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일
톨스토이 만년의 작품인 『크로이체르 소나타』(웅진씽크빅, 2008, 펭귄클래식3)는 아들 세르게이와 바이올리니스트 율라 라소따가 베토벤이 작곡한 같은 제목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듣고 감명을 받아 쓴 작품이다. 액자형식의 이 소설은 아내를 죽인 포즈드니셰프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형의 대학 친구들을 따라 열다섯 살 때부터 창가娼家를 출입했는데, 어른들 중에 아무도 그 행위를 꾸짖지 않는 것을 보고 성과 사랑이 분리된 성인세계의 이중 잣대를 일찌감치 깨달았다.
매일 호텔이나 무도회장을 찾아 여성을 농락하는 한편 육체적으로 순결하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처녀와의 결혼을 꿈꾸었던 그는 자신의 이상형과 결혼했지만 행복하지 못했다. 청춘 시절의 난봉이 그에게 여성에 대한 불신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오랜 역사 동안 남성들이 여성들의 육체를 남용한 끝에, 여성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육체가 남성을 꼼짝 못하게 하는 권력이요 재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사회의 온갖 분야로부터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우리가 장사꾼이 되기를 바라는군요. 좋습니다. 우리가 장사꾼이 돼서 당신들을 지배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 상황처럼, 여성들 역시 “우리가 육욕의 대상이기만을 바라는군요. 좋아요, 그렇게 하는 대신 당신들을 노예로 만들겠어요”라는 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런 여성관은 관능적인 요부를 찬미하는 일각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슬레이브걸slavegirl’ 이론을 떠올려 준다. 이를테면 팝 스타 마돈나와 같은 전복적인 요부는 “여성들은 남성들의 육욕을 자극하여 자신들의 그물에 가둠으로써 복수하고 있는 겁니다. (…) 여성들은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는 무기를 스스로에게서 찾아내 만들었고, 이로 인해 남성들은 여성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다가가자마자 그녀에게 마취되어 바보가 되어버리는 겁니다”라는 포즈드니셰프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체현한 여성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그랬듯이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웅진씽크빅, 2009, 펭귄클래식39) 역시 일명 <전원>이라고 불리는 베토벤의 6번 교향곡에서 제목을 빌려 온 소설이다. 또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까딱했으면 ‘아내를 살해한 어느 남편의 이야기’라는 멋대가리 없는 제목을 달 뻔 했듯이, 이 소설 또한 애초에는 ‘맹인’이라는 건조한 제목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다. 하지만 제목이 중도에 바뀐 것은 지드가 젊은 시절부터 음악에 심취했던데다가, 작중에도 나오듯이 그에겐 <전원>보다 더 황홀한 음악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목사는 눈먼 고아 소녀 제르트뤼드를 자신의 목사관으로 데려와 사물을 익히게 하고 글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그 소녀를 이성으로 사랑하게 되지만, 그는 자신의 애욕을 기독교적인 애덕이라고 속인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신학교에 다니고 있는 장남 자크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들을 제르트뤼드로부터 떼어 놓는다. 눈먼 소녀의 “장애와 순진함과 천진난만함을 악용하는 것은 가증스럽고 비열한 짓”이며 사랑이란 “아직 그 아이에겐 너무 이른 감정”이라면서! 눈먼 고아 소녀와 부자가 삼각관계에 빠지는 것은 문학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목사는 그즈음 복음서를 새로 읽으면서, 예수의 사랑이 바울의 율법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나는 복음서의 어느 구절에서도 계명이니 위협이니 금지니 하는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은 성 바울로부터 유래한 것들일 뿐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제르트뤼드가 목사를 사랑한다면서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대담한 고백을 하자, 주인공은 솔직하지 못하게 그것을 죄라고 타이른다. 여기서 눈먼 사람은 제르트뤼드가 아니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목사다. 그는 제르트뤼드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속으로는 모순되게도 “타인의 행복을 해치거나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태롭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죄임을 제르트뤼드에게 가르치고 믿게 할 때 내가 그리스도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고 그 애 역시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아닐까?”라며 번민한다.
이렇듯 『전원 교향악』은 율법보다 사랑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결말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망막 수술을 하고 시력을 찾게 된 제르트뤼드는 집으로 목사관에 초대된 날 저녁 자살을 시도하고 이튿날 죽게 된다. “목사님 곁으로 돌아오자마자 저는 그 점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차지하고 있던 그 자리가 저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다른 분의 자리였다는 것도요. 저의 죄는 바로 그 점을 좀 더 깨닫지 못했다는 거예요. (…) 이제야 제 눈으로 직접 수심이 가득한 그분의 가엾은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자 저는 그 슬픔이 저 때문이라는 생각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요.” 눈을 뜨는 것과 죄를 아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니, 인간 존재와 인식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두 작품은 음악가를 주인공으로 삼거나 음악을 주제로 한 작품은 분명 아니지만,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경우에는 톨스토이의 음악관이 명료히 드러나 있다. 포즈드니셰프가 아내를 죽이게 된 계기는 외간 남자와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을 목격하고서다. 그를 사로잡은 질투는 여성의 마르지 않는 매력과 무한한 성적 오르가슴 능력에 대한 남성의 불안과, 난봉으로 청춘을 지새웠던 남자일수록 여성이 육체와 정욕 이상의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미성숙이 원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질투를 순전히 음악 탓으로 돌리는데, 거기엔 영혼을 자극하고 청중을 최면 상태로 이끄는 음악이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톨스토이의 음악관이 반영되어 있다. “중국에서 음악은 국가가 관장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드의 소설 가운데 목사가 색가(色價, 색의 명암도)를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제르트뤼드에게 교향곡에 나오는 악기의 음량을 가지고 “각각의 색이 더 짙을 수도, 옅을 수도 있다는 것과 색들이 무한히 섞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대목은 무척 생기가 있다. 특히 다음의 시적인 묘사는 랭보의 「모음들」에 대한 강한 메아리다. “나는 또한 자연의 붉은색과 오렌지색은 호른과 트롬본의 음색과 유사한 것으로, 노란색과 초록색은 바이올린과 첼로, 콘트라베이스의 음색과 유사한 것으로, 그리고 보라색과 하늘색은 플루트와 클라리넷과 오보에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상상해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