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빠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예하, 1989)를 읽다. - 어쩌다 세 번째로 읽게 된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파리의 미용실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고 있는 열여덟 살 난 뽐므와 명문가 출신의 파리고문서古文書학교 재학생인 스무 살의 에므리가 바캉스 시즌의 해변 휴양지에서 만났다. 피서지에서의 만남은 파리로까지 이어져 두 사람은 동거 생활에 들어가지만, 계층 간의 사회·문화적 차이로 인해 그해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두고 헤어진다. 뽐므는 거식증에 걸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죄책감을 느낀 에므리는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뽐므인가? 아니다. 이 소설에는 숱한 뽐므가 나온다. ⅰ) 자신의 몸을 사는 신사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항상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말을 준비하고 있었던 뽐므의 어머니. ⅱ) 남자들의 정부노릇에서 행복을 찾는 마릴렌느. ⅲ) 남자 미용사의 손을 기다리는 숱한 암탉들(부인네들). 이 긴 목록 속에 에므리의 어머니도 넣어야 한다. 이 소설은, 레이스 뜨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만한 그 어떤 언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하게 가르쳐 주듯이, 남성 사회의 타자인 그녀들에게는 자신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 여자들은 남자의 눈과 손이 만드는 피조물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페미니즘으로 직행하는 것은 아니다.
뽐므의 두드러지는 특징인 침묵과 그녀가 맺었던 여러 인간관계에서 볼 수 있는 수동성은, 먼저 그녀의 성장 환경을 떼놓고 설명될 수 없다.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없었고, 어머니는 “술집에서 갈보짓”을 하는 자신의 직업을 아무런 생각 없이 어린 딸에게 얘기해주곤 했다. 뽐므를 자아 존중감이 모자라는 수동적인 여성으로 만든 것은 어머니의 이런 부주의였다. 작중의 두 모녀에 관한 한,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는 속설이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부재한 상태에서 생계를 위해 몸을 팔게 된 어머니와 살게 된 뽐므는, 어린아이가 자신의 자아를 귀중하게 가꾸는 데 필요한 안정감과 목표(역할 모델)를 누구로부터도 제공받지 못했다. 이 책 11쪽에 나오는 괄호야말로, 이 소설을 읽는 중용한 향도다.
미래의 국립박물관 관장감인 명문 학교 학생과 거기에 어울리는 희망을 갖지 못한 전직 창녀의 딸이 동화처럼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에므리의 말처럼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그녀는 그와 함께는 행복해질 수가 없었다. 요컨대 그들은 동일한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영불해협 근처의 해안가에서 에므리는 뽐므에게 반했다. 약간 퉁퉁할 뿐이었던 그녀에게 무슨 큰 매력이 있었을까? 어쩌자고 그는 피서지에서의 만남을 파리로까지 연장했을까?: “분명히 그녀는 가장 흔해빠진 처녀들 중의 하나였다. 에므리에게, 이 책의 저자에게나, 대부분의 남자들에게나, 그런 여자들은 그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존재로서 우리가 그녀들에게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평온함이란 우리가 자신을 위해 상상했던 아름다움과 평화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발견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그런 아름다움과 평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순간, 다만 한순간, 그런 여자들에게 애착을 가진다. 인생에 두세 번 이런 죄를 저지르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위에 인용된 구절은, 잔혹하게 비틀린 심리극이다. 프랑스 소설 속의 파리고문서학교 학생과 미용실 보조원을 우리식으로 약간 비틀자면, 지식 청년인 ‘학삐리’는 노동의 세계에 살고 있는 ‘공순이’를 꿈꾼다. 지식 청년은 자신의 세계에서 찾지 못한 노동 세계의 아름다움과 평화에 반한다. 관념적인 지식 세계의 청년은 단순하고 말이 없는 세계인 노동자의 내면과 몸짓에서, 자신에게는 없는 평화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제 ‘먹물’은 장난감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노동의 세계를 침탈한다. 『레이스 뜨는 여자』는 분명 이런 이야기이지만, 이 소설이 여기서 그쳤다면, 세 번씩 읽을 필요가 없다. 무엇이 이 소설을 세 번씩 읽도록 하는지를 말하기 전에, 바보 같은 뽐므‘들’에 대해 부연할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뽐므의 완치나 퇴원 여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그녀는 결코 병원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뽐므가 실연을 이기지 못하고 거식증 환자가 된 데에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자아 형성에 필요한 안정감과 목표를 제공받지 못한 채 유년 시절을 보냈던 탓이 크다. 이만 헤어지자는 에므리의 통보에 그녀는 “아! 좋아요!”, “잘 알고 있었어요”라고 했을 뿐, “가시 돋친 말” 한 마디는 고사하고 “울지도 않았다.” 실연이라는 간단치 않은 사태 앞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말썽”과 “저항”과 “방어”가 없는 것은, 그녀에게 지켜야 할 자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아 부재 상태는, 실연하고 돌아온 딸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에서도 찾아진다: “뽐므의 어머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고 딸에게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뜻을 이해시킬지를 알지 못했다 (…) 예를 들어 자기 딸이 언젠가는 분명히 그녀와 같은 세계에 속하는 청년을 한 명 만나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어머니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결혼하게 될 것이다. 뽐므가 수수하니까 그도 대학생이 아닌 수수한 청년일 것이다. 다른 것을 꿈꾸지 말았어야 했다.” 앞서 말했듯이, 뽐므의 어머니는 자신을 부른 신사들에게 늘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순종했었다.
『레이스 뜨는 여자』는 자신의 허약함을 인지한 한 세계(지식 세계, 부르주아 세계)가, 자신의 허약함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세계(노동 세계, 하층 세계)를 침탈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침탈은 죄의식을 동반한다. 에므리가 뽐므 앞에서 느끼는 불안과 분노와 불면과 질투는, 끝내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세계의 벽 앞에서 느끼는 결핍에 다름 아니다: “그는 잠을 자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잠자는 모습을 바라본 후로 잠을 잘 수가 없다 (…) 그녀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무無에게 미소를 짓고, 마치 애인에게 자신을 내맡기듯이 무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여러 번이나 그는 그녀를 깨워서 감히 자기가 거기에 대해 질투를 느낀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자기가 없는 그녀의 고독과 그녀의 평화의 절정으로부터 그녀를 흔들어 떨어뜨릴 뻔한다.”
뽐므에게는 꿈이 없었다. 뜨개질하는 사람의 시간과 정열이 한 필의 직물로 화化하듯이, 그녀는 “노동에 의한 집요한 경배”를 통해 “자기 일의 수행 속에서 사라지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시간과 정열을 투자해서 그것(생산물)이 되는 게, 뽐므가 처한 노동 계급의 즉물적인 꿈이었다. 반면 에므리는 항상 미래의 꿈과 함께 묘사된다. “어쨌든 그는 언젠가는 큰 국립박물관의 관장이 될 것이다”, “미래의 박물관 관장은”, “테니스 경기를 끝내고 난 미래의 박물관장은”, “오후에는 미래의 박물관장이”, “미래의 박물관장은 방금 되찾은 행운을 믿으면서”, “미래의 박물관장은 소심하게 보일까 봐”, “어느 날, 미래의 박물관장은”, “미래의 박물관장에게 있어서” 등등.
에므리의 꿈은, 꿈 없이도 행복한 뽐므의 식물 같은 삶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뽐므의 견고성 앞에서 질투를 느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불안한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기표(사회적 위치)에 의지한다. “그는 파리고문서학교의 학생이었다”, “고문서학교 학생에게는”, “고문서학교 학생은 그것을 받아들일 줄 몰랐을 것이었다”, “그러자 고문서학교 학생은”, “고문서학교 학생은”, “그들은 파리에 있는 고문서학교 학생의 방에서”, “토요일 밤이면 고문서학교 학생과 함께” 등에서 보듯이, 에므리라는 이름보다 ‘고문서학교 학생’이라는 사회적 위치가 더 자주 강조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질적인 두 세계의 조우는 뒤끝이 좋지 못했다. 뽐므는 “자기에게 그렇게 조금밖에 주지 않은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로 작정”하듯 더 이상 먹지 않기로 결정했고, 에므리는 뽐므가 인도했던 말없는 ‘사물의 세계(노동의 세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된다. 하지만 그 방법은 또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조야한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는 불현듯 어떤 계시를 받았다. 그 자신이 세계의 사물들과 벌이던 싸움을 종결지을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는 글을 쓸 것이다! 그는 작가(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다. 뽐므와 그녀의 사물들은 마침내 그의 뜻대로 처분될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것이다. 그는 뽐므를 자기가 꿈꾸어 왔던 것, 즉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 것이다.”
사족이다. 이 소설은 영화로 더 유명하다. 널리 알려진 이재형 번역의 예하본 『레이스 뜨는 여자』가 나오게 된 계기도 1980년대 말, 텔레비전으로 동명의 원작 영화가 방영되고 나서다. 민음사가 관철동의 보신각 옆에 있을 때, 지난주에 방영되었던 이 영화로 화제의 꽃을 피웠던 때가 어제 같은데, ‘뽐므’가 사과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편집부의 L씨가 말해주어서였다. 그때, 듣고도 잊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이동열 번역으로 <세계의 문학> 1977년 봄호(통권 3호)에 전재된 바 있다. 하므로 예하본은 국내 초역이 아니다. 나는 며칠 전에 헌책방에서 이 잡지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