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실천문학사, 2003)를 읽다. - 조지 오웰은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마흔일곱 살이라는 많지 않은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많은 양의 에세이와 서평을 썼다. 이 책은 생전에 다 출간되지 못했을 만큼 많은 그의 에세이 가운데 일부를 가려 뽑은 선집이다.
편역자는 이 선집을 다섯 개 부로 나누었는데, 제2부와 제5부는 문학을 주제로 한 글들을 모았다. 이 가운데 「소설의 옹호」라는 에세이는 흥미로운 글이 아닐 수 없는데, 우선 제목과 내용이 온전히 합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의 옹호」라는 제목을 역자가 의역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묘한 것을 발견한 우리의 흥미는 줄어들지 않는다. 이 에세이의 서두는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요즈음 소설의 위상은 극도로 낮아져 “나는 결코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말이 10여 년 전에는 변명하는 말로 들렸지만, 요즈음에는 의도적으로 자랑이라도 하듯 말해진다는 사실은 굳이 지적할 필요조차 없다.
이 에세이를 다 읽어보면, 역자가 제목을 의역했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내용은 제목이 암시하는 임무에 따라 ‘나는 결코 소설을 따위는 읽지 않아’라는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낮아진 소설의 위상을 변호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는 것은 오웰 자신도 알고 있다.
어쨌든 나는 소설의 가치를 높일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층 사람들이 소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소설의 위상을 떨어뜨린 중요한 원인 중 하나-내 생각으로는 ‘주된 원인’-를 분석해 보자.
이제 우리는 잔뜩 기대하지 않겠는가? 소설의 위상을 떨어뜨린 주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런데 앞의 인용에 이어지는 다음의 문단을 보면, 부풀었던 기대가 맥없이 꺼지고 만다.
분별 있는 사람을 찾아가 ‘왜 절대 소설을 읽지 않는가?’라고 물어보라. 그러면 그 이유가 광고 목적으로 고용된 삼류 서평가들이 써놓은 형편없는 단평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웰이 이 글을 썼을 것으로 추측되는 194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당신의 영혼은 죽은 것이다”와 같은 황당한 서평이 횡행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주례사 서평’ 탓에 소설 독자가 떨어져 나가고, 소설의 위상이 떨어졌다고 진단하는 것은 무리다. 만약 오웰의 판단이 옳다면, 소설 독자를 다시 불러 모으고 소설의 위상을 새로 세우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오웰은 스물일곱 살부터 죽기까지 서평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일은 젊은 오웰의 생계이자 작가 수업의 일환이었고, 훗날 『동물농장』으로 생전 처음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도 스스로 즐겼던 일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나름의 ‘서평관書評觀’이 있었으리라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한데, 제목이야 어쨌든 아직 다른 글을 발견하지 못한 나로서는 잘못된 전제로 시작하는 서두만 뺀다면, 이 글이 충분히 오웰의 서평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웰은 서평가를 출판사에 고용된 ‘아부꾼’ 내지 ‘매춘부’로 본다. 왜냐하면 악평을 늘어놓는 서평가를 출판사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서평가는 일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짜맞춘 광고문을 쓰게 된다(영국의 서평 관행은 우리나라와 좀 다른 모양이다. 우리나라는 매체가 서평가를 선정하는 데 반해, 영국은 출판사가 서평가를 매체에 소개하는 식).
출판사나 출판사와 연계된 매체가 서평가의 밥줄을 죄고 있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방법은 출판사와 매체로부터 자유로운 다른 장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하자고 나설 서평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대신 오웰은 몇 가지 해결책을 든다. 하나, 서평가들이 서로 찬사를 자제할 것.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수사의 사다리로 내몰리게 되어, 마지막에는 아무 쓰레기에나 대고 광적인 찬사를 터뜨리게 된다. 둘째, 잡지는 많은 소설을 서평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1년에 12권 정도만 다룰 것. 그러면 선정 과정에서 옥석이 가려진다. 셋째, 출판사나 매체에 오염된 직업 서평가보다 차라리 아마추어 서평가를 쓸 것. 오웰의 해법은 이렇듯 순진 소박하지만, 이런 제언조차 우리나라 문학계나 서평가에게는 버겁기 짝이 없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삼류 서평이 소설의 위상과 독자를 떨어뜨리는 주된 원인이라는 오웰의 진단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치킨’ 하면 ‘빵가루 소스’가 자동적으로 생각나듯, ‘소설’이라는 용어를 생각하면 ‘삼류 단평’”이 머리에 떠오르는 한, “지성인은 거의 본능적으로 소설을 피한다”고 말하는 오웰의 일침에는 동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