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
주명철의 『지옥에 간 작가들 - 18세기 프랑스 문화를 읽는 또 하나의 창』(소나무, 1998)을 읽다. - 나는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곧바로 일독했으나, 독후감을 쓰지는 않았다(실은 이 기억조차 확실하지 않다. 만약 있다면 1988~1989년 사이에 있겠지만, 매번 글을 쓰다 말고, 색인도 없는 나의 『독서일기』를 찾는 것도 지겹다). 도합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프랑스 혁명 전후의 ‘금서와 검열’이라는 창을 통해, 당대 프랑스 사람들의 의식과 풍속을 파악하고자 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처음 손에 들었던 이유는, 지은이가 가리키는 ‘달’ 즉 당대 프랑스 사람들의 의식과 풍속이 아니라, ‘손가락’ 다시 말해 금서와 검열이었다. 그때는 아직 내 재판이 끝나지 않았을 때였다.
지은이는 자신의 책을 ‘사상의 사회사’라고 일컫고 있는데, 지은이의 부연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접근 방법 가운데 하나로 18세기 프랑스 사람들이 읽은 방대한 장서 목록을 먼저 뒤지고 다닌 사람은 프랑스 역사가 다니엘 모르네다. 그가 쓴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민음사, 1993)은 지은이가 직접 번역도 했는데, 나는 이 책을 아깝게도 놓쳐 버렸다(지금은 중고 서점을 뒤져도 찾을 수가 없다). 다니엘 모르네는, 18세기 프랑스인이 읽었던 책은 오늘날 우리가 정선해놓은 그 당시의 고전과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인의 감식안으로 선별된 그 시대의 고전으로부터는 당대인의 의식을 실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앞서 밝히자면, 『지옥에 간 작가들』의 2부가 도색 문학과 그 작가들을 비중 있게 다루는 까닭이 여기 있다.
바스티유 감옥은 프랑스 전제주의의 상징이었으나, 당대 프랑스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바스티유 감옥의 악명은 상당 부분 윤색된 부분이 있다. 실제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버린 바스티유 정복 순간, 봉기했던 시민들이 발견한 것은 고작 7명의 죄수들이었다. 바스티유는 일반 죄수와는 달리, 격이 높은(?) 죄수들을 수용하는 왕립 감옥으로, 추기경에게 도전했거나, 왕에 대해 음모를 꾸민 자, 나라를 배반하는 첩자들을 수감했다. 그런데 이들 말고도 바스티유 감옥의 단골 출입자들과 특별한 서물書物이 있었으니, 바로 당국에 의해 압수되거나 판매 금지된 금서다.
바스티유의 단골 출입자들은 이 책의 1부에 나오는데, 이들은 당대의 엘리트들이거나 문사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여섯 명의 대표적인 단골 출입자들 가운데, 볼테르를 제외하고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저자나, 현재 우리가 손쉽게 구해 읽을 수 있는 저서는 없다. 왕실과 특권층을 비방하는 폭로물이거나 근거가 아리송한 중상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으면 소위 하위 계층에서나 접할 이런 팸플릿을, 프랑스 혁명 직전의 귀족·성직자·상층 부르주아·교수·약사·의사·법조계 인사와 같은 당대의 식자층들이 앞다투어 찾았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은, 악명 높았던 바스티유 감옥이 명쾌하고 공개적이지 못한 그 시대의 의사소통 방식이 만들어낸 결과였던 것처럼, 왕실과 특권층의 존재가 명쾌하거나 공개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2부 제목은, 책 제목과 같은 「지옥에 간 작가들」이다. 1부에 소개된 저자와 저작은 좋게 봐줘서 풍자 문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소개된 저작은 주로 왕실의 인사들을 성적 추문과 관련시키거나, 성직자들을 성애의 주인공으로 삼은 노골적인 도색 작품들이다. 당시의 프랑스 검열 당국은 이런 작품들을 압수해서 바스티유 감옥의 문서 보관실이나 왕립 도서관의 특별한 장소에 보관했는데, 그런 작품을 보관하는 왕립 도서관의 서가를 ‘지옥’이라고 명명한 때문에, 그 작품의 저자는 저절로 ‘지옥에 간 작가’가 되고 말았다. 1870년에 출간된 라루스 사전의 ‘지옥enfer' 항목 가운데 나오는 어떤 풀이는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도서관에 자리 잡은 구역으로서, 읽으면 해롭다고 생각하는 책을 두는 비공개 장소.”
손으로 쓴 수기신문手記新聞·팸플릿·노래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퍼져 나간 왕실과 특권층에 대한 성적 추문이 신문화사가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그런 포르노그라피 문서가 계몽철학자들의 정치적 언설과 다른 방식으로 “심각하게 체제의 밑동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같은 소문이나 추문, 악담은 글이나 인쇄물 이전에 존재했으며, 글이나 인쇄물에 고정되고 확대재생산되어 널리 전파되었다. 이같이 말과 글, 인쇄물은 당시 의사소통의 얼개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불만과 상승 작용을 일으켜 체제의 밑동을 허무는 데 이바지했다.” “우리는 이제 겨우 일간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하던 시절에 왕실의 잠자리에 관한 소문이 돌고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같은 의사소통의 그물이 발전하는 데서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3부는 검열의 역사를 추적하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해소 방안)를 기술해야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아쉽게도 ‘책의 역사’로 3부의 대부분을 채우고, 그 가운데 마지막 몇 장에서만 검열을 논한다. 아마 지은이의 의중은 책의 발명과 사용법(독서)을 통시적으로 살피면서, ‘공공의 독서’(음독音讀)에서 ‘독서의 사유화’(묵독)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검열의 부당함과 불가능성을 말하고자 했던 모양이다. 함께 공유하는 행위가 아닌 사적 행위에 공권력이 간섭할 권리가 없고, 또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독서 행위를 감시할 뾰쪽한 수단도 그리 많지 않다.
지은이는 검열을 ‘넓은 뜻의 검열’과 ‘좁은 뜻의 검열’로 나누면서, 우리는 넓은 검열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넓은 검열이란, 공식적인 권력 기관은 물론이고 종교적 기관 또는 사적私的 압력 단체가 망라된 검열 행위로, 극단적으로는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도 약한 수준의 검열 행위가 존재한다. “개인 사이의 대화는 언제나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넓은 검열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특정 사회나 집단의 구성원은 관습이나 정관에 따라 어떤 표현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만일 그 규칙을 어긴다면 공동체의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처럼 넓은 뜻의 검열은 인간이 생각하고 표현하는 존재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존속할 것이다.”
넓은 검열에 반해 좁은 검열은 좀 더 엄격한 법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이때의 검열은 “공공 권력 기관이 이미 공식적인 의사소통의 영역에 들어온 표현에 대해 통제를 가하는 것을 뜻”한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좁은 검열이 나쁜 것은, 국가가 검열 장치를 독점함으로써 넓은 검열의 권리와 기반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이 획일적으로 휘두르는 좁은 검열은 “검열 대상이 모든 사람에게 위험하다는 단순한 전제”를 가지는데, 그런 전제는 “똑같은 매체가 전달하는 똑같은 ‘텍스트’를 접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뜻을 만들어 내지는 않기 때문”에 잘못된 전제다. 하나의 텍스트가 여러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은, 어떤 텍스트가 국가라는 좁은 검열을 용케 피했지만, 오히려 여러 가지 종교·이익 단체의 넓은 검열에 저촉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국가는 좁은 뜻의 검열을 피하고, 넓은 뜻의 검열과 임무 교대를 해야 한다.
‘좁은 검열’과 ‘넓은 검열’이란 결국 ‘국가냐, 사회냐’라는 검열의 주체 문제로 귀결된다. 지은이는 단호히 ‘좁은 검열/국가’보다 ‘넓은 검열/사회’를 편든다: “좁은 뜻의 검열이 제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급격한 변화나 침묵을 강요했다 해도, 다수가 궁극적으로 자기네 뜻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역사는 발전했다. 그러므로 민주화 사회의 검열은 넓은 뜻의 검열이어야 하며, 거기서 주체는 다양한 시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건전한 시민단체여야 한다. 그들이 선의에서 경쟁적인 주장을 분명히 하고, 절차에 맞춰 이행한다면, 그들 사이의 검열이나 견제는 발전을 위한 우정 어린 충고가 될 것이다. 이때 공권력은 넓은 뜻의 민주적인 검열이 가능하도록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장을 확보해 주는 데서 할 일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