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일
한길로로로 시리즈로 출간된 에버렛 헬름의 『차이코프스키』(한길사, 1998)는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차이코프스키 전기다. 그의 음악이 꽤나 대중적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전기가 희귀한 것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관한 전기가 흔한 것에 비추어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데다가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지 오래다.
우랄 지방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난 차이코프스키(1840~93)는 중령 출신의 사업가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귀족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당대의 러시아 귀족 교육은 서유럽의 교양과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차이코프스키 역시 다섯 살 때부터 아홉 살이 될 때까지 파니 뒤르바흐라는 젊은 프랑스 여성으로부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웠다. 그녀는 음악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을뿐더러, 음악이 어린 차이코프스키에게 주는 강력한 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훗날 차이코프스키의 명성에 항상 따라붙게 되는 잦은 우울증이나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이 모두 음악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판단과 달리, 차이코프스키의 우울증과 변덕은 그녀 자신이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아버지가 시골에서 모스크바로 이사하면서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녀와의 이별이 차이코프스키에게 첫 번째 신경성 위기를 안겨 주었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이때부터 그는 평생 동안 우울증 증세에 빠지게 됐는데, “잦은 우울증과 격렬한 울음, 심리적 고통은 바로 그가 좋아했던 파니와의 이별이 낳은 결과였다. 그는 그녀에게 히스테리적인 편지를 보내곤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우울증과 신경쇠약은 숱한 천재들이 조금씩 가지고 있는 기질로 볼 수도 있지만, 그의 성적 기호와 관련하여 또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의 지은이와 책 말미에 정리된 연보는 차이코프스키가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집단 저술가 모임인 드림 프로젝트가 출간한 『클래식의 미스터리: 명곡에 얽힌 치명적인 비밀』(웅진윙스, 2007)에서는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1987년, 옛 소련 출신의 음악학자 알렉산드라 오를로바는 이 미스터리에 대해서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법률학교 출신인 알렉산드르 보이토프라는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대담한 가설을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차이코프스키는 자살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는 만년에 어떤 귀족원 의원의 조카와 관계를 가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의원은 황제에게 고발장을 보냈다. 이때 사건을 담당한 사람은 귀족원 의장으로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법률학교 출신이었다. 의장은 이 사실이 모교의 명예가 걸린 중대한 사태로 판단하고 추문을 수습하기 위한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차이코프스키는 책임을 지고 자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클래식의 미스터리』와 세부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러시아 귀족 사회가 동성애 추문에 휩싸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차이코프스키에게 일종의 ‘명예 자살’을 권했다는 가설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를 읽어보면, 에버렛 헬름 역시 그런 소문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듯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개연성을 아예 묵살한다. 대신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 성향을 거론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만은 자인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자주 나타났던 신경통과 졸도 증상에 그의 동성애적 성향이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차이코프스키에 관한 최초의 전기를 쓴 남동생] 모데스트가 쓴 전기의 몇몇 부분과 차이코프스키의 일기장에 적힌 내용 중 오해의 여지가 적은 여러 부분에는 차이코프스키의 아주 심각했던 동성애 문제들이 암시되어 있다. 당시의 사회에서, 특히 그가 교제하고 있던 계층에서는 동성연애는 어떤 경우에도 숨겨야 할 수치로 여겨졌다.”
지은이는 둘 사이의 연관을 유보했지만, 거의 “정신질환 증세”라고까지 표현되는 차이코프스키의 우울증과 인간 혐오는 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없었던 동성애와 그로 인한 자기혐오가 빚은 산물이 아닐까? 차이코프스키는 서른일곱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는데, 지은이는 그의 만혼이 동성애를 위장하기 위한 술책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차이코프스키가 남겨 놓은 편지에 따르면, “결혼에 대해서라면 타고난 혐오감을 갖고 있는 서른일곱 살이나 된 제가 이제 사랑하지도 않는 한 여자와 갑자기 무리하게 결혼하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저는 현 상황이 요구하는 바로 그 사랑 없는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과 어긋나지 않게, 차이코프스키는 채 석 달을 넘기지 못하는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은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는 아내를 보지 않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은 <비창>이라는 표제로 더 유명하다. 이 교향곡은 차이코프스키가 아꼈던 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에게 헌정되었지만, 원래는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이 자신의 죽마고우 아푸흐친의 진혼곡으로 의뢰된 작품이다. 보비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블라디미르 다비도프는 여동생 사샤의 아들로, 지은이보다 앞섰던 차이코프스키 연구자 리하르크 슈타인은 “조카에게 보내는 그의 많은 편지는 마치 젊은 애인들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어투로 씌어져 있다”고 평하고 있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일기장을 출판한 블라디미르 라콘트는 조카에 대한 “그 애정이 정신적 사랑 이상이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기술한다. 이 조카는 차이코프스키 사후인 1906년 35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비창>은 차이코프스키가 죽기 9일 전에 작곡가가 직접 지휘·초연연한 작품으로, 초연 직후 모데스트가 그 제목을 지었지만, 이 교향곡이 심리적인 의미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자서전적’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은이는 이 작품에 대한 낭만적 해석을 거부하지만, 많은 평론가들은 차이코프스키가 이 작품을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예감하며 썼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앞서 나왔던 리하르크 슈타인은 아예 “<비창>이 차이코프스키의 죽고 싶은 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할 정도다. 차이코프스키 자신이 최고작이라고 여겼던 이 작품의 초연 때, 청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래서 차이코프스키의 자살이 <비창>의 초연 실패에 따른 우울증이라고 주장하는 이설도 간혹 볼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여섯 개의 공식 교향곡을 썼고, 4번과 5번 사이에 번외의 교향곡인 <만프레드>를 썼다. 교향곡 전집에는 숱한 명반이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눈물로 유리구슬을 닦는 것 같은 마리 얀손스/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Chandos) 전집이다. 거기에 비해 오랜 명반인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DG)는 너무 둔중하다. 또 내가 듣는 최고의 <만프레드>는 이고르 마르케비치/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IMG Artists)이지만, 조만간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Lpo Classics)반을 입수할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