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일
조지 마이어슨의 『도너 해러웨이의 유전자 변형 식품』(이제이북스, 2003, ICON BOOKS 16)을 읽다. - 도너 해러웨이를 모른다고 주눅들 필요 없다. 이 책을 펼치면 지은이가 아주 친절하게 “도너 해러웨이는 이 시대 페미니즘 사상의 주도적 인물이자 주요한 과학·문화 이론가이다. 그녀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운동가이자 거대 자본과 권력의 환경 파괴를 포함한 모든 착취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동지이다”고 가르쳐준다.
『도너 해러웨이의 유전자 변형 식품』은 도너 해러웨이가 1997년에 쓴 『중도적_증인@2천년기.여성인간ⓒ_온코마우스TM와 만나다』에 대한 소략적인 소개이자, 제목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유전자 변형 식품’을 옹호하는 해러웨이의 논리를 중점으로 살피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사실로, 지은이가 소개하고 있는 해러웨이의 책은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페미니즘과 기술과학』(갈무리, 2007)이라는 긴 제목을 달고 번역되어 있다. 게다가 사이보그 이론가로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자연의 재발명』(동문선, 2002)도 일찌감치 나와 있는 터라, 마이어슨의 책을 통해 해러웨이의 논리에 접근하는 옹색함은 피하기 어렵다.
해러웨이의 저작을 미처 읽지는 못했지만, 이런저런 칼럼을 통해, ‘페미니스트이면서 유전자 변형 식품을 열렬히 찬성하는 꼴통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지는 어언 십여 년이 넘는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의문으로, 왜 나는(우리는), 페미니스트는 유전자 식품을 찬성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을까? 2008년 촛불시위 때, 유모차를 거느리고 나온 젊은 어머니들이 ‘우리 아이에게는 광우병 쇠고기를 먹일 수 없어요’라고 호소했던 것처럼, 여성은 가족의 먹을거리 안전에 더 유의하기 때문에? 나아가 여성 운동은 근대화나 개발을 반대하는 생태친화적인 운동 원리를 신봉한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차츰 살펴보겠지만, 생물학자인 해러웨이가 온갖 종류의 ‘유전자 변형’ 공학에 찬성하는 것은, 자신의 여성주의와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우선 유전자 변형에 대한 찬반은 순수와 혼혈에 대한 호오에서 비롯되는데, 해러웨이가 보기에 개별 동식물의 순수 유전자에 집착하는 것은 “인종적 순수성에 사로잡힌” 서구의 악령에 불과하다: “혈통 오염에 대한 불안은 유럽 문화에서 인종주의 담론이 시작될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녀의 사이보그 철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해러웨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2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온 ‘범주’에 의문을 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에서는 항상 범주를 구분하고 범주를 유지했어야 했지만, 새 천년기는 초범주transgenic의 시대다. 이런 생각은 해러웨이로 하여금 인간과 기계의 범주가 고정적이고 안정적이지 않다는 사이보그 철학을 만들게 했고, 자연/문화·여성/남성과 같은 범주들을 고정적이며 경계가 분명한 실체들로 취급하는 세기와 절연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해러웨이는 주디스 버틀러같이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범주를 인정하지 않는 여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잡종이고, 순수한 것은 없으며, 고정된 범주로서의 인간도 없다. 하므로 더 많은 생산량과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산누에나방의 유전자를 이식받은 감자나 가자미 유전자를 이식받은 토마토도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잡종이 더 우수하고, 순수에 대한 고집은 러다이트Luddite나 같으며, 인간의 범주마저 위협받는 시대에, 순종이나 자연의 범주를 고집하는 것은 한 시대의 규정력인 크로노토프chronotope를 거스르는 일이다.
『중도적_증인@2천년기.여성인간ⓒ_온코마우스TM와 만나다』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해러웨이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유보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이어슨의 약점을 지적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 책은 유전자 변형 식품(공학)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쟁점과 비판을 피해 간다. 먼저 유전자 변형은 인위적이라는 점에서 진화의 역사에서 벌어진 돌연변이나 잡종과는 다르다. 자연 상태의 돌연변이나 잡종은 유전자끼리의 상호적 동의의 산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잡종은 자연을 위해하거나 개체의 면역력을 떨어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인위적인 유전자 변형이 가져올 새로운 질병(바이러스·알레르기)의 위험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핵무기보다 위험한 것으로 논의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거대 독점 기업이 생물학을 기업화함으로써 농업의 기초를 초토화하고 있는 사실을 짚지 않았다. 일례로 몬산토와 같은 다국적 종자개발회사가 만든 어떤 씨앗은 재파종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농부는 파종에 필요한 씨앗을 매해 새로 사야 한다. 또 이 책은 유전자 공학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도 외면했다. 예컨대 인간이 더 많은 닭다리를 즐길 수 있도록, 지네의 유전자를 통해 두 개 이상의 다리를 가진 닭을 만든다면, 그건 닭이 원한 바일까? 그러느니 차라리 식물의 광합성 유전자를 이식해서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오늘의 생명 공학은 새로운 우생학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마이어슨은 그런 우려 자체를 희화화하면서, 새로운 세기의 생명 공학은 열등인자들을 몰아내려는 옛 꿈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잡종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한다(실은 이게 해러웨이의 주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전자 공학의 이점이나 권리는 상류층이 먼저 그리고 배타적으로 누리게 될 공산이 크며, 공공정책을 유전자의 문제로 축소하면서 환경이나 제도의 개선은 등한시하게 될 것이다. 이게 우생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21세기 문명은 생명기술문명이 지배하는 생물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생태학적 방법과 유전공학적 방법은 우리가 생물학의 시대를 사는 두 가지 접근법이다. 생태학적 방법은 자연이 재생산하는 만큼의 속도로만 소비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경제적 필요와 욕망들은 마땅히 생태적 현실이라는 맥락 속에 제약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반면 유전공학적인 접근 방식은 자연이 재생산하는 과정에 맞추어 사는 것이 너무 느리다는 생각 하에, 유전공학이라는 생산성에 다시 한 번 산업 혁명과 같은 무한 성장을 고대하는 것이다.
사족이다. 유전자 변형(생명 공학)이나 유전자 변형 식품에 대해서는 읽을 만한 책이 꽤 나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가운데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녹색평론선집2』(2008)에 실린 제러미 리프킨의 「유전공학의 위험성」과 『녹색평론선집3』에 실린 미라 퐁의 「유전자 침범과 환경윤리」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간명하면서도 문제 제기적인 글이다. 이 독후감의 마지막 네 문단은 두 글에 의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