가 되는 게 더 쉽다. 아니, 그게 ‘나’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라도, 우리는 ‘나’가 되는 쉬운 일보다, 부모·자식·배우자가 되는 더 어려운 일에 전력한다. 쉬우면 쉬운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우리는 연기를 하면서 실존을 회피한다. 「사각」의 주인공은 ‘번득임’을 계기/핑계 삼아, ‘남편’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사각」의 주인공에게 번득임은 두 번 찾아온다. 첫 번째는 옛 동료의 ‘개똥철학(무용담)을 듣고 나서 제대를 결행했을 때. 그러나 이때의 번득임은 실존과는 거리가 먼, 연기의 세계로 그를 이끌었다. 두 번째는 개를 치어 죽이고 근무지에서 이탈했을 때. 근무지를 이탈한 그는 개울물(거울!)을 굽어보며, 자신의 연기가 서툴렀음을 자각한다. “다시 시작하자고-”
삶의 우연성(「신지군」), 규율 사회의 광기(「열외」), 인간의 원초적 고독(「꿩 한 마리」), 인간 조건의 불완전성(「모래 헤엄」)을 주제로 삼은 나머지 작품에서도, 작가가 성취한 실존의 고뇌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