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이상수의 『아큐를 위한 변명』(웅진지식하우스, 2009)을 읽다. - 노자나 장자의 글에서 엿볼 수 있는 중국인은 호방하다. 그런데 노신의 「아Q정전」에 나오는 아큐는 왜소하고 주관이 없다. 이 책의 지은이는 전자를 ‘대륙 기질’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아큐 기질’이라고 부르면서, 어떻게 해서 두 개의 이질적인 기질이 동시에 중국인의 품성이 되었는지를 탐색한다.
한 민족의 기질 혹은 품성을 정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융의 ‘집단 무의식’을 거론하기도 하고, 프랑스 아날학파의 ‘심성mentalites’을 동원하기도 한다: “한 겨레의 삶을 압도해온 자연환경이나 정치제도는 그 겨레의 ‘집단 무의식’이나 ‘심성’에 흔적과 주름을 남길 것이다. 우리는 이로 인해 어떤 겨레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과 행동 양식을 ‘기질’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중국인들의 개방성과 호방성은 워낙 큰 영토에 기인한다. 땅도 넓고 인구도 많기 때문에 개방적이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웠다. 특히 천하를 차지하려는 권력가들은 환대를 중시했는데, 현대 중국인들의 하오커(好客, 접대) 문화는 권력가들의 양사(養士, 선비 기르기) 풍조가 일반 백성들에게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워낙 큰 영토는 어떤 제왕이든 일단 중원을 차지하고 나면, 개방성(원심력)을 억누르고 폐쇄성(구심력)을 강화하게 했다.
선비를 기르기는 했으되, 권력가들이 선비를 귀중하게 여겼던 것은 아니다. 중국의 황제를 일컫는 ‘천자天子’는 하늘 아래 어떤 권력자와도 권력을 나눠 가지지 않는 존재다. 천자의 전제적 성격은 중국의 관료·사상가를 한없이 나약한 개인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인재 선발 제도인 과거는 관직을 인재들에게 개방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제도이지만, 그렇게 뽑힌 인재들은 전제통치의 손발 구실을 했을 뿐, 황제의 전횡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존재가 전혀 아니었다. 지은이는 바로 그런 뜻에서 노신의 또 다른 단편 「콩이지孔乙己」의 주인공을, 과거에 낙방한 ‘선비 아큐’로 본다.
중국의 전제통치가 중국의 지식인들을 1,300년 넘게 바보로 만들어 놓았듯이, 일반 백성들 또한 바보로 만들어 놓았다: “아큐라는 인간상은 전제통치가 남긴 그늘이자 상흔이다. 그것은 중국인의 ‘민족성’이 아니다. 루쉰이 「아Q정전」을 쓴 것은, 중국인의 이른바 ‘국민성’이나 ‘민족성’이 그렇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어떤 겨레에 고유한 ‘성격’이 있다는 생각은 관념적인 것이다. 만약 어떤 인간 집단에 공통의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사회구조의 산물일 뿐이다.”
『아큐를 위한 변명』이 재미있는 것은, 이상의 요약으로 끝나지 않고, 천자와 천하사상에 대한 중국인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원래 천하사상은 한족들이 패권을 다투었던 황하와 하남성 일대를 가리켰으나, 차츰 자신들의 활동 반경을 전체 세계로 착각하게 되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천자는 중국이 아닌 모든 것을 변방이자 오랑캐로 여겼고, 그들에게 위협을 당할 천자나 선비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정신 승리법’에 의지했다. 그 결과 중국은 번번이 비한족(원·청)에게 중원을 빼앗겼고, 근세에는 서구 열강의 먹잇감이 되었다: “절대 권력은 인민을 아큐로 만들며, 그 자신 또한 아큐로 만든다.”
천자나 일반 백성이나 아큐라는 점에서는 같았다는 이런 결론은, 현재의 중국공산당을 바라보는 지은이의 우려로 이어진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에서 지식인들이 공산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트의 배타적·독점적 동원 채널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현대 중국에서 공산당원이 되는 일은 과거 천자 치하에서 과거시험을 통과하는 일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폐문閉門 회의로 상징되는 중국공산당의 비밀주의와 인터넷까지 단속하는 언론과 사상 통제는, 오늘의 중국을 ‘황제 없는 제국 체제’로 만든다.
지은이는 이 책의 결론 격인 ‘나가는 말’에서 미국과 중국을 이렇게 비교한다: “역사가 말해주는 진리는, 숨통이 트여 있지 않은 용광로는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미국 사회와 중국 사회는 둘 다 다민족 사회로서 용광로와 같은 격변을 겪어왔으며, 지금도 겪고 있다. 두 나라의 차이는 숨구멍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미국의 제도가 완전하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미국의 사회와 제도 또한 많은 결함을 안고 있으며, 열린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고쳐야 할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미국이라는 용광로는 모순과 충돌, 이견과 항의가 터져 나올 수 있는 숨구멍을 여기저기 터놓고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결론만 보자면, 이 책은 또 하나의 ‘중국 때리기China Bashing' 서적이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지은이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중국 지식인관’이다. 중국 지식인들은 전통적으로 “문제 해결의 주체는 영원히 군주이고, 지식인은 기껏해야 ‘건의’하는 것 말고는 다른 할 일을 찾지 못”했다는 게 지은이의 중국 지식인관이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또는 수기와 과거시험 사이에 ‘열린 공간’을 만들어낼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이들의 위대한 스승 공자와 맹자가 설정해놓은 그릇된 이분법을 넘어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왕에게 깊이 공부하고 수양을 갖춘 인재들을 널리 중용해달라는 하소연과 상소上訴는 열심히 올렸지만, 정작 중원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 대안적 논리는 짜내지 못했다. 여기에 중국 지식인들의 빈곤한 상상력과 비극적 한계가 있다.”
노자와 장자는 물론이고 공자와 맹자에게서도 중국 지식인들의 ‘은자 기질’을 찾아볼 수 있다는 지은이는, 패자가 중원을 차지한 다음, 그 어떤 이견도 허용하지 않았던 중국의 전제주의가 중국 지식인의 은둔 기질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늘의 중국공산당과 중국 지식인을 이렇게 비판한다: “중원의 생명력은 패권에 있는 게 아니라 제자백가의 백가쟁명에 있었다. 제자백가 없는 중원은 상상할 수 없다. 그건 아무런 활력도 생명력도 없는 쓸쓸한 황무지 벌판일 따름이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중국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매우 미미하다. 13억이라는 방대한 인구의 나라에서, 개혁개방 이후 그 많은 격변이 전개되어왔고 또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음에도, 중국에서 소신 있는 지식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수기와 치인의 심연 사이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활매活埋의 길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