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루이즈 디살보의 『불륜, 오리발 그리고 니체』(산해, 2006)를 읽다. - 이 책의 원제는 『Adultery』.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사생아 같은 제목을 짓게 되었을까? 본문에는 ‘니체’와 ‘오리발’이라는 단어가 각각 단 한 번씩 나오는데, 그걸 가지고 이런 제목을 뽑아내다니, 이 출판사의 관계자들은 괴력의 소유자들이다. 본문을 읽을 것도 없이, 이런 해괴한 짓거리가 간통이고 불륜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지은이의 두 가지 경험을 바탕으로, 간통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씌어졌다. 하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정기적인 이태리 방문. 가족들 가운데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10대 시절의 지은이는 할아버지의 정기적인 이태리 방문이 고향에 남겨둔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혼란에 빠졌다. 두 번째는, 첫째를 낳은 지 6개월 만에 남편이 외도를 고백해 왔던 것(실은 지은이에게 반쯤 덜미가 잡혔다. 미국인이라고 별수 있나? 들키지 않은 외도를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자수를 할까?).
간통에 대해서 가장 많은 자료를 쌓은 저자들은 모두 작가들이다. 그들은 창작을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불륜을 감행하거나, 혹은 자신도 제어하지 못했던 불륜의 경험을 남겨 놓고자, 또는 남의 불륜을 관찰한 결과로 한 편 이상씩의 불륜 이야기를 쓴다. 지은이는 불륜에 이르게 하는 가장 손쉬운 통로로 바로 이런 문서(문학 작품)를 꼽으면서, 불륜의 달콤한 유혹을 피하고자 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할리퀸 로맨스’ 소설을 멀리하라고 조언한다.
불륜에 관한 한 “무엇을 읽었느냐가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거듭 강조하는 지은이를 보면서, 원제를 찾을 때와 같이 다시 한 번 판권란을 보았다. 꽤 오래전 ‘아이 러브 스쿨’이라는 초등학교 동창 찾기 사이트가 그랬듯이, 인터넷이 불륜의 공급처가 된 지 오래라는데, 미국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이 책의 원서가 나온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도 아닌, 1999년! 영상과 인터넷이 대세인 21세기에, 불륜의 충동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종이책을 조심해야 한다고? 맞다, 조심해야 한다. ‘지퍼 게이트Zippergate'는 모니카 르윈스키가 빌 클린턴에게 폰섹스를 다룬 『복스 Vox』라는 책 한 권을 보낸 것으로 시작했다.
독자만 아니라 작가에게도 불륜에 관한 이야기는 ‘도덕적으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욕망에 물꼬 터주기’ 역할을 한다. <LA 타임스> 지로부터 “중년 여성의 포르노그라피”, “당신의 결혼도 자녀도 파멸로 몰아가지 않는 불륜이 여기 있다”는 서평을 받았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작가 로버트 제임스 월러는, 소설을 다 쓴 후 자신이야말로 불륜의 한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는 월러의 집 정원을 관리하면서 잡다한 집안일을 도와주는 여자 주택관리사. 월러는 중년의 농장 안주인 프란체스카와 연예인 뺨치고도 남을 바람둥이 카메라맨 킨케이드의 애정행각이 담긴 그 소설을 쓰고서, 35년간의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문학은 살아 있다! 인쇄 매체도 아직 죽지 않았다!
고작 남녀의 불륜이나 쥐어짜는 소설가 나부랭이들을 제외하고, 불륜에 관한 논쟁을 차곡차곡 쟁여온 성실한 집단으로 단연 인류학자들을 꼽을 수 있다. 한쪽 편은, 종족 번식과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에 인간은 짝짓기 상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위협받거나 도전을 받는 분위기에서는 일부일처의 가능성이 감소하고 일부다처의 가능성이 증가했다는 관찰 결과가 그렇다. 다른 편은, 인간의 짝짓기 상대는 ‘오직’까지는 아니더라도 ‘너와만’ 쪽으로 기울었다고 본다. 매번 동반자를 바꿔야 한다면 헤어지고 새로 만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정신적·정서적 열량이 소모된다. 한정된 열량을 아껴 다른 목적에 쓰기 위해, 인간은 짝짓기 상대를 좁혀가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동물학자들의 연구는 어떨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 종(90%), 거의 모든 포유류(97%)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난교를 한다. 극소수(3%)만이 오직 하나의 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 인간의 짝짓기(혹은 불륜) 행태는 위에 나온 97% 대 3%의 통계처럼, 100% 오직 한 짝과만 짝짓기를 하는 성향도, 100%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짝짓기 성향도 아닌, 어중간한 범주에 든다. 그래서 데보라 블룸이라는 과학 저널리스트는 인간의 단혼單婚은 문자 그대로 “난혼의 최소화”만을 의미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열여섯(?) 명과 동시에 관계를 가지는 게 아니라, 아내(남편)와 애인, 두 사람 사이에서만 ‘양다리’를 걸치는 게 이른바 난혼의 최소화다.
이 주제에 가장 열심히 매진하는 성과학자를 빠트릴 수 없다. 그 가운데서도 벤저민 와이커라는 ‘듣보잡’이 쓴 『세상을 망친 10권의 책』(눈과마음, 2009)에 『남성의 성적 행동』을 당당하게 등재시킨 앨프리드 킨제이의 마키아벨리풍風 어록은 독보적이다. 이 책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말들을, 직접 인용 부호 없이 옮긴다: ⅰ)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행복하게 결말이 끝나는 불륜은 더 많다, 그러나 불륜 남녀들이 공개적 거론을 기피하기 때문에 행복한 불륜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 문화 속의 청교도적 기질은 그만큼 섹스에 대해 위선적이다. ⅱ)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어떤 것이든 모두 정상이다(심지어는 동물과 하는 섹스까지도 그렇다). ⅲ) 불륜이야말로 세계 문학에서 가장 인기 있고 의미심장한 주제다. ⅳ)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불륜을 저지르고 싶어 한다.
자, 이제 지은이의 자기 치유담으로 돌아가자. 10대의 지은이를 혼란에 빠트렸던 할아버지가 가족을 보살피기보다,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사람이라는 건 분명하다. 값비싼 향수와 아마포 손수건, 반짝이는 구두… 바람둥이이자 룰루lulu(외식外飾하는 자)로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시간과 돈과 정력을 지나치리만큼 연애질과 남성다움의 유지에 퍼부으면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만 다채로웠던 할아버지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이발사였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 그에게 정부를 찾아가는 여행은 일종의 탈출이었다.
지은이는 할아버지의 탈출 욕구에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을 겹쳐 놓는다.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더 승진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자리는 많은 책임감과 반비례해서 자신의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자리이기도 하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력을 부러워한들, 자신의 사생활을 숨길 곳 없는 최고의 자리에서 느끼는 공허의 몫은 따로 있다. 실제로 르윈스키는 클린턴이 “삶이 공허해”라고 말했다고 증언한다. 지은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대목에 불륜을 벌일 당시, 수련의를 하고 있던 남편의 “전쟁터” 같은 상황을 포개 놓는다. 지은이는 이 중첩된 예들을 통해, 불륜은 개인의 ‘자율성’이 박탈당했을 때 가열하게 불타오르는 인화引火 감정이라고 푼다. 이때, 개인의 자율성을 구속하는 것은 일상이나 직장이기보다, 최우선적으로는 ‘결혼’, 그 자체다.
남편의 불륜과 맞닥뜨리고 나서 지은이는, 자신이 한 번도 탐험해보지 못했던 인간에 대한 탐구에 나선다. 그 끝에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이의 반쪽이 될 수 없음을, 그건 환상일 뿐임을 깨닫”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를 꿈꾸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낭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생각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자신이 관계 맺는 사람들(특히나 결혼 상대)에게 거는 것 같다. 그로 인해 서로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의 생각일 뿐 정녕 그들의 것이 아니므로 헛된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 자신도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것을 그 또는 그녀가 베풀어주리라고 단정하고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불행하기 짝이 없는 결혼의 낭만적 측면이다.”
남편의 “불륜은 내게 성장을 멈추지 말 것을 북돋은 사건”이며, 그들의 “결혼을 구”했다고까지 말하는 지은이는, 그 후 의사의 아내로 ‘공인된 살림꾼’이 되겠다는 망상에서 깨어나 대학원에서 학업을 마치고 작가와 교수가 됐다. “남편의 불륜 때문에 나는 이전보다 더욱 확실하게 독립적인, 홀로 선 여자가 되었다. 결코 나쁜 뜻에서가 아니다”는 그녀의 해결책이, 교육받은 중산층에게만 넓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사람들과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연계를 구축”하고 다양한 종류의 “연합”을 맺으라는 권고와 “나 스스로에게 가치를 두”며 “내 일”과 “나만의 사생활, 고독, 독립, 자율”을 계속 유지하라는 조언은, 결혼 제도의 가파른 해체와 이혼율이 급증하는 시대에 귀담아들어야 할 주장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루이즈 디살보는 ‘오직 한 사람하고만 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 성취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만 갖는 이상적 형태라고 말한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아내나 남편을 두고서도 연애 감정이 생기지 말란 법이 없다. 게다가 ‘세상엔 에로스가 있고 집에는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오해하듯이 섹스가 모든 불륜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불륜을 행하는 배신자도 그렇고, 불륜으로 배신을 당한 쪽마저 기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배우자가 누군가와 섹스를 했다는 것보다 “누군가와 정말이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여겨질 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삶의 본성이 예측불허라면, 항구적인 결혼보다 불륜이 더 삶과 궁합이 맞는 배필이다. 사람들은 불륜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지은이는 그것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는 게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책을 썼다.
사족이다. 언젠가 내가 썼던 「정부정부론情夫情婦論」이, 이 책의 주장들과 상통하는 데가 있어서 여기 옮겨 놓는다. 출전은 『생각』(행복한책읽기, 2005): 하이데거를 전공한 근엄한 교수는 아내가 아닌 어린 정부의 집에서 하루 종일 <우먼센스>를 탐독한다. 말러 음악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고전음악 애호가는 심수봉의 목소리를 모창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트로트 가수를 정부로 두고 있으면서, 그녀와 함께 하루 종일 트로트를 듣는다. 집안에서는 물론이고 몸에 해롭다는 커피를 어느 장소에서도 마시지 않는 어떤 남자는 애인의 집에 들를 때마다 커피를 청해 마신다… 등등의, 이런 이중적 행동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남편이 아내에게(혹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행동과 정부에게 하는 행동이 전혀 다른 사례는 흔히 관찰된다. 그래서 결혼한 친구가 숨겨둔 애인을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보여줄 때나, 그 관계가 우연히 목격되었을 때 우리는 “뭔가 언밸런스하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된다. 하여 충고랍시고 그 친구에게 “네 타입이 아니야!”라고 말해준다. 하이데거를 전공한 교수나 말러만을 듣던 고전음악 애호가 또는 절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던 어떤 사람이 그렇게 돌변하는 것은 원래 인간이 다중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이란 하나의 자아, 그것도 서로 견딜 수 있는 하나의 자아만을 서로 보여주고, 또 받아들이기로 한 타협(연기)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이 서로에겐 속박이 아닐 수 없고, 그 생활이 갑갑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한 인간 속에 깃든 다중적 자아를 한 사람이 다 맡아 보살펴 주면 다행이겠지만, 예를 들어 한 명의 아내가 어머니·누나·여동생·소꿉친구·비서·간호사·창녀…(점점, 이 무슨 코스프레?)가 되어 남편의 다면적 자아를 모두 어루만져 주면 좋지만, 다면체로서의 남편을 파악하는 일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혼자서 그 모든 역할을 다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다.
정부란, 애인이란, 그 사람의 또 다른 자아를 분출하고 실현하는 곳이다. 가진 거라고는 돈밖에 없는 재벌회장님이 빈민가의 옥탑방에 방을 얻어 놓고 정부와 몇 시간씩을 보낸다면,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 집안에 미스코리아를 모셔둔 남편이 곰보딱지의 못난 여자와 몰래 데이트를 한데도 나는 웃음 지을 수 있다. 아내는 물론 가족과 친지로부터 “인간도 아니야!”라고 매도되는 그 남자들, 그 남자들을 이해한다(여자라도 물론이다). 당신 남편 혹은 아내의 정부는 당신 배우자의 또 다른(억눌린) 자아를 보살펴주는 해방자다. 남편은 아내와 정부를 넘나들며 자신의 다중적인 자아에 젖을 먹인다. 그게 일부일처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바람의 정체다. 재미있게도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가 아내나 남편에게 들키게 되는 것도, 그가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전혀 낯선 흔적을 어쩌다 남겨 놓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서다. 글을 마치자.
나는 이 재미없는 글을 통해, 바람피운 남자가 아내에게 잘해주는 것은 ‘죄책감’을 상쇄하고자 하는 보상심리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상식을 공박하고자 했다. 물론 그것이 보상심리를 포함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다른 해석도 허용되어야 한다. 억눌려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마음껏 뛰놀며 물을 마시고 풀을 뜯었으니, 지금 그 사람은 행복한 거다. 그래서 부드러워지고 여유만만해진 것이다. 그러니 아내에게 잘해 줄 수밖에!
김수영의 어떤 시(「성性」) 한 편은, 바람을 피운 혹은 정부를 가진 한국 남자들이 가진 일반적인 심리상태를 포착하고 있는데, 그 시를 통해 추출할 수 있는 한국 문화의 특징은 ‘주눅듬’이다. 한국인은 대체, 정부를 지니고도 마냥 즐거워할 줄 모른다. 천진난만 즐겁기는커녕 마음 한편에 배우자에 대한 죄의식과 보상심리만 잔뜩 키운 채, 그걸 사리처럼 짊어지고 있다. 바람을 피우고 안 피우고를 떠나, 왜 사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