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2일
이사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애플북스, 2007)를 읽다. - 1951년, 옥스퍼드 대학의 슬라브 학회지에 발표될 당시의 제목은 『An Essay on Tolstoy's View of History』였으나, 원고를 대폭 수정하고 새로운 장을 더하여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번역서의 제목과 같은 『The Hedgehog and the Fox』가 되었다.
벌린은 이 책의 주제이면서 제목이 된 ‘고슴도치와 여우’를,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우화로부터 빌려 왔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이 우화는, 학자마다 해석이 다를 정도로 모호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여우가 온갖 교활한 꾀를 부려도 고슴도치의 한 가지 확실한 호신법을 이겨낼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책의 옮긴이는 이 우화가 자기계발서에 흔히 인용된다면서, “여우처럼 이곳저곳을 기웃대는 사람보다는 하나의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고슴도치가 되어야 한다”는 충고와 “고슴도치와 여우를 아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상반된 조언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또 어떤가?: “방어형의 고슴도치 경영과 공격형인 여우 경영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온몸에 돋친 가시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고슴도치와 공격적이고 꾀 많은 지략가 형태인 여우의 스타일을 기업경영에 함께 적용시켜야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내 노트에 적혀 있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말이다. 그런데 직접 인용부호까지 쳐놓은 이 글의 출전이 어딘지 모르겠다).
고무줄처럼 서두를 늘여놓아, 이 글을 읽어줄 독자들의 의문만 키웠다는 걱정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문은 애초의 제목인 『An Essay on Tolstoy's View of History』를 『The Hedgehog and the Fox』로 바꾼 벌린의 책임이지 내 탓이 아니다. 대체 톨스토이의 역사관과 ‘고슴도치와 여우’의 우화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크게 보면 두 부류”로 나뉜다면서 지은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①한 부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들로, 이들은 어떤 보편 원리나 일관된 시스템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느낀다. ②또 다른 부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로, 이 목표들은 서로 관계가 없으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행동 지향적이며, 생각의 방향을 좁혀가기보다는 확산시키는 경향이 있다. ①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의 비전에 그들 자신을 맞춰가려고 애쓰는 반면 ②는 산만하고 분산적이며 다양하고 다채로운 경험과 대상의 본질을 추구해 나가는 동안, 자기 모순적이고 불완전하며 광적이 되는 것도 불사한다.
주로 정치철학과 사상사에 업적을 남기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벌린은, 자신의 분류가 지나치게 경직되고 단순화한 이분법이라고 전제한 뒤, 이렇게 말한다: “단테는 고슴도치형이고 셰익스피어는 여우형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플라톤, 루크레티우스, 파스칼, 헤겔, 도스토옙스키, 니체, 입센, 프루스트가 고슴도치형에 속한다면 헤로도토스,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에라스뮈스, 몰리에르, 괴테, 푸시킨, 발자크, 조이스는 여우형에 속한다.”
태생이 러시아인이었던 지은이에게, 러시아 문학의 두 거장인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를 여우형과 고슴도치형의 극단으로 나누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고슴도치형인지 여우형인지, 일원론자인지 다원론자인지, 결국 톨스토이가 하나의 비전을 추구했는지 다양한 비전을 추구했는지를 살펴보면 명료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 의문에 대해 우리들은 아주 상식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농민과 동고동락하려고 했으며, 끝내는 가난한 농민에게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나누어 준 사람이 아니었던가?
지은이는 우리가 내린 상식적인 해답은, 우리가 ‘톨스토이의 이상주의’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라면서, “톨스토이는 본래 여우였지만 스스로 고슴도치라 믿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벌린은 이런 가정을 증명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를 중심으로 톨스토이의 역사관(역사 철학)을 고찰하고 있다: “대체로 톨스토이의 역사 철학은 그에 걸맞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 자체로 흥미로운 관점으로도 연구되지 않았고, 사상의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역사관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톨스토이라는 인물의 발전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요인으로도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숱한 톨스토이의 연구자들이나 독자들은 톨스토이를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하면서도, 사상가로서는 조악하다고 판단한다. 이런 평판은 톨스토이가 살아 있던 당대에서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꽤 일관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작가로서는 뛰어나지만 사상가로서는 결함투성이였다는 이런 평가는 아예 톨스토이의 삶을, 문학에 열중했던 전반부와 사상가(성자) 역할을 자처했던 후반부로 양분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과연 톨스토이의 삶은 작가로서의 삶과 사상가로서의 삶으로 양단될 수 있을까?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진 결과, 톨스토이는 기존의 역사학이 ‘인간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실증주의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만을 말해줄 뿐,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음은 톨스토이의 말이다: “역사는 과학과 예술과 윤리 간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선과 악의 관계, 종교와 시민다운 미덕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역사는 훈족이 어디에서 왔고, 훈족이 어느 시대에 살았으며, 누가 훈족을 강대국으로 키웠는지에 대해 말해줄 뿐이다.” 톨스토이는 실증주의 역사학이 사건의 원인이나 설명을 하지 못한 채 순서대로 나열할 뿐이라고 공박했다.
또 그는 실증주의 역사학뿐 아니라, 역사의 일반 법칙을 찾으려고 했던 헤겔이나 유물론적 역사 철학에 대해서도 강한 반감을 가졌다: “유물론자는 삶이 진정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개인적 영혼 밖에 위치하는 하찮은 것들, 가령 사회적이고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현실을 진실된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개인의 경험, 개인들의 사사로운 관계, 색깔, 냄새와 맛, 소리와 움직임, 질투와 사랑과 증오, 열정, 순간적으로 떠오른 혜안, 끊임없이 변하는 순간들, 일상의 나날들, 이런 모든 것들이 삶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들이었다.”(이 인용은 톨스토이의 육성을 그대로 옮긴 앞선 인용과 달리, 톨스토이의 반유물사관을 설명한 벌린의 서술이다. 그러므로 이 서술에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인 벌린의 육성이 울린다).
실증주의 역사나 유물사관은 물론이고, 톨스토이는 나폴레옹과 같은 개인이 자력으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영웅사관도 믿지 않았다. 변화무쌍하고 무한히 복잡한 인간과 사건의 상호작용인 역사를, 하나의 이론이나 패턴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온갖 역사관을 톨스토이는 믿지 않았다.
대신 그가 믿은 것은, 더 쪼갤 수 없을 만큼 무한히 작은 “무한소無限素”였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관여 여부를 불문하고 무한히 작은 행위와 사건”은 왜곡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의 민중과 그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톨스토이는 ‘냉혹한’ 사실, 즉 보통 사람의 지능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입증할 수 있는 것을 추구했다. 달리 말하면, 구체적인 현실과 동떨어진 복잡한 이론으로 포장되지 않은 것, 초자연적이고 신학적이며 시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미스터리로 덧씌워지지 않은 것을 추구했다.”
톨스토이는 계몽주의나 유물사관이 이론화해놓은 ‘역사의 법칙’을 거부했지, 인간의 사소한 경험이 모여 움직이는 역사의 ‘힘’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증이나 과학 같은 전문가의 지식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찾는 데 방해가 되었다면서, 이론과 과학에 세뇌되지 않은 러시아 농민과 그들의 일상이 곧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보았다.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보다 사상가를 자임하면서 러시아 농민과 동고동락하고, 끝내는 가난한 농민에게 자신의 재산을 송두리째 던지고자 했던 톨스토이의 후반은 이런 역사관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지은이는 톨스토이의 본령이 “미시적인 인식과 분석”이라면서, “톨스토이는 우리 시대에서 미시적 분석의 최고봉”이었다고 상찬한다. 하지만 미시적인 것에 대한 집착 탓에 “세계는 시스템이고 네트워크”라는 것을 간과하게 되었고, 때문에 “그에게는 전체를 보는 힘”이 없었으며, “그저 전체를 보는 것처럼 말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벌린은 톨스토이를 “단원론적인 세계관을 향한 여우의 열정적 욕망, 즉 고슴도치처럼 세상을 보려는 여우의 욕망”을 가졌던 작가로 평가하면서, 여우형 인물이었던 그를 가나안에 입장하지 못했던 모세와 자기 나라에서 쫓겨난 오이디푸스에 비견한다: “모세처럼 톨스토이는 약속의 땅 앞에서 멈춰 서야만 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의 여행도 무의미하다.” “언제나 홀로였던 톨스토이는 위대한 작가 중에서 가장 애처로운 사람이었고, 콜로누스에서 눈을 가린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해 자포자기한 노인이었다.”
사족. 헨리 하디·에일린 켈리가 이사야 벌린의 흩어진 에세이를 모아 출간한 다섯 권의 책 가운데 한 권인 『러시아 사상사』(생각의나무, 2008)에는, 방금 읽은 『고슴도치와 여우』가 전문 게재되어 있다. 애플북스판을 중심으로 생각의나무판도 함께 보았는데, 전자가 훨씬 명료하고 가독성이 좋다. 같은 책을 두 권이나 갖고 있는 게 부담스러워서 애플북스판의 몇 대목을 『러시아 사상사』 속에 옮겨 적었다.
『러시아 사상사』 속에는 이사야 벌린이 『고슴도치와 여우』를 쓰고 난 10년 뒤에 쓴, 또 한 편의 톨스토이론인 「톨스토이와 계몽」이 실려 있다. 『고슴도치와 여우』가 톨스토이의 역사관(역사 철학)이었다면, 「톨스토이와 계몽」은 그의 교육관(교육 철학)이다. 톨스토이의 교육관은 그의 역사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역사를 하나의 초점으로 재단하려는 이론가(지식인)를 미워하고 보통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역사의 흐름(힘)을 길어 올리려고 했던 그는, 교육은 인간을 타락시키며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소박한 인간(농민)이 문명인보다 더 높은 가치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톨스토이는 사회계약을 주장한 루소를 우습게 여겼지만, 평생 ‘고귀한 야만인’과 ‘자연으로 돌아가라’던 루소의 영향을 간직했고, 『에밀』을 최고의 교육서로 상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