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슈테판 츠바이크의 『일급비밀』(자연사랑, 2003)을 읽다. - 이 소설의 작가는 슈테판 츠바이크다. 하지만 나는 이 독후감을 쓰기 직전까지 이 작품의 작가를 아르투어 슈니츨러로 착각했다. 얼마나 단단히 착각했는지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라는 긴 부제를 가진 피터 게이의 『부르주아전傳』(서해문집, 2005)과 이 소설의 독후감을 함께 엮을 생각이었다.
내게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든 것은, 본문을 펼치자마자 작중의 중요 주인공인 남작이 이렇게 말하는 대목에서부터였다: “친구의 부인이든 하녀든 상관없이 그의 마음의 문은 여자들에게 항상 열려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경솔하고 경망한 여자 사냥꾼이라 칭하더라도, 그 말 속에 어떤 진실이 담겨 있는지 알 바 없이 그런 일은 벌어지곤 했다 (…) 그들은 항상 격정으로 충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아닌 유희하는 듯한, 차갑고도 계산된 위험한 심정으로 말이다.”
『일급비밀』 10쪽에 나오는 남작의 말은, 예전에 읽다가 말았던 『부르주아전傳』에 묘사된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다채로운 성 경험을 연상시켰다. 그는 자신의 호색취미를 친구에게 변명하면서 “며칠만 금욕하면-6일에서 9일 정도가 최대치다-나는 바로 짐승이 된다”(106쪽)고 썼다. 같은 책에서 피터 게이는 그가 쓴 작품들의 남자 주인공들은 “뻔뻔한 이기주의자이자 동침한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면서도 결혼할 생각이라고는 없는 도시 남성, 요컨대 그 자신이었다”(109쪽)고 평하기도 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책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피터 게이의 책을 찾고 나서야, 나는 『일급비밀』이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작품이 아닌 슈테판 츠바이크의 것인 줄 뒤늦게 알게 됐다. 두 사람은 독자에게 혼동을 일으키기 좋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유대인 혈통을 가진 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그렇다(슈니츨러:1862, 츠바이크: 1881). 또 인간의 미묘한 감정을 해부하는 예리한 관찰력을 가졌던 두 작가는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는 수단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기법을 활용했고, 성애를 탐구했다.
츠바이크는 소설과 전기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지만, 슈니츨러는 극작가로 더 유명하다. 그런데 츠바이크의 이 소설을 슈니츨러의 작품으로 오해하게 만든 가장 큰 요소는, 『일급비밀』이 너무나 연극적이었던 때문이다. 때는 봄, 장소는 호텔, 주요 주인공은 단지 세 사람.
봄철 휴가를 보내기 위해 산중의 호텔에 투숙한 미혼 남작과 12살 된 아들을 데리고 휴가를 온 중년 부인 간의 연사를 줄거리로 한 이 소설은, 호텔이라는 극소화 된 공간에서 아기자기한 갈등을 만들어 낸다. 남작은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는 유부녀를 유혹하기 위해 그녀의 아들에게 접근하고, 외롭게 자라난 아들은 낯선 남자의 친절한 접근을 자신에 대한 ‘어른 대접’으로 오인한다. 아이는 남작의 정중한 태도를 성인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우정’으로 착각하고, 갑자기 어른이 된 듯한 기분에 우쭐 댄다: “에드가의 어린 시절은 자라서 못 입게 되자 내던져버린 옷처럼 꿈속으로 흘러가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유부녀에게 접근하기 위한 남작의 기만술이었다: “아이를 기만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 이 일은 다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어 못 견디는 아이는 엄마와 그 신사 사이를 연결시키기 전에는 말을 좀처럼 쉬지 못할 것이다. 자신과 아름다운 낯선 여인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하여 남작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남작은 아이를 매개로 유부녀와 가까워진다. 그제야 아이는 “남작의 다정함이 엄마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어떤 질투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이는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성인’ 행세를 하려고 하며, 두 사람은 갑자기 시계를 보더니 “9시구나! 자러 가야 한다!”는 식으로 아이를 따돌린다. 그리고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마치 아이가 그 자리에 없는 듯이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거나 농담을 즐긴다. 이때 아이는 낯선 남자에게 아버지의 여자(어머니)를 빼앗긴다는 걱정보다, 엄마에게 자신의 남자 친구를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에드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무기력함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엄마가 자신이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을 빼앗아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대항할 방법이 없어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친구나 아버지, 어머니, 신조차 사랑하지 않았었”던 아이는 “이제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작가는 일찌감치 써두었는데, 12살 난 아이가 남작에 대해 느낀 감정이 동성애적인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 아이 에드가는 어른들이 벌이는 '비밀'의 문밖에서 자주 울었다. “아이의 뺨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40쪽), “격렬히 흥분하고 거의 울음을 터뜨릴 듯한 상태”(51쪽), “아이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려”(54쪽), “하지만 매 순간 눈물을 꾹 참아 눈시울이 촉촉해지고 있었다.”(69쪽), “그것은 어린 시절의 마지막 울음이었고,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터뜨리는 울음이었다.”(79쪽), “아이의 목소리는 약해지고 거의 눈물과 뒤섞여 흐느끼고 있었다.”(85쪽) 이 잦은 울음이 에드가를 여성적으로 치장하고 있으며, 아이의 눈물이 남작에 대한 애모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해석일 것이다.
아들이 두 사람을 계속 따라다니자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너는 항상 3살 먹은 아이처럼 내 뒤를 쫓아다니니? 나는 네가 아무 때나 내 옆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아. 아이들은 어른들이 있는 곳에 있으면 안 돼”라고 꾸짖는 어머니에게 아이는 그제야 ‘아빠’를 들먹인다: “아빠는 내가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아요. 아빠에게 약속도 했어요. 내가 조심해서 생활하고, 엄마 옆에 있을 거라고요.”
아빠를 요청하는 에드가의 저 말은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을 부른다. 하나. 이번 여행에서 성인이 되었다고 느낀 에드가가,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에 실패하고 도로 어린 아이가 된 것으로 보는 설. 성인은 ‘싸움’을 할 때 ‘아빠’를 부르지 않는다. 아이들만이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둘. 위의 해석과는 정반대로 저 싸움에 ‘아빠’를 부르는 행위야말로, 아이가 성인들의 ‘일급비밀’을 비로소 깨우쳤다는 뜻이고, 성인이 되는 통과 의례를 완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 두 번째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암시는 다음과 같다: “아이는 ‘아빠’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엄마와 남작 두 사람을 마비시킬 수 있는 어떤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에드가의 아빠도 이 일급비밀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 있을 것이다. 아빠는 두 사람에 대해 알 수 없는 모종의 비밀스러운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라는 이름만 언급해도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불편함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 혹은 아빠라는 이름이 갖는 위력을 알게 된다는 것.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에드가는 상상계를 벗어나 상징계에 안착하는 것이다.
12월 10일
무라카미 류의 『69』(작가정신, 2004)를 읽다. - 류의 소설을 여러 편 읽었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매번 신작을 통해 자신의 진지함을 갱신한 것과 달리, 류는 새로 쓰는 소설마다 자신의 등단작『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가열성에서 일보씩 퇴보했다. 이 작품 『69』는 그나마 초기작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나태의 기운이 느껴진다. 왜 그럴까?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기 마련이고, 고교 예술가의 목표는 미래의 작가(문사)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어보면, 무라카미 류의 원래 목표는 작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었다. 다시 말해 시작부터 달랐던 셈인데, 류는 자신의 목표에 맞춰 의식적인 안락사(대중성, 영화적 가능성, 오락성)를 선택했다.
12월 13일
이문열의『미로의 날들』(미래문학, 1993)을 읽다. - 단골 헌책방에서 구했다. 이 책 옆에는 같은 소설의 초판인 『미로일지』(소설문학사, 1984)가 있었으나, 막상은 개정판인 『미로의 날들』을 샀다. 이 책 권두에 붙은 ‘개정판에 부쳐’란 서문 가운데 “[제목을 고치는 것과 함께] 내용도 부분적으로 수정”했다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정판을 사긴 했는데, 초판에 있는 모 평론가의 작품 해설이 이 판에는 없다(며칠 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해설을 보고자 헌책방에 다시 갔는데, 그 사이에 팔렸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문열의 장편을 꽤 읽었지만, 손꼽아 볼 작품은 몇 편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 기대하지 않고 읽었던 이 작품이 꽤 재미있다. 인간의 기회주의적인 속성 일반을 민중이나 노동운동에 직입하는 ‘이문열스러움’이 도드라져 있긴 하지만, 세태나 노동 현장을 다룬 소설 가운데 이만큼 ‘리얼’을 체감할 수 있는 작품도 흔치 않을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초판과 개정판에 ‘나는 민중을 선량하기만 한 핍박받는 천사로 보는 낭만적 민중주의 문학을 반박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는 요지의 서문을 달아 두었다. 이런 서문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독자의 자유를 빼앗는 일이자, 작품의 크기를 스스로 제한하는 패착이다. 그런데 이문열은 왜 손해 볼 게 뻔한 이런 실수를 자주 할까? 머리가 나빠서? 아니면 자신의 머리를 너무 과신해서? 너무 궁금해서 어느 선배에게 물어보니, 후자라고 한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오만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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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