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창작과비평사, 1991, 창비교양문고17)를 읽다. - 28세 때 문과에 급제했던 정약용(1762~1836)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의 요로를 두루 거쳤다. 그러나 둘째형 정약전과 셋째형 정약종이 나라에서 금한 천주학을 했던 죄로 각기 유배형과 참수형을 받게 되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그 자신도 강진으로 유배된다. 이 책은 다산 연구가 박석무가, 40세부터 57세까지 무려 17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이 그의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엮은 서간집이다.
수십 년 만에 이 서간집을 다시 읽는 이 기회에, 나는 다산의 ‘폐족廢族 의식’에 집중했다. 조선의 사대부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 이중적인 삶의 목표가 있었다. 경학을 통해 수양을 닦고(수기), 배움으로써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다(치인). 이때, 과거科擧는 수기를 마친 사람에게 치인의 자격을 부여하는 선별 형식이다. 덧붙이자면, 관직 생활(치인) 말고 경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은 후학을 가르치는 일이다. 과거에 실패하거나,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는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길렀다.
말한 것처럼 정약용은 40세에 국사범이 되어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유배길에 오른다. 거기서 그는 폐족이 되어버린 자신의 가문을 생각하면서, 두 아들의 장래를 노심초사한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하여 본래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 되지 않겠느냐? 폐족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미리 밝히지 않았지만, 조선 시대엔 국사범이나 그 자식들에게 과거를 허용하지 않았다. 하므로 사대부 집안에서 과거 시험을 못 보게 되면, 저절로 폐족이 될 수밖에 없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아버지 다산은 애끓는 마음으로 면학을 채근하지만, 두 아들은 애끓는 아버지의 뜻을 다 충족시키지 못했다. 물론 두 아들은 한다고 했으나, 워낙 뛰어난 아버지의 눈에 차지 못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폐족이라지 않은가? 과거를 보지 못하고,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데, 무슨 수기를 한다는 말인가? 다산이 두 아들을 걱정하며 질타하는 편지를 보면, 두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사귀었던 사대부 집안의 친구나, 대대로 관직에 나갔던 친가와 외가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신세한탄을 하고 술을 얻어 마시는 잡객雜客이 되어 갔던 모양이다.
그런 두 아들을 염려하는 부정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산은 벼슬에 나갈 길이 끊긴 두 아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독서와 저술하기를 설득한다. ⅰ) 나는 스무 살 무렵부터 과거 공부를 하고, 그 후로 규장각에서 10년간 글귀만을 다듬다 보니 관에서 쓰는 관곽체館閣體가 박혀, 좋은 문장을 쓸 수 없게 됐다. 그런데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과거공부로 인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 가문이 망해 버린 것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처지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비록 벼슬길은 막혔다 하더라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ⅱ) 너희들이 공부를 하여 내 책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사헌부司憲府의 계문啓文과 옥안獄案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사람 취급을 받겠느냐?”,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은 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다.” ⅲ) “평민으로 배우지 않으면 못난 사람이 되고 말지만 폐족으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 도리에 어긋지고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러면 벼슬길에 못 나가는 게 아니라, 아예 집안이 영영 끝장난다.
굳이 설명을 달자면, ⅰ)은 벼슬길이 막혀도 성인의 길은 열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두 아들에게 공부의 또 다른 목표를 제시하고 있고, ⅱ)는 두 아들이 학문을 지속한다면 후세에 이르러 아버지의 명예가 구명될 것이고, 그러지 못하면 더러운 이름만 남게 될 것이라는 애소 띈 회유다. 또 ⅲ)은 두 아들이 천덕꾸러기가 될까 봐 걱정하는 부모의 걱정과 함께, 가문의 중흥 방안은 독서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풋나물을 먹더라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폐족이라 하더라도 안목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거고 이렇게 한두 해의 세월이 흐르다 보면 반드시 중흥中興의 여망이 비치게 될 것”이라는 게 다산의 생각이었다.
다산의 두 아들인 학연과 학유는 유배지에 있는 아버지가 매번 “이제라도 용맹스럽게 뜻을 세워 분연히 향학열을 돋운다면 서른이 넘기 전에 응당 대학자로서의 이름을 얻을 것이다”라고 쓴 편지를 받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제 강점기의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정인보는 다산을 가리켜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는 칭송을 바쳤다. 실제로는 8백만 자를 쓴 명말 청초의 철학자요 역사가인 왕부지가 5백만 자를 쓴 다산을 압도하지만, 다산의 모든 저작은 유배지라는 열악한 환경과 마음의 괴로움 속에서 쓴 것이다. 그런데 그 초인적인 노력이 한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실학을 설명할 때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아울러 다산학茶山學이라고 불리는 다산 연구가 정약용의 폐족 의식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지만, 두 아들에게 독서 이외의 다른 살길을 찾아보라고 길을 터주지 못한 것도 실학을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하도록 만든다.
실학은 다산의 저 엄청난 한문 저작이 웅변하고 오로지 경학을 통해서만 수기치인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이 보여주듯이, 조선조 질서 속에 한계 지워진 것이었다. 다만, 다산의 빼어난 시들을 보면, 탐관오리에 대한 서슬과 학정을 당하는 백성에 대한 긍휼이, 다산의 그런 민중성이 “무릇 저서하는 법은 경전經傳에 대한 저서를 제일 우선”해야 한다는 제1원칙과 서로 배치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다산의 위대한 수기치인이다.
사족.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으며, 내가 다시 읽은 다산 시선은 저 오래된 창작과비평사판 『다산시선』(1990)이 아니라, 최지녀가 편역한 『다산의 풍경』(돌베개, 2008)이다. 이 판본에서 다산의 절창 가운데 하나였던 「애절양哀切陽」은, 「스스로 거세한 남자를 슬퍼함」이란 우리말로 깔끔히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