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
조지 J. 마레트의 『하워드 휴즈』(달과소, 2005)를 읽다. - 원제는 『HOWARD HUGHES: AVIATOR』. 번역서에서는 ‘비행사’가 빠졌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하워드 휴즈(1905~76)를 알고 있을 우리나라 독자는 얼마 없다. 한국인이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비행사는 라이트 형제·찰스 린드버그·닐 암스트롱으로, ‘이 가운데 비행사가 아닌 사람은?’이라는 사지선다에 휴즈가 있다면 모두들 휴즈를 꼽을 것이다(답은 닐 암스트롱 아닌가? 네 명 가운데 그만이 우주비행사니까 말이다).
휴즈는 석유 굴착용 드릴 같은 전문 공구를 만드는 사업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약관 열아홉에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자,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경영 수업을 따로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휴즈공구회사를 모체로 군용 레이더와 항공기를 제작하는 휴즈항공사와 세계 최대의 항공사인 TWA, 그리고 젊은 영화 팬들은 이름이 낯설 RKO영화사 등을 창업하거나 소유했다.
그가 살아 있었던 1975년, 휴즈는 석유왕 J. 폴 게티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부자들과 달리 보석이나 그림, 휴양지의 호화주택을 사들이는 것과 판이한 삶을 살았다. 열네 살 때 처음 비행기를 타고, 스무 살 때 자가용 조종사 자격증을 땄으며, 자기 소유의 비행기를 처음 샀던 스물두 살 이래로, 오로지 그의 꿈은 비행으로만 채워졌다. 하므로 자가용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던 1927년, 그가 각본·제작·감독을 했던 <지옥의 천사들>이 오토바이 폭주족에 관한 게 아니라, 두 명의 조종사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은 너무 당연하다.
원래는 최고의 아마추어 골퍼가 되고자 했던 그가 곡예비행을 하며 골프장 위를 날아가는 복엽기를 보고 세계 최고의 비행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그 시절은, 항공 기술과 항공 산업이 막 태동하던 시절이었다. 예컨대 린드버그가 ‘세인트루이스의 혼Spirit of St. Louis’이라는 비행기를 몰고 단독으로 무착륙 대서양횡단에 성공했던 때는, 휴즈가 조종사 자격증을 따기 고작 6개월 전이었다. 린드버그의 저 어마어마한 성공은 시기심 많은 휴즈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린드버그의 대서양횡단 비행에 대한 아주 세세한 정보를 모으고 연구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생긴 결론은 “독창적인 비행을 기획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재정적인 지원만 확보된다면 비행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는 거였다.
린드버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세인트루이스 사업가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야 했으나, 휴즈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새로 나온 비행기에 관한 한 세계 유일의 ‘얼리 어댑터early adopter’였다. 그는 조종을 하고픈 모든 기종을 직접 사거나, 항공기 제작사의 협조를 얻어 개발 중인 신형기를 시운전 할 수 있었다. 휴즈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테스트 조종사’ 임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조종사 자격증의 등급을 계속해서 갱신했던 그만의 노력도 있지만, 상업용도 아닌 자가용 비행기들을 미국 전역의 비행장에 방치할 수 있는 재력 덕분이었다(그가 조종하거나 구입한 비행기들은 ‘티코’ 같은 경비행기가 아니다).
1936~39년 사이, 휴즈는 수많은 신기록을 보유하는 것과 함께 조종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상을 모두 받았다(이 상들의 이름이 우리에겐 불필요할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그에게 내려진 영예는 단순히 특정 기록을 경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좋은 성능을 가진 비행기를 요구함으로써 항공기 발전”을 촉진시킨 대가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진짜 우수한 조종사였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비화도 꽤 많다. 그는 최소한 네 번의 대형 추락사고를 냈으며, 한 번은 두 사람의 동료 조종사를 죽게 했고 그 자신도 평생 마약에 의지해야 할 만큼 부상을 당했다. 또 스피드광狂이었던 그는 자동차 사고도 자주 냈는데, 최악의 사고는 보행자를 치어 즉사시킨 거였다.
자연의 제약에 맞서는 고독한 독불장군,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 그리고 백만장자. 휴즈는 미국식 영웅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웅의 일반적 상과는 달리, 자신이 가진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남과 나누는 일에는 안절부절못했던 사람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TWA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60년, 록히드사가 개발한 제트스타JetStar를 테스트한 이후 휴즈는 비행기 조종 자체를 그만두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기인’이었던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언론의 추적과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언제나 의심과 불신이라는 방호벽 속에 비밀주의를 고수하며 살았고,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살균해야만 안심하는 결벽환자였다. 만년에는 세균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고안한 독방에서 살았던 그에게는 가족도 없었다. 남의 눈길을 끄는 화려한 존재가 되어 갈수록 고립되고 싶다는 열망도 커졌던 그에게, 비행기와 비행만이 완전한 평온함을 선사하는 영역이었다.
굴지의 영화사를 운영했던 휴즈는 숱한 여배우와 염문을 뿌렸다고 하고, 두 번의 결혼을 하기도 했지만, 이 책에는 그런 이야기가 일절 없다. 그래서 그가 헌신했던 항공 산업과 조종사로서의 활약 이외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책이나 자료가 필요하다.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하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휴즈 역을 맡은 <애비에이터 The Aviator>는 휴즈의 강박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사족이다. 인터넷 서점 YES24에 실린 책소개에는, 이 책이 “캐서린 헵번, 노아 디트리히 등 하워드 휴즈의 연인과 측근들의 인터뷰와 방대한 자료를 참고하여 집필”되었으며 “특별히 어머니가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평생 세균 결벽증으로 살았던 일화, 193센티미터의 장신에 잘생긴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 때문에 할리우드의 수많은 여배우들의 흠모를 샀던 이야기 등이 흥미롭다”고 씌어 있는데, 그게 영화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본서에는 전혀 그런 내용이 없다. 또 같은 책소개에 휴즈가 “칠순이 다 되어 죽음 직전에도 새로 출시되는 시재기의 첫 비행”을 했다고 씌어 있는데 그것도 ‘뻥’이다. YES24의 책소개가 기가 막혀, 재미삼아 알라딘의 책소개도 찾아봤다. “스스로 조정간을 잡아 두 번이나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는 점, 할리우드 여배우들과 숱한 스캔들을 뿌렸다는 점, 개인전용 비누를 가지고 다니며 30분 간격으로 손을 씻는 결벽증 환자였다는 점, 말년엔 진공유리관 속에서 생활하며 세균공포증에 시달렸다는 점 등이 흥미롭다”고 썼지만 두 번의 비행기 사고는 “휴즈가 낸 네 번째 비행기 추락사고”라고 적혀 있는 본서의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나머지 일화 역시 책소개처럼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