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자크(1841~1904)는 프라하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넬라호제베스(뮐트하우젠)에서 태어났다. 발칸 지역의 인종과 종교가 워낙 복잡해서 체코의 역사 또한 간단치 않다. 체코는 1618년부터 시작된 30년 전쟁이 끝난 1648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했으나, 1938년 나치 독일에 합병되었다. 그 후 나치가 패망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가, 소련이 해체되고 난 몇 년 후인 1993년에 체코는 평화적으로 슬로바키아와 분리했다.
괄호 안의 생몰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드보르자크는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가 없던 때에 살았던 사람으로, 그때는 국민 국가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인의 욕망이 도가니처럼 끓었다. 그 탓에 드보르자크는 본의 아니게 스메타나의 적수가 되었다. 체코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범슬라브주의들이 보기에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1824~1884)와 달리, 유럽의 선진 문화에 체코를 귀속시키려는 유럽주의자로 비쳤던 것이다. 과격주의자들의 편 가르기에 불과한 이런 비난은, 드보르자크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에서 받았던 오해와 같다. 차이코프스키는 동시대에 활약한 러시아 국민악파인 5인조(발라키레프·보로딘·큐이·무스르그스키·림스키-코르사코프)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그들과 불화했다.
드보르자크는 대대로 여관업과 푸줏간을 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3세가 되자 그의 부모는 두 가지 실질적인 목적을 위하여 아들을 가까운 도시인 즐로니체로 보냈다. 그곳의 간이실업학교에서 드보르자크는 독일어와 푸줏간 기술이라는 애초의 교육 목적을 완수하고,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해 줄 후원자까지 만난다. 독일인 음악선생인 안톤 리만은 그에게 오르간, 피아노, 비올라 연주법과 음악이론을 지도했고 베토벤의 작품을 익히게 했다. 평전 『드보르자크』(한길사, 1998, 한길로로로035)를 쓴 쿠르트 호놀카의 유머러스한 표현을 빌리자면 “음악사상 도축업자 자격증을 가진 유일한 작곡가”로 꼽히는 그는, 나중에 그가 쓴 첫 번째 교향곡에 <즐로니체의 종소리>라는 표제를 붙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드보르자크에게 도축업자의 길을 고집했으나 음악선생 리만과 외삼촌의 설득에 못 이겨, 16세가 된 아들을 교회음악가 양성 기관인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로 보낸다. 그곳에서 드보르자크는 프라하의 오랜 전통이 되어 버린 모차르트 숭배에 만족하지 않고, 독일 낭만주의자 그룹인 리스트와 바그너를 알게 되었고, 또한 평생토록 흠모하게 될 슈베르트를 알게 된다. 위와 같은 드보르자크의 이력은 서구의 클래식 음악이 넓게는 서유럽의 것이며, 좁게는 독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의 동의어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다시 말해 거론된 대독일(오스트리아+독일)의 음악가들은 유럽 변방에서 태어난 드보르자크가 음악가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하는 참고서였다.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인 롤랑 마누엘이 여러 대담자들과 함께 쓴 『음악의 정신사』(홍성사, 1979)는 소위 유럽의 클래식 음악이란 18세기 후반부터 밀라노, 빈, 만하임, 파리에서 형성된 “공통의 언어”를 말한다. 물론 이때도 국적, 종족, 기질에 따라 자신의 액센트(개성)가 실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저도 모르게 우연히 나타난 것이지 의식적인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보편적인 스타일은 두 가지 연원에 의해, 19세기 후반부터 분해되기 시작한다. 첫 번째는 19세기 후반에 만개한 낭만주의 음악, 두 번째는 프랑스 혁명이 유럽 전체에 퍼뜨린 민족주의 의식. 이 둘이 합치면서 국적·인종·지리·역사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유럽 음악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롤랑 마누엘은 이 사태를 “낭만주의의 정치적 산물”이라고 절묘히 요약하고 있거니와, 러시아 5인조를 비롯해 스칸디나비아(시벨리우스·그리그)와 동유럽(스메타나·드보르자크·모뉴쉬코·바르톡·에르켈)의 국민악파Nationalist School 음악가들은, 서유럽 음악의 극단인 19세기 낭만주의에서 갈라져 나온 또 다른 극단(지역 음악)이다.
스메타나 추종자들과 드보르자크 추종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범슬라브주의와 유럽주의의 반목은, 이런 배경에서 태어났다. 앞서 차이코프스키의 예가 잠시 언급되었지만, 오늘날의 음악 애호가들이 차이코프스키를 누구보다도 더 ‘러시아적’이라고 여기는 것과 달리, 동시대의 대중들과 러시아 5인조의 시각은 달랐다. 그들이 볼 때, 차이코프스키는 때때로 민속음악을 접목시켰을 뿐, 서구화된 작곡가였다. 에버렛 헬름의 『차이코프스키』를 보면, 이런 비난에 대해 차이코프스키는 “전반적으로 저의 모든 음악 속에서 러시아적인 요소, 즉 러시아 민속음악과 비슷한 선율의 진행과 화음이 나타”난다고 항변하고 있다. ‘막강한 소수’였던 당대의 러시아 5인조와 차이코프스키 가운데, 어디에 진실이 있을까?
에버렛 헬름이 쓰고 있듯이 러시아 5인조의 음악적 이상은 민족적인 것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게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러시아 5인조의 이런 단견은 롤랑 마누엘이 『음악의 정신사』에서 국민악파의 등장을 분석하면서, “그들[국민악파]의 약점은 바로 이들의 인공적이며 미리부터 정해두었던 의도에 따라 창작한 점에 있다”는 평가와 정확히 일치한다. 다시 말해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민족적인 정체성을 전혀 잃지 않고 국제적인 음악 언어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 러시아 5인조에게는 ‘서구적’인 것으로 들렸다. 하지만 훗날 스트라빈스키가 보증했듯이 “차이코프스키야말로 우리 모두들 가운데 가장 러시아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사정은 드보르자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20대 초반의 드보르자크가 자신의 음악 경력을 막 시작하고 있던 1866년에 스메타나는 체코어를 대본으로 삼은 최초의 체코 오페라 <팔려간 신부>를 초연하고, 일약 체코 민족부흥의 영웅이 되었다. 체코인들이 스메타나에게 받은 그때의 인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의 찬미가들에 의해 억지로 유럽주의자 진영에 세워졌다. 하지만 9번 교향곡 <신세계에서>와 4중주 <아메리카>를 비롯한 드보르자크 유명 작품들이 보헤미아(체코의 옛 이름)의 민속음악적 특징인 5음계 선율을 흔히 차용하고 있듯이 그의 음악은 “체코적”이었다. 그런 한편 그는 “민속적인 것을 단순히 사용하기만 해서는 높은 수준의 국민음악을 창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질풍노도와 같은 국민악파의 열기가 지나간 오늘날, 드보르자크만큼 “시간과 환경이 그에게 설정해 준 주된 과제를 넘어 세계적 위치로 성장한 사람”은 없다는 게 『드보르자크』를 쓴 쿠르트 호놀카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