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5일
염상섭의 『두 파산』(솔, 1996)을 읽다. - 이 단편집은 앞서 읽었던 문학과지성사판 『두 파산』과 제목이 같고, 책임 편집자도 같다. 하지만 이 선집에는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같은 대표작이 빠진 대신, 7편의 또 다른 단편이 실렸다.
「남충서」·「질투와 밥」·「굴레」는 일부일처라는 근대적인 결혼 제도가 확립되었지만, 일상에서 공공연히 행해진 축첩을 이야기의 뼈대를 삼고 있다. 우리 시대의 감각으로는 잘 납득이 안 되지만, 축첩은 일시적이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바람’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족 제도다. 본처와 정부가 큰댁·작은댁(소실小室)을 이루어 별개로 살거나 아예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기도 하는 축첩 제도는, 서얼을 정식으로 호적에 올리고 유산 배분도 받는다.
축첩이 용납된 이유는 본처가 남아를 낳지 못할 때 남편이 행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로 행해지기도 했지만, 축첩이란 기본적으로 남성의 경제력으로 여성을 사는 행위다. 축첩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거나 책을 찾아본 적은 없지만, 바로 이게 축첩이 사회적으로 용인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과부나 과년過年한 여성이 마땅하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부유층 남성이 아무런 생계를 갖지 못하는 여자를 ‘사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구빈 장치였다.
열거된 세 작품을 읽어보면, 소실을 거느린 남자가 가족이나 사회적 지탄을 의식하는 법이란 없다. 축첩한 남자가 가족과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것은, 소실에게 빠져 본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을 때다. 소년을 사랑하는 그리스의 성인 남성이 욕정에 빠져 자기배려에 실패했을 때 비난받았듯이, 축첩의 시대에도 그런 윤리가 있었던 것이다. 「질투와 밥」의 S는 그것을 못해서 주위의 비웃음을 당하며, 「굴레」의 주인공인 영감도 조강지처를 버리고자 하기 때문에 죄의식을 면치 못한다.
일본인 소실이 나오는 「남충서」는 축첩이라는 기본 줄거리 위에, 일본인 어머니를 둔 남충서의 정체성 고민이 가미된 작품이다. 이와 비슷한 작품이 문학과지성사판 『두 파산』에 실려 있었던 「해방의 아들」이었거니와, 그 작품에서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던 준식(하야시)은 일본인 행세를 하다가 해방과 함께 정체성 혼란에 빠진다. 준식은 하야시라는 일본 이름을 버리고 본래의 이름인 준식을 되찾지만,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소실에게서 태어난 남충서는 좀 더 복잡하다. 남충서南忠緖의 ‘서’는 어머니 미좌서美佐緖가 자신의 이름 끝 자를 넣어 달라고 간청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남충서의 아버지는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과 함께, 충서 대代의 행렬인 희熙자를 아예 버리고, 미좌서에게서 난 형제에게는 충忠자 행렬을 넣었다. 그러면 꼭 일본인 이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남충서에게는 미나미 다다오(남충서)뿐 아니라, 학교에서 쓰는 시야충서(矢野忠緖, 야노 다다오)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이런 복잡한 명명은 그 자신이 불법적인 민족주의 단체인 P·P단의 일원이면서, 동지들의 농담거리가 된다.
언젠가 P·P단의 동지의 한 사람이 별안간 “여보게 ‘야노’군…‘미나미’군…남군!” 하며 혀가 돌을 새도 없이 연거푸 불러놓고 나서
“…온 자네 같은 ‘부르주아-지’는 성姓도 많으니까 한참 부르고 나면 숨이 차이그려” 하며 여러 사람을 웃긴 일이 있었다. 여러 사람은 웃었으나 충서는 쓰린 웃음을 제면을 못 이겨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묘한 운명이라고 자조하는 남충서는 어머니나 아버지, 동지들 모두 돌아갈 고향이 있는 행복한 사람이지만 자신에게는 그게 없다고 말한다.
(…) 동지들도 똑같이 비참한 운명과 예기할 수 없는 공포에 헤매이면서도 ‘야노 다다오’라고 불렀다가 ‘미나미 다다오’라고 했다가 남충서가 되었다가 하지 않으니만큼은 하여간 행복이다. 그들에게는 고향과 혈육에 대한 애착이 있다. 가정의 평화가 있다. 민족에 대한 감격이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게 없다. ‘야노’면 ‘야노’ 남가면 남가 - 어디로든지 치우쳤더라면 조그만 비극을 일평생 짊어지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아버지와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라고 간청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남충서는 조선 여성을 선택하게 된다. 그의 이 선택은 “대관절 사람이 민족을 떠나서 살 날이 있을까?”라는 번민 속에서, 조선인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았다. 이 결정은 어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일본인 정체성을 선택한 여동생과의 그 사이에 커다란 심리적 단절을 만들었다.
「이합」은 해방 이후의 혼란상이 남성 가부장에 균열을 내는 이야기다. 해방이 되자 만주에서 귀국하던 주인공 장한은 남쪽으로 내려오다 말고, 아내의 고향인 북쪽의 S시에 눌러앉는다. 처고모부의 알선으로 장한은 교원이 되었는데, 아내는 부인회의 부위원장이 되어 매일 외출을 일삼는다. 장한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내를 단속하기 위해 부부싸움을 벌이고, 아내는 집에서 가출한다. 그러자 학교에서는 장한의 사상을 의심하게 되고,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장한은 아들만 데리고 서울로 떠난다.
「재회」는 그 후편으로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아내가 딸을 데리고 서울로 장한을 찾아와 합치는 이야기다. 염상섭은 이 두 작품에서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편들기보다 “얼마쯤 연구라도 하구, 얼마쯤이라두 자기의 사상적 체계”(「이합」)를 세워본 일 없는 해방공간의 이념 과잉과 기회주의를 비판한다. 염상섭은 두 작품에서, 해방 공간에서 벌어졌던 극심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남자의 가장권과 여성 해방이라는 구도로 살짝 희화화해 놓고서, 장한네의 가정적 파탄이나 삼팔선으로 동강난 남북문제는 모두 “자유, 평등, 남녀 동등 동권 - 이런 것이 정치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와야만 진정한 해방이겠지마는 구호口號의 사태가 - 밑바닥엔 아무것두 없이, 기초공사가 굳기도 전에, 구호의 사태가 급자기 쓸려”(「재회」)와서 생긴 촌극이다.
1936년에 발표된 「실직失職」은 제목 그대로 일제하의 실직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상의 「날개」를 자연주의식으로 번안한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임종」 역시 사실주의 작가인 염상섭의 자연주의적 필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문학과지성사판 『두 파산』에 실려 있는 「절곡」을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