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염상섭의 『만세전』(문학과지성사, 2005, 한국문학전집09)을 읽다. - 이 책에는 1920년대에 염상섭이 발표한 초기 중편인 「만세전」·「해바라기」·「미해결」·「두 출발」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만세전」은 염상섭의 대표작으로, 이 선집을 책임 편집한 해설자는 “한국 근대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고평하고, 또 창비교양문고로 선보였던 『만세전』(창작과비평사, 1987)의 해설자는 “우리나라 중편소설의 교과서”라면서 우리나라 중편소설의 “초석을 놓은 작품”이라고 극찬한다.
2백자 원고지로 6백매 안팎에 불과한 「만세전」은 채만식의 장편 『태평천하』와 종종 비교된다. 지주 재산가 윤직원 영감이 땅바닥을 치면서 고함쳤던 “…이 태평천하에! 이 태평천하에…”라는 반어적 식민지 예찬이 『태평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었다면, 「만세전」을 유명하게 한 구절은 조선의 현실을 “무덤 속”이라고 여기는 이인화의 반복된 말버릇이다.
이것이 생활이라는 것인가? 모두 뒈져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라고 나는 지긋지긋한 듯이 입술을 악물어보았다.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될 때의 제목이 「묘지」였던 것은, ‘산소 문제[先山]’가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였던 때문도 있지만, 워낙 염상섭이 자신이 살고 있던 일제 강점기를 ‘무덤 속'으로 인식한 탓도 크다. 앞서 읽었던 염상섭의 단편 가운데는 그런 인식이 흔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주인공이 “시체 같은 몸을 고민하고 난 병인처럼, 사지를 축 늘어뜨려 놓고 가만히 누워 생각하였다”고 말할 때, 「암야」의 주인공 X가 경성의 밤거리를 보며 “육조대로六曹大路의 긴 무덤”이라고 말할 때, 「제야」의 여주인공이 혼전 임신을 하고 “그대로 절명하였으면 얼마나 행복일지 모르겠습니다”고 말할 때, 그리고 「E선생」이 학교에서 파면되고 나서 집에 돌아와 눕는 마지막 장면이나, 「숙박기」의 주인공 창길이 유학생 친구들과 하숙집을 구할 걱정을 잊고자 함께 낮잠을 잘 때, 그 모든 것은 무덤과 같은 절망의 색조를 띤다. 그리고 이런 비관적인 세계 인식이 해방과 함께 쉽게 가시지 않았다는 증거는, 「절곡」의 영탁 영감이 단식을 하고 “힘이 부쳐서 헐레벌떡 방에 들어가 누워”(386쪽)버리는 대목에서 재현된다.
「만세전」은 일본의 W대학에서 유학 중인 문학청년 이인화를 주인공으로, 아내가 병환으로 죽게 되었다는 전보를 받은 그가 배와 기차 편으로 귀국하는 ‘여로형 소설’이다. 그가 도일했던 열다섯 시절은 국치 전후(1910)고, 그가 전보를 받고 귀국을 하는 대는 제목처럼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이런 시간적 설정에는 국치에서 3·1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급격한 사회 변동을 이방인화(일본인화)된 이인화의 눈으로 드러내 보이는 한편, 답보된 애국계몽기(1905~1910)의 암울한 상황을 동시에 포착해 보려는 작가의 야심이 없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까지 오는 여객선과 부산에서 경성까지 오는 기차 속에서 이인화는 비로소 자신이 일본의 피식민 백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여로 형식은, 주인공의 자성(정체성 획득)과 동궤를 그린다. 소설은 동경에 두고 온 일본인 카페 여급 시즈코의 구애를 물리치고, 다음과 같은 답신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스로의 길을 찾아내고 개척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의무가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처는 기어코 모진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죽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남편 되는 나에게, ‘너 스스로를 구하여라! 너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라!’는 귀엽고 중한 교훈을 주고 가기 때문이올시다.
이러한 변화는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는 아니다. 자기가 망국 민족의 일 분자라는 사실은 자기도 간혹은 명료히 의식하는 바요, 따라서 고통을 감하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때껏 망국 민족의 일 분자가 된 지 벌써 7년 동안이나 되는 오늘날까지는, 사실 무관심으로 지냈”다는 이인화의 평소 신념에 비추어 매우 큰 변화다.
집요하게 묘사된 일제 경찰의 감시와 제도적 억압(‘사벨’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소학교 선생), 그리고 구체적으로 묘사된 경제적 수탈과 문화적 차별은 이 작품을 3·1 운동 직전 상황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로 읽히게 한다. 특히 이인화가 여객선 목욕탕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일본인 ‘조선 쿠리 모집원’의 활약상은 일제에 의한 조선 침탈이 이미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하지만 이인화가 “원래 나에게는 사회주의라는 ‘사’자나 레닌의 ‘레'자”도 없다고 고백한 것처럼, 염상섭은 대부분의 당대 지식인들이 일제 투쟁의 무기로 선택했던 사회주의/무산자운동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 이론으로서나 서적으로는 소위 무산 계급이라는 것처럼, 우리 친구가 되고 우리 편이 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에 그들과 마주 딱 대하면 어쩐지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혹은 그들에 대한 혐오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논법으로, 더욱더욱 그들을 위하여 일을 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지는 모르나, 감정상으로 그들과 융합할 길이 없다는 것은 아마 엄연한 사실일 것 같다.
우려 삼아 말하자면,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염상섭의 이런 태도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 직후 “세태묘사로 시종”하게 하고, 또 한국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거치면서 “중립지대에서조차 물러나 다분히 우익적으로 일탈하거나 이념을 아예 배척”하게 만든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해방 직후 좌우익의 이념적 갈등과 대립 속에서 우익 ‘문협 정통파’나 남로당 계열의 ‘문학가동맹’과 거리를 둔 ‘중간파 작가’로 활동했다.
중간파 작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 노선에 큰 기대를 가지면서 남북한의 분단을 막아보려고 노력했지만, 갈수록 노골화되는 냉전체제 하에서 아무런 생산적 결과”를 낳지 못했고, 48년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 이후에는 “잔존한 ‘문학가동맹’과 그 외의 중간파 문인들은 아예 설자리가 없어져 결국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이상 민족문학사연구소 엮음, 『새민족문학사강좌02』, 창비, 2009, 265~286).
「만세전」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 중편 선집에 실린 작품 가운데 「미해결」은 ‘돈과 섹스’의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염상섭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한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만큼 다성적이다. 또 김유정의 「떡」을 떠올려주는 「두 출발」은 낱낱의 인물 묘사와 굵직한 주제들을 용광로처럼 한데 녹인 압축미가 압권이다. 「해바라기」는 나혜석의 저 유명한 ‘신혼여행 에피소드’를 고스란히 빌려 쓴 ‘모델소설’로, 나혜석과 함께 『폐허』 동인을 함께하기도 했던 염상섭의 이력을 생각하면 흥미가 배가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염상섭은 “사랑을 받아주는 유쾌한 의무를 다한 보수로 밥”을 구하는 존재로 신여성을 정형화하는데, 이런 정형화는 신여성의 경제적 토대가 허약했다는 것과 함께, 신여성 문제가 ‘헤픈 정조’의 문제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여권에 대한 자각은 생겨났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경제적 토대가 없는 상태에서, 허울 좋은 신여성은 모두 첩이 되었다. 신여성 문제를 다룬 「제야」나 「해바라기」의 주인공들은 첩들이 분명 아니지만, 그 시대의 ‘잉여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족1: 「해바라기」에는 일본 신여성들의 사교 모임인 ‘청도파’가 잠시 언급되고 있는데, 윤범모의 『첫사랑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다』(다흘미디어, 2007) 98~99쪽은, 그것이 일본 여성운동 단체이면서 문예지였던 『세이토靑?』였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청탑은 ‘블루 스타킹blue stocking'의 번역어로, 원래는 18세기 영국 런던에 있었던 선진적인 여성들의 살롱 이름이다.
사족2: 창작과비평사판 「만세전」과 문학과지성사판 「만세전」은 각기 1948년에 재판된 수선사본과 1924년에 초판된 고려공사본을 원본으로 삼았기에, 문장과 내용의 첨삭이 적지 않다. 일제의 검열이 살아 있었던 초판이 시대 상황을 많이 누락한 탓에, 오히려 우리들 시각에는 좀 더 현대적으로 보인다. 첫 문단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