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일
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작가정신, 2001, 작가정신 소설향14)을 읽다. - 특급 호텔에 전속된 케이크 디자이너인 서른여섯 살 난 여자와,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대학 강사를 전전하고 있는 서른세 살 난 유부남의 연애 이야기라면, 모두들 ‘알만한 이야기’라고 여긴다. 줄거리만 보면, 『아주 사소한 중독』은 그런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사소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단연,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가 파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하고도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무덤 앞이었다는 설정이다. 생면부지였던 두 사람은 서로를 탐색하는 암호로 『연인』·『롤 발레리 스텡의 황홀』·『복도에 앉은 남자』와 같은 뒤라스의 작품을 거론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복도에 앉은 남자』. 아래는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서 아무 약속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이, 서울의 어느 아틀리에에서 우연하게 재회하는 장면이다.
“우리 만난 적 있죠?”
(…)
“『복도에 앉은 남자』?”
둘은 똑같이 복창하듯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녀의 소리가 그의 것보다 조금 더 크게 울렸다. 멀찍이 테이블에 앉은 일원들이 놀라 둘에게 시선을 던졌다.
“뒤라스!”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가 또 입을 연 것이 역시 복창이 되었다. 둘은 박수 치듯이 서로 얼굴이 뒤로 젖혀지도록 유쾌하게 웃었다.
원래 「복도에 앉은 남자」는 뒤라스가 쓴 단편 소설이다. 그래서 그 단편만을 지칭한다면 홑꺽쇠로 처리되어야 옳지만,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뒤라스의 중·단편집 제목이 또 『복도에 앉은 남자』(문학사상사, 1986)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중독』을 더 잘 읽기 위해서는 두 주인공들이 『복도에 앉은 남자』에 실린 중·단편 전체에 매료되었는지, 아니면 「복도에 앉은 남자」만을 특정해서 가리키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다섯 편의 중·단편을 묶어 놓은 문학사상사의 『복도에 앉은 남자』에는 뒤라스에게 콩쿠르상을 안겨준 중편 「연인」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여주인공이 유독 「연인」만 빼놓고 읽은 게 아니라면, “그녀[뒤라스-인용자]의 『연인』을 영화로만 봤어요. 아주 오래전에 우연히 『복도에 앉은 남자』라는 소설을 읽었구요”라는 그녀의 대사는 어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므로 작중의 두 주인공이 지칭하는 것은 『복도에 앉은 남자』가 아닌, 「복도에 앉은 남자」를 짚어 가리키는 거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복도에 앉은 남자」는 어떤 작품인가? 포르노그라피를 연상케 하는 그 작품의 첫머리는 이렇다.
그 남자는 바깥쪽으로 열린 문과 마주 보는 어두운 복도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몇 미터 떨어져서, 자갈길 위에 드러누워 있는 한 여자를 쳐다보고 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원은 아주 가파른 경사를 이루면서 평야와 나무가 없어 헐벗은 계곡과 강변을 따라 일구어 놓은 밭들과 이어져 있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그 강까지 펼쳐진다. 그 너머, 아주 멀리 저 지평선까지는 어렴풋한 공간인데, 그것은 무한히 넓은 바다일 수도 있는 항상 안개 자욱한 광대한 공간이다.
그 여자는 강을 마주보는 비탈진 언덕 꼭대기까지 산책 나갔다가, 지금 그녀가 있는 이 장소로 되돌아와 복도를 마주하고, 햇빛을 받으며 드러누워 있다. 그녀가 그 남자를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여름 태양의 눈부시도록 따가운 광선에 의해, 그녀가 그 집 내부의 그늘진 곳과는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곧 저 두 사람은 한 차례의 정사에 돌입할 것인데, 두 사람의 사랑행위가 펼쳐지는 공간은 “어렴풋한”, “무한히 넓은”, “광대한”이라는 형용사가 암시하듯이, 사회나 역사의 제약을 받지 않는 ‘원초의 공간’이다. 그 원초의 공간에서 두 남녀는 한 차례의 정사를 나누었으며, 연이어 여자는 “맞아서 죽고 싶다”고 남자에게 매달리고, “언제가 그녀를 죽여버리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던 남자는 그녀의 요구에 따른다.
남자의 손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다시 내려오면서 그녀의 뺨을 후려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때리더니 이제는 냉혹하기 짝이 없다.
그 손은 그녀의 입술 언저리를 갈겼고, 그다음에는 점점 더 세게 이빨을 후려친다. “그래요. 그렇게 해주세요”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더 매를 잘 맞을 수 있도록 얼굴을 쳐들고, 더욱더 얼굴의 긴장을 풀어, 남자의 손을 보다 더 제멋대로 놀릴 수 있도록 몹시 관능적인 모습을 해 보인다.
십 분가량이 지나서 두 사람은 정확한 평행선을 이루며 나란히 자리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점점 더 강하게 때린다.
이제 그의 손은 밑으로 내려와, 그녀의 젖가슴과 몸뚱아리를 치고 있다. 그녀는 “좋아요, 그렇게 해 줘요, 그래요”라고 말한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계속 치고 때리고 하는 그 손은 매번 거세어져 이제는 기계적인 속도에까지 도달할 지경이다.
그녀의 얼굴은 얼떨떨해진 채, 멍하니 아무런 표정도 없이, 기진맥진하여 전혀 저항하는 기색도 없이 마치 시체처럼 목둘레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을 뿐이다.
내 눈에는 그녀의 몸통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얻어맞는 것이 보이는데, 그녀의 몸뚱아리는 모든 고통에 초연한 채 매질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계속 남자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후려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나서 별안간 비명을 지르는데, 그것은, 공포 바로 그 자체이다.
이제 보이는 것은 침묵 속에 잠긴 두 사람이다.
방금 보았던 가열한 사도-마조히즘은, 파괴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수용하는 능력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사랑에 관한 뒤라스의 이런 정의는 함정임의 소설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된다. 아래는 그녀의 두 주인공이 첫 번째 정사를 나누었던, 승용차 속에서의 장면이다.
그는 여러 가지 자세를 시험하며 무진 애를 쓴 다음에야 그녀에게 들어가는 데 성공했고, 그녀는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그의 몸뚱아리에 짓눌려 거의 숨도 못 쉬었다.
“죽을 것 같아요. 아, 당신!”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겨우 소리를 냈는데 그와는 달리 존댓말이었다. 그는 그녀의 존댓말에 한껏 사기가 올라서 레슬링 선수처럼 위에서 그녀의 몸을 더욱 세게 옥죄었다. 다음날 그녀의 몸은 온통 멍투성이였다.
성행위 중에 연상의 여인이 연하의 남자에게 쓴 존댓말이 연하남의 사기를 부추겼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만 제하고 나면, 뒤라스와 함정임이 공유한 사항이 금세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성행위와 죽음이 상피 붙어 있다는 인식, 둘은 성교의 양식이 보여주는 가해자로서의 남성과 피가해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이분법.
『아주 사소한 중독』의 두 주인공이 「복도에 앉은 남자」를 암호처럼 주고받기는 했지만, 저 작품의 온전한 소유자는 여자 주인공이다. 그녀가 “아주 오래전에 우연히 『복도에 앉은 남자』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는 고등학교 시절이었으므로, 여자 주인공보다 세 살 연하인 남자 주인공이 그녀보다 먼저 이 소설을 읽었을 확률은 없다.
ⅰ) 『복도에 앉은 남자』와 그것을 읽던 8월의 그 후끈한 여름이 그녀의 뇌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첫 섹스의 순간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얼굴이 불끈 달아올랐다.
ⅱ) 문예반 선생의 자취방에 처음 들르던 날이었다. 8월인데도 선풍기는 없는 작고 밀폐된 방이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열여덟인가 열일곱이었고, 그 방에서 그녀가 나올 때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시 그 방을 찾아갔을 때 방문은 잠겨 있었고, 밤새 첫눈이 내렸다. 문예반 선생은 봄이 되자 철새처럼 다른 도시로 떠나가 버렸다.
문예반 선생이 ‘철새’처럼 사라지고 나서 그녀는 실성증失聲症을 앓았다. 그 후, 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이름난 운동권 출신 선배(“전국적으로 유명한 수배인물”)와 동거하면서 그 몰래 두 번의 임신과 낙태수술을 했다. 그 애인은 정권이 바뀌자 신진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생판 모르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아주 사소한 기억조차 잊”으려고 노력하는 과정 중에, 정작 잊지 말아야 할 것까지 잊어버리는 건망증에 걸린다.
작중의 그녀는 이제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서 만난 세 번째 남자와의 이별을 목전에 두고 있다. 두 남자와의 이별이 그랬듯이, 세 번째 이별 역시 그녀에게 이명증이라는 육체적인 상처를 안긴다.
우리 만난 적이 있죠? 그 소리는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온다. 그녀가 돌아보면 매번 아무도 없다. 그녀는 옛날 심각하게 앓았던 실성증과는 또 다른 이명증耳鳴症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만하면 공동묘지와 「복도에 앉은 남자」가 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얼마만큼 큰지 알고도 남게 된다. 사랑은 ‘내가 죽는 경험’이며, 자기 파괴다. 뒤라스의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 보랏빛[노을-인용자]이 다가와서, 강의 하구를 물들이고, 안개로 덮인 하늘은 그 무한의 공간 쪽으로 향한 그의 느린 주행 속에 정지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다른 사람들도 쳐다보고 있다. 다른 여자들도, 이제는 죽은 다른 여자들도, 무한히 넓고 깊은 바다 하구를 마주하고, 강줄기를 따라 일구어 놓은 논밭에서, 여름철의 계절풍이 이처럼 몰려와 한바탕 쓸어버리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리라. 지금 나는 여름철의 폭풍우가 그 보랏빛과 함께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본다.
그 남자가 여자 위에 엎드려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꼼짝달싹하지 않는다. 여자가 잠이 든 건지 아니면 깨어 있는 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정말 모르겠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겉으로만 보면, 뒤라스의 소설에서 파괴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꼼짝달싹”하지 않은 채 “잠이 든 건지 아니면 깨어 있는 건지” 모를 여자다. 하지만 그녀의 잠 혹은 죽음이 “여름철의 폭풍우”를 불러왔으며, 그녀의 잠과 죽음이 정체된 광막한 공간에 어떤 균열(시간성)을 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성 가해자는 얼핏 정복자처럼 보이지만, 그는 여성의 열망이나 명령 앞에 수동적이었으며, 여성의 포용력에 기생한다. 어두운 복도 안에 있는 남자를 햇빛 쏟아지는 바깥으로 유인해 내는 작중의 여자는, 파괴되지 않는 ‘대지 모신大地 母神’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뒤라스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남성 가부장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와 역사를 벗겨 낸 태곳적 시·공간에 두 주인공을 부려 놓았다.
『아주 사소한 중독』은 “그녀가 유일하게 믿는 건 혀다”로 시작해서, “그녀는 점이나 미신 따위는 믿지 않지만 자신의 혀만은 무시한 적이 없다. 그것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로 끝맺어진다. 육체와 관능을 절대시하는 그녀의 대척에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지식을 너무 많이 쌓”은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차례대로 문학가(고등학교 문예반 선생), 혁명가(운동권 애인), 교수 지망생(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세 번째 남자)이었으며, 그녀를 짝사랑하는 제4의 남자인 강철기 또한 음식평론가 겸 보석평론가다. 여주인공은 추상적인 능력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들에게 상처받으면서도 자신의 영혼이나 정신을 날카롭게 벼리기보다는, 도리어 육체의 감각을 더욱 확신한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을 한 마디로 규정하라면, 그녀는 수유자授乳者다. 그녀는 자신의 혀를 남자에게 주며, 케이크를 만들어 먹이고, 사랑니 때문에 “아이처럼 투덜대며 울먹”이는 남자의 머리통을 자신의 가슴에 끌어안아 준다. 그녀는 수유자고, 치유자며, 대지 모신이다. 바로 이 장면.
그녀의 가슴에서 분리된 그의 얼굴의 한쪽 볼이 추악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녀는 서랍을 열고 소염진통제 두 알을 꺼내서 자기의 입에 넣었다가 물과 함께 그의 입으로 디밀어준다.
방금 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수유자고, 치유자며, 대지 모신이라고 뻗대기는 했지만, 이런 명명에는 어폐가 없지 않다. 뒤라스의 「복도에 앉은 남자」가 애초부터 초현실적인 시·공간에서 출발했다면, 앞선 ‘존댓말 일화’가 보여주었듯이 함정임의 작품에는 굉장히 구체적인 남성 가부장 권력(제도)이 작동한다. 다시 말해 여주인공의 실성증·건망증·이명증은, 가부장제도(권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연애와 성애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생기는 상처다.
때문에 이 소설에서는 그런 불이익에 대한 여성의 항거를 볼 수 있다. 여성 성애를 억압하거나 실연한 여성에 대해 가혹한 남성 가부장 제도와 권력에 대한 작가의 저항 전략은, 상처받고 파괴되는 여성 육체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다. 그것은 성애性愛와 애육愛肉의 제유인 ‘혀’에 대한 믿음에 이미 표명되어 있거니와, 거기에 이기주의적인 남성 성욕을 희화화하는 다음의 두 문단도 덧붙여야 한다.
ⅰ) 그동안 그가 그녀에게 준 것은 한 무더기 정액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ⅱ) 그녀는 다가오는 남자를 미련없이 물리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방전된 배터리처럼 감정이 무뎌져서 떠나겠다는 남자를 구질구질하게 붙잡지도 않는다. 그녀에게 사랑은 일시적인 정신장애일 뿐 아니라, 신체적인 기능장애를 유발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중독中毒일 뿐이다.
사랑이 “한 무더기의 정액”과 “신체적 장애”에 불과하다는 정의는 이기주의적인 남성 성욕에 대한 보기 좋은 냉소이면서, 너무 이른 나이에 “모든 남자는 떠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여주인공의 자기방어 기제이기도 하다. 역시, 내가 너무 뻗댄 것일까? 냉소와 자기방어 기제를 벗지 못한 함정임의 여주인공이 수유자고, 치유자며, 대지 모신일 리 없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을까? 원인은 탈역사화된 공간(「복도에 앉은 남자」)과 현실적인 공간(『아주 사소한 중독』)의 차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