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02)를 읽다. - 이 책을 단 한 줄로 요약하면, ‘상식에 대한 저항’이다. 상식의 사전적 뜻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인데, 지은이가 이 책에서 역설하는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상식은 그 시대의 정치·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패권’의 다른 이름이다. 그람시라면 헤게모니라고 말했을 한 시대의 지배적 패권으로서의 상식이야말로, 마녀 사냥(중세 유럽)·전족(19세기까지의 중국)·노예제도(남북전쟁 이전의 미국)를 당연시하게 했던 요인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마녀 사냥·전족·노예제도를 비상식으로 만들었지만, 이 시대에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또 다른 패권(상식)이 있다. 예컨대 우리들의 상식은 경제 발전을 하지 않으면, 서양식의 근대화를 따라가지 않으면, 나라가 군대를 가지지 않으면 큰일 나는, 그런 상식이다. 흔히 ‘현실주의’라는 말과 배접되어 있는 이런 상식들은, 환경과 평화에 대한 잘못된 세뇌를 유포함으로써 진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경제에 대한 변치 않는 상식 가운데 가장 강력한 상식은, 경제 발전이 빈곤을 구제한다는 것일 테다. 하지만 발전/근대화는 20세기에 들어서 생긴, 아주 최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지은이는, 경제적 발전이나 근대화는 사람들을 행복하거나 부유하게 해준 게 아니라, 오히려 빈곤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경제의 본디 목적은 의·식·주라는 인간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었고, 그 어떤 자급자족 사회도 그 필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란 없었다. “그런데 20세기가 되면서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필요하다고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물건이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그 새로운 제품을 사지 않으면 만족한 생활이 불가능한 그런 사회를 그동안 우리는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잘못 알고 있는 막강한 경제 상식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 발전이 빈곤을 없앨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빈부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정의’는 경제학의 용어가 아닌 정치용어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컨대 “성장이 아니라 분배”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사회, 소비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나 정치가, 사업가들은 앞으로도 경제 성장이 계속된다는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성장’이라고 말하는 것의 이면을 보면, 성장을 멈추는 게 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에 따라 부자나라의 파이는 커질지 모르지만, 어디선가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국가가 있다. 더 큰, 또 다른 문제는 부자나라의 “파이는 커질지 모르지만, 지구 곧 자연환경은 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구라는 하나뿐인 타이타닉호는 자연과 환경의 약탈로 인해 죽어가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누구도 성장하는 게 아니다.
이 책은 잘못된 경제 성장 신화를 분석하고 일상의 삶과 정치적 층위 양쪽에서 거기에 저항할 것을 고무하고 있지만, 군대가 있는 한 민주주의 사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논증이 또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군대를 ‘내 나라의 민주주의가 굳건하다’는 증거로 여기고자 한다. 하지만 지난 100년 동안의 통계를 보면, 군대는 외국 군인을 죽이기보다는 국민을 죽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으며, “지금의 세계에도 자기 국민밖에 죽이지 않는 군대를 가진 나라는 많”다. 이러한 역사를 인식해야만 패권으로서의 상식에 호도되지 않은, 진정한 현실주의를 대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