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
조지 마이어슨의 『생태학과 포스트모더니티의 종말』(이제이북스, 2003, ICON BOOKS 12)을 읽다. - 이 책을 쓴 조지 마이어슨은 ICON BOOKS의 하나로 출간된 『도너 해러웨이의 유전자 변형 식품』을 쓰기도 한 사람이다. 지은이는 꽤나 논쟁적인 이 책에서 생태학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을 전복하고자 한다. 보통 생태학은 “근대성의 종말, 곧 근대적 확신의 최종적인 붕괴, 착취당하는 자연과 착취하는 사회 사이에서 이루어진 거래의 청산”을 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지은이에게는 그런 믿음이 터무니없는 것이다. 생태학은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나 대안처럼 선전되고 있지만, 그것은 “근대주의의 새로운 물결”이며 “급진적 근대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생태학이 탈근대 이념이라면, 모든 근대적 이성이 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한계에 도달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포스트모던 개념과 생태학은 서로 동일한 입장에 서 있지 않을까? 『생태학과 포스트모더니티의 종말』은 바로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씌어졌는데, 성급하게 지은이의 대답부터 꺼내 놓으면 이렇다: “이 책은 생태학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유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이때 ‘만남’이라는 말은 양쪽이 함께 근대성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가정을 환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생태학이 전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생태학적 비전은 많은 불길한 소식을 담고 있지만, ‘근대화’의 계기에 속한다. 즉, 미래를 향한 또 하나의 근대적인 도약이다. 생태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많은 전제들을 깨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근대성의 토대를 구축한다. 2000년도의 생태학은 근대성이 아니라, 근대성의 그림자인 포스트모더니티의 종말을 선언했다.”
2000년 1월 1일, 세계의 대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밀레니엄 버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에너지 위기(유가 폭등), 환경 위기, 구제역과 광우병 같은 일상적 재앙은, 유사 이래 모든 ‘거대 서사’의 주인공이었던 인간을 외곽으로 밀어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을 마지막으로, ‘인간 영웅’이라는 전통적인 거대 서사는 과학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거론했던 에너지 위기(유가 폭등), 환경 위기, 구제역과 광우병을 퇴치할 수 있는 것은 ‘기술-이성Techno-reason'뿐이다. 이런 시대에, 생태학은 근대 문화의 과보果報를 알리는 예언자 노릇을 한다.
서구의 근대는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학”의 움직임과 “그것과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합작품이다. 특히 근대의 거대 서사는 모두 그 둘의 조합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1989년 이후 민주주의의 발전은 프랜시스 후쿠야마식의 ‘역사의 종언’으로 망각되었고, 과학만이 오롯이 근대 세계를 떠맡게 되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거대 서사가 더 이상 필요 없거나 씌어지지 않는 곳에서, 과학만이 진보적인 거대 서사를 도맡게 된 것이다. 이때 생태학은 에너지 위기(유가 폭등), 환경 위기, 구제역과 광우병 같은 일상적 위험을 부각시키면서, 새로운 거대 서사임을 자임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태학은 거대 서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개념과 결별한다: “2000년 10월에[그해에 있었던 영국의 홍수를 가리킴] 여러분은 실제로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생태학의 이러한 거대 서사를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티는 ‘거대 서사’가 더 이상 근대적인 세계관을 통합하고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점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이 통합하는 힘, 즉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과학의 진보에 대한 서사를 보게 된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거대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다고 예견했지만, 이를테면, 지구 온난화에 대한 전 지구인의 우려는 “새로운 방식으로 근대의 통합된 서사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 리오타르나 그 추종자들은 거대 서사를 항상 나쁜 이야기로 가정했지만, 지구 온난화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적/생태학적 담론은 거대 서사에 리오타르가 깨달았던 것보다 훨씬 좋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근대적 질서의 어두운 재정당화이다. 비록 기술적이고 산업화한 사회가 그것들을 초래했을지라도, 그 놀라운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것 역시 과학일 뿐이다. 과학은 설명과 어떤 가능한 치유책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정당한 정치적 대응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판단 기준이기도 하다.”
기술-이성 시대에 과학은 정부가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재)정당화하는 서사”이다. 하지만, 2000년 10월 영국에서 벌어진 광우병 사태에 대해 정부가 “광우병은 종들 간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다고(즉 사람에게는 감염되지 않는다) 거짓말했듯이, 정치권력은 과학을 억압하거나 방해한다: “요컨대, 과학을 방해했던 사람들은 이제 반민주적인 세력으로 나타난다. 구제역 기사가 나오면서, 교훈이 함께 나타난다. 과학과 민주주의는 동맹을 맺은 관계이다. 이들은 함께 근대화를 구성하며, 이제 근대화는 완취된 사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끝없는 과정으로 출현한다.”
지은이는 공통의 규칙 없는 오늘의 세기를 거대 서사로 통합하는 게 생태학이라고 주장하면서, 생태학은 저탄소 성장과 환경 분담금 같은 의제를 통해 새로운 근대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극단적인 분석을 끌어내고,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파괴하는 생태학을 ‘생태병리학’이라고 명명한다: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생활의 도처에서 작은 정신병리학적 징후들을 발견하였다. 생태병리학은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태학적 징후들을 본다. (…) 생태학적 해석은 극단적으로, 가장 사소한 일에 엄밀하고도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 결과는 우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 있다. 생태학적 논의의 주요 취지는 우리가 더욱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이는 일상적인 합리성을 넘어서는 경우이다.”
이 시대엔 기상학자가 “포괄적이며 정치적으로 급박한 새로운 진보를 대변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냉소하는 지은이는 생태학을 대안적 근대주의의 급진적 형태라고 규정하면서 “급진적 근대주의를 받아들이기란 지극히 힘들다”고 말한다. “삶의 모든 사소한 일들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상으로, 쉼 없이 그 의미를 읽어 내”려고 하는 생태학은, 근대의 심층적 기획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과학의 안내를 받은 근대성에 물들어 있는 시민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진보의 서사에 힘을 쏟고 있다. 걱정과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여전히 근대화가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생태학이 진짜 심층적 근대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기술 이성에 매몰된 이의 제기인지, 또 생태에 대한 우려가 정신병리학적 징후며 과학과 민주주의의 동맹관계를 위협하는지는 의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지은이는 질겁하겠지만, 생태학은 불완전한 기술 이성에 대한 검증이나 보완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근본주의적이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