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7일
장 파바르의 『감옥』(영림카디널, 1999, 도미노총서018)을 읽다. - 이 책은 감옥의 역사를 다룬 책도 아니고, 감옥과 그 제도에 대한 폭로물도 아니다. 교도행정 분야에서 일한 적이 있는 판사가 쓴 이 책은, 프랑스 교도행정과 개혁에 관한 책이다.
프랑스 교도행정 개혁은 1971년 리옹 교도소를 시작으로 1974년까지, 전국의 교도소에서 거의 매해 있었던 교도소 폭동 탓에 검토되기 시작했다. 연이은 폭동으로 교도관이 죽으면서 개혁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1987년과 1988년, 그리고 1992년에 다시 폭동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교도관이 죽었다.
앞서 이 책은 감옥의 역사를 다룬 책이 아니라고 했지만, 몇 가지 사전 정보가 없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 감옥이 고안된 이유는 오늘처럼, 죄수를 일정 장소에 일정 기간 감금해 놓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감옥의 원래 목적은 다양하고 무서운 형벌을 기다리는 동안 죄수를 잠시 가두어 두는 곳이었다. 그런데 감옥이 형벌을 대기하는 장소가 아니라, 감옥 자체가 형벌로 전환된 데에는 ‘속죄’라는 종교적 관념이 발전하면서다. 이런 정신으로 구현된 감옥이 나타난 것은 16세기 암스테르담에서였는데, 이곳에서 죄인은 노동과 종교 교육을 통해 속죄할 것을 제안받았다.
프랑스 혁명 정신이 요약된 인권선언은 “인간은 누구나 죄가 있다고 선고될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되며, 체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경우, 신변확보에 필요치 않다고 보여지는 모든 가혹 행위는 법에 의해 엄격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명시했고, 아울러 “엄격하고 그리고 분명하게 필요한” 만큼만 형벌이 허락된다는 원칙이 생겼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범법자의 교화를 추구하기보다는 그들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적 의지는 여전했다. 죄수들은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발목에 무거운 쇳덩이를 끌고 다니거나, 사슬로 다른 죄수와 함께 묶인 채 생활해야 했다.
그러나 투옥이 곧 범죄와 위법 행위를 처벌하는 기본 축이라는 생각은 물릴 수 없는 상식이 됐다. 나폴레옹의 제1제정은 그런 변화에 맞게 교도소를 정비하는 역사적 임무를 맡았다. 이때부터 복역기간이 1년 미만인 죄수들을 수용하는 구치소와 그 이상의 형을 받은 죄수를 수용하는 교도소가 분리되었고,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또 교도소를 효과적으로 설계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는데, 1791년 벤담이 일찌감치 설계해 놓은 원형감옥의 원리는 현대에 신설된 여러 교도소도 응용하게 된다.
식민지를 거느렸던 프랑스는 개전의 정이 없다고 판단된 죄수들을 가이아나나 뉴칼레도니아와 같이 유럽이 아닌 땅으로 이주시켰다. 이런 정책은 1938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하는데, 그 숫자는 대략 2만 명이다. 이처럼 죄수를 다른 대륙의 식민지로 보내는 것은, 감금에 유배까지 더하는 이중처벌이라는 생각을 당시에는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영화 <빠삐용>을 통해 우리는 악명 높은 가이아나 감옥으로 유배된 프랑스 죄수들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근대 교도행정에서 중요한 변화는 가석방제도의 탄생이다. 1885년에 확립된 이 제도는 형량의 절반을 마친(재범이나 누범의 경우 2/3를 마친) 모든 죄수들을 위한 것으로, 이 제도는 근대 교도행정의 ‘속죄’ 성격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개전의 정을 충분히 보여준 사람만이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획기적인 제도는 1891년에 확립된 집행유예 제도다. 이 제도의 근본취지는 감옥에 구금하지 않고도 개전의 가능성이 있거나, 한번도 감옥에 간 일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투옥을 피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감옥에 대한 발상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1945년부터다. 그 전환은 감옥의 “본질적 목적은 죄인을 교화해서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것은 죄수를 다룸에 있어서 “인간적이어야 하고, 굴욕적인 조치를 행해서 안 되며, 원칙적으로 보편타당한 직업 교육과 개선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징적인 담장이 쳐진 개방교소도와 저녁에만 감방에 돌아온다는 조건으로 낮에는 재소자들을 사회의 일터로 내보내주는 반半자유 제도 등이 실험되었다. 하지만 이런 감옥이 이상적인 감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 교도소는 ‘죄와 벌’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평형 인식을 뛰어넘기도 힘들지만, 무엇보다도 탈옥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교도소장과 교도관들의 유일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획기적인 변환에도 불구하고 1971부터 터져 나온 교도소 폭동은 교도소가 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는데, 감옥에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규정(범죄 기술의 교환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규정), 담배 반입과 흡연 금지, 서신 왕래 제한 등은 1974년의 폭동을 끝으로 프랑스 교도소에서 사라진 것들이다. 이런 금지 조처들은 투옥 자체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해 신변을 소유할 권리를 빼앗는다는 자체만으로도 체형의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교도소 제도는 그러한 상황에 따르는 고통을 심화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망각한 것이다.
다른 나라와 같이 프랑스 감옥의 가장 큰 문제 역시, 늘어나는 죄수에 대비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수감자가 많아질수록 감옥의 건설도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오래전인 1830년에 나온 감옥에 대한 보고서는 “감옥 건축물이 확장됨에 따라 수감자의 숫자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년 8,000명의 수감자가 늘어나는 상태를 외면하고 새 감옥을 짓지 않으면, 교도소는 인구 과밀이 되어 통제와 안전이 위험해 빠질 것이다. 이때 가장 손쉬운 해결책으로 보이는 게 미국의 사립 감옥을 도입하는 것인데, 현재는 모르지만,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된 1994년에 그 계획은 백지로 돌아갔다.
늘어나는 수감자와 좁은 교도소를 해결할 방법으로, 경범죄와 단기형 죄수를 투옥형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6개월 미만의 죄수가 전체 죄수의 62%를 차지하는 프랑스에서, 벌금이나 무보수 사회봉사 노동을 늘여 수감자를 막는 것은 효과를 보았다. 이 책의 말미는 장기형에 대한 해결책으로 가석방과 감형을 남발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교도행정이 감형과 가석방을 많이 허용할수록 법정은 그것을 미리 예상하고 형량을 늘인다. 그래서 “형량의 복역 비율은 점점 낮아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감옥에 머무는 기간이 점점 더 늘어”나는 ‘감옥의 역설’이 생겨난다(가석방은 가석방 기간 중에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재수감된다. 감형은 그야말로 형을 면제하는 것).
죄수들을 관리하는 규약과 죄수가 생활하는 환경이 바뀌고, 죄수들을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한 다양한 직업 훈련과 감형 제도가 발전되었지만, 신체 구금과 탈옥 방지, 안전이라는 감옥의 변환 불가능한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감옥을 위협하는 새로운 적은, 바로 사회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모든 재소자들이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일의 양이 충분히 남아” 있지 않으며 “사회적 재적응은 사회·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는 가운데 점점 더 불확실하게 되어가고 있다.” 이런 사실은 “재소자의 운명을 더더욱 악화시킬 위험”으로 존재하며, “어쨌거나, 형벌은 항상 그곳에 있으며,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감옥은 장밋빛 안식처를 약속해 주지 않는다.”
사족. 교도소 폭동의 원년인 1971년, 교도관과 여간호사가 1명씩 살해되었던 클레르보 교도소 사건에 대해서는 피에르 벨메르·장 프랑수아 나미아의 『세계사 일급비밀』(새날, 1996) 305~328쪽에 자세하다. 독자들은 거기서 여론 재판에 휩쓸려가는 애꿎은 희생자를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