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 영화의 모태가 되었다는 구자형의 소설 『와이키키 브라더스』(안그라픽스, 2003)를 발견했다. 책 표지엔 ‘한국 최초의 록 소설’이라는 선전 문구가 붙어 있는데, 과연 이 소설은 비틀즈·CCR·비비킹·밥 딜런·다이어 스트레이츠·레드 제플린·레너드 스키너드·에릭 클랩튼·제프 벡·지미 헨드릭스·블랙 새버스·애니멀스·딥 퍼플·이글스·올맨 브러더스와 같은 뮤지션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 소설의 말미에는 「팝과 록은 무엇인가」라는 보유가 붙어 있다. 저자는 그 글을 통해 “록은 따라서 아티스트의 정신이 중요하다. 언제나 기존과 기성을 경계하고 젊음의 순수성을 간직하면서 치열한 장인정신으로 예술적인 음악을 일궈내려는 정신적 흐름이 바로 록이다. 상업적인 팝과 이 점에서 다르다. 이 소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록의 순수성이다.”, “그들의 본래 정처는 비주류, 비제도, 반反상술이다. 그것으로 제도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도 변절되면 (다시 말해 스타가 되면) 제도권에 따라서 호의호식하는 상류층이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등의 말을 쏟아 놓았다. 그런데 왜 내게는 이 소설은 물론이고 보유로 달린 작가의 록 예찬마저 공허하게만 들릴까?
보유 형식으로 내지른 저자의 열변에 전혀 동감할 수 없는 이유를 구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구자형의 소설을 얘기해야겠지만, 이 작품을 놓고서는 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영화의 모태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제목만 같을 뿐인 임순례의 영화를 분석해 본다.
무명 그룹 밴드의 고군분투기에 주목해서 보면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예술가 영화’다. 또 무명 그룹 밴드가 대구에서 충주로 또 마지막엔 여수까지 흘러간다는 서사형식은 이 영화를 전형적인 ‘로드 무비’로 만든다. ‘예술가 영화’이자 ‘로드 무비’이기도 한 이 영화를 우리는 요령껏 ‘진정한 음악을 찾아가는 뮤지션의 오디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영화의 초입에 해당하는 #8은 ‘진짜 음악’에 대한 추구와 고집이 저 지지리도 못난 삼류밴드의 존재 이유이면서, 밑도 끝도 없는 자긍심의 원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장면은 성우의 밴드가 대구의 나이트클럽에서 쫓겨난 뒤,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지방 축제나 회갑연을 전전할 때, 그룹의 막내인 강수가 논바닥에서 술에 취해 목놓아 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수: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음악 하나 해 보겠다구 온갖 드러운 꼴 다 견뎌 내며 십수 년을 버텼는데 … 7인조에서 하나 둘 다 떨어져 나가고 이 시골 바닥에서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구…
강수의 말에서 새겨야 할 것은 “음악 하나”란 말이다. 다음 #29. 이 장면은 성우의 고등학교 시절 일화다. 막 음악에 열정을 불태우던 그 시절, 성우와 충고밴드 일행은 선배 음악가들을 따라 여름 해수욕장에 차려 놓은 고고장에서 허드렛일을 도운다. 거기서 성우 일행은 호기심에 가득 차 선배 음악가들의 공연 포스터를 보고 있는 여고생에게 ‘작업’을 건다.
민수: 이따 저녁에 우리 그룹 공연 보러 오세요.
여학생: (안 믿겨진다는 듯) 그룹사운드예요?
민수: 네에.
여학생: (천막 옆구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 속 사진을 보고) 아닌데…
민수: 이 형님들은 춤추기 좋게 딴따라 음악 하는 거고… 이따 밤늦게 오세요. 진짜 음악이 뭔지 보여 드릴 테니까…
참 재미있지 않은가? #8에서 강수가 목 놓아 울며 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지방 축제나 방금 다녀온 칠순 잔치에서 했던 음악은 물론이고 지방 나이트클럽을 돌며 했던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 분명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말이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하고 있는 음악을 가리켜 ‘음악’이 아니라고 말하는 역설이 진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8에서 강수가 부정한 잔치판의 음악은 #29에서 민수가 고고장에서 댄스음악을 하는 선배들을 우습게 여기며, 그건 “딴따라 음악”이라고 말하는 속내와 같다. 그리하여 당당히 말하지 않는가? “진짜 음악이 뭔지 보여드”리겠노라고! “진짜 음악”을!
문제는 ‘진짜 음악’이다. 그런데 ‘진짜 음악’이란 대체 뭘까? 워낙 음악이란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닌, ‘좋아하고, 말고’의 취미판단 영역이다. 그래서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진짜 음악’에 대한 결론은 쉽사리 내기 힘들다. 그렇기는 하지만, 적어도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인 충고밴드, 충주여고밴드의 인희, 성인이 된 성우의 동료들인 와이키키브라더스, 그리고 음악학원 선생 병주가 오매불망 원하는 ‘진짜 음악’에 대해서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이 한사코 추구한 ‘진짜 음악’은 록이다. 성우는 충주고등학교의 고교 밴드 시절 자신의 음악적 포부는 “퀸이나 롤링 스톤즈”라고 밝힌다. 미래를 예감하는 부창부수인가? 충주YMCA에서 개최된 충주 시내 고교밴드 음악회에서 인희가 충주여고밴드를 이끌고 부른 노래는 매우 상징적이게도 조안 젯&하트브레이커스의 <아이 러브 록 앤 롤>이다(이때 충고밴드가 부른 노래는 옥슨80의 <불놀이야>).
충주고교 시절 성우와 그 일행은 자신들의 밴드 이름을 ‘와이키키 브라더스’라고 짓는데, 한참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성우의 밴드 이름 역시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이것은 그가 록을 초지일관 ‘진짜 음악’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그에게는 ‘진짜 음악’이었던 록이, 다른 사람에게도 ‘진짜 음악’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앞서 거론했지만 정작 피하고 말았던 한 질문을 다시 끄집어 내야 한다. 서로의 얼굴을 붉히지 않고 누구나 동의할 수 ‘진짜 음악’에 대한 합의가 어렵긴 하더라도, 지방 나이트클럽 밴드에서 회갑 잔치의 일일밴드로 전락하고만 성우의 비극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진짜 음악’이라고 대략 인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정해둘 필요가 있다.
‘진짜 음악'이란 ‘지금-여기’의 정서를 담는 것이다. 대중음악이든 고급 음악이든 ‘지금-여기’의 정서를 외면하고 살아날 길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8에서 강수가 했던 말은, 그들의 패착이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암시해 준다. 그는 “이 시골 바닥에서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구”라고 울분을 토로했지만, 사실 모든 음악이 ‘진짜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바닥’이 중요하다. 오늘날 ‘클래식’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서양의 고급 음악들의 대부분은 실은 그 시대의 대중음악 즉 ‘바닥 음악’이었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이 왜 실패했는지를. 그들이 ‘진짜 음악’으로 떠받들었던 ‘록’은 ‘지금-여기’의 대중 정서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80에서 성우의 음악 선생 병주가 “나훈아 땜에 먹고 사는 사람 여럿”이라고 씁쓸하게 말하고, 또 #10에서 정석이 자기와 함께 전주의 나이트클럽에서 뛰던 애송이 여가수가 트로트 메들리로 뜬 것을 우스개 삼지만, 실은 그 대목들이야말로 성우 일행이 대중과 점점 멀어지면서 밴드 해산이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비참한 현실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신앙하는 ‘진짜 음악’과 ‘지금-여기’의 괴리를 모르며, 그들이 신주 모시듯 하는 ‘진짜 음악’이 실은 허위의식의 소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요청해야 할 것이 대중음악에 대한 사회정치적 분석틀로서의 후기식민주의 이론이다. 한국은 한 번도 미국의 식민지배를 받아 본 적이 없지만, 문화적으로는 식민주의 지배를 당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당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원한다’는 바로 그 차이가, 총칼에 의한 후기식민주의 이전의 식민지배와 구별된다).
일제 해방과 6·25때의 참전 그리고 전후 경제원조를 통해 미국은 한국인들에 고마운 나라가 됐고, 바로 그것이 미국의 대중문화를 숭앙하게 했다. 한국인은 록이 미국인들의 ‘지금-여기’서의 음악이라는 태생적 기원을 잊은 채, 우리들의 ‘진짜 음악’으로 오인한다. 그러면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은 ‘지금-여기’로 부르든, ‘바닥’이라고 부르든 크게 다르지 않은 대중과 유리되어 갔던 것이다.
식민지 예술인(혹은 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이런 허위의식은 나와 대중 간의 괴리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불행한 것은, 나와 대중 사이의 괴리 이전에 벌어지는, 나 자신의 자아분열이다. 성우의 음악 선생인 병주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스스로 말하듯, 월남할 때 어머니와 북한에서 헤어진 채 혼자 남한에 정착한 그는 “무지하게 고생”한 인물이다. 평생 삼류악사로 살았던 그의 음악적 우상은 지미 헨드릭스. 그것은 그가 늘 틀어 놓고 듣는 지미 헨드릭스의 카세트테이프로 증명된다. 그런데 그로테스크하게도 이 신산한 인물이 늘 입에 달고 사는 것은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에”로 시작하는 <서울야곡>.
다시 한번 음악에 대해 정의하자면, 음악이란 우리 몸이 내는 소리다(여기서 몸은 정신과 반대항에 있는 몸도 아니며, 영육으로 이분화된 몸도 아니다. ‘정신을 담은 몸’이라고 해두자. 정신과 몸은 ‘술을 담은 항아리’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희로애락을 삭이거나 부풀리기 위해 자연히 흘러나오는 소리가 바로 음악이다. 내 몸이 아플 때 저절로 슬픈 소리가 나지 기쁜 소리가 나오지 않으며, 내 몸이 즐거울 때 저절로 기쁜 소리가 나지 슬픈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걸 ‘음악적 정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병주의 입에서 나오는 <서울야곡>은 회한과 가난과 알코올 중독으로 망가져 가는 그의 몸이 내는 ‘음악적 정직’에 값한다. 그런데도 그의 음악적 이상은 지미 헨드릭스를 떠나지 못한다. 누추한 몸은 <서울야곡>을 되풀이 내지르는데, 음악적 이상은 몸이 내는 소리를 따라 하지 못하고 내 몸과 괴리된 이상을 내 것 인양 여긴다는 것! 이게 식민지 예술가의 자아분열이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이자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는 그룹의 작명 자체가, ‘지금-여기’가 아닌 록이라는 음악적 고향(미국)을 자신의 고향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뜻에서 주인공들의 ‘지금-여기’에서의 패배를 앞서 예시하고 있다. 이렇듯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록을 ‘진짜 음악’으로 착각한, 식민지 음악인의 슬픈 초상을 그리고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마련된 대반전은 식민지 음악인의 자각과 재생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은, 처음에는 7명으로 시작한 그룹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혼자 남은 성우와 채소장수 인희가 여수까지 떠밀려 가서 노래를 하는 장면으로 맺어진다. 거기서 인희는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른다. 트로트를 부르는 인희의 모습과 그것을 묵묵히, 지켜주듯 반주해주는 성우는 옛날 고교 음악회에서 <불놀이야>와 <아이 러브 록 앤 롤>을 부르던 시절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두 사람의 음악적 변전은, 이 영화 전체의 음악적 변전과 상응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첫 장면은 성우의 그룹이 나이트클럽에서 산타나의 <유로파>를 연주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영화의 끝 장면은 예의 <사랑밖엔 난 몰라>로 맺어진다. 영화의 서두엔 록 음악이 우세하지만, 중반엔 <토요일은 밤이 좋아>와 같은 ‘뽕끼’ 먹은 코리안 록이 자주 나오고, 후반으로 가면서 차츰 트로트에 경사된다. 이런 음악적 변전을 성우의 전락으로 보는 해석도 우세하지만, 나는 그런 해석에 반대한다.
트로트 음악을 하는 인희와 성우를 보고 음악적으로 타락했다거나 상업주의에 투항했다고 말하기는 쉽다. 대중이나 속악한 삶에 거꾸러진 예술가의 패배는, 늘 우리들이 선호하는 주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드디어 그들이 허위의 ‘진짜 음악’과 결별하고 진짜 ‘진짜 음악’과 조우했다는 신호며, 음악적 성숙이다. 와이키키 해변에서의 누드는 아름답지만 노래방에서의 누드는 혐오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여태껏 자신들이 음악을 해야 하는 ‘장소 특정적’ 성격, 다시 말해 ‘지금-여기’에 대해서는 무지했었다.
물론 대중 음악가들의 ‘장소 특정적’ 고민이 꼭 이 영화의 말미에서처럼 트로트로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장르를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자신도 의식하고 있지 못했던 식민성(혹은 허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작은 징후로, 트로트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이 놀랍게 다가왔다는 것. 그게 전부다.
그들의 음악적 험로는 이제 ‘바닥을 쳤’으며, ‘진정한 음악을 찾아가는 뮤지션의 오디세이’는 여기서 마감된다. 예술가를 주제로 한 모든 장르의 작품들이 진정한 예술에 대한 질문을 던지듯, 이 영화는 ‘진짜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주인공들은 나름의 답을 산출한다. 또 모든 로드 무비가 주인공들의 성장과 세계와의 화해에 바쳐지듯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것을 해낸다.
남은 문제는 와이키키 나이트클럽을 혼자 접수한 기태다. 영화 속에서 기태는 제대로 음악 수련도 받지 않은 채, 전자 악기와 비주얼로 승부를 보려는 요즘 대중 가수들을 희화화하는 듯이 보인다. #103을 통해 감독은 성우의 여수행이 기태와의 일전에서 패배한 결과로 보이게끔 각을 세워 놓았다. 하지만 상업주의에 ‘몰빵’한 요즘의 나이 어린 가수들과 기태를 동일시하면서, 기태 류의 대중 가수들을 두들겨 패는 것 또한, ‘진짜 음악’에 대한 몰이해와 오해를 재생산하는 태도와 거리가 멀지 않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쓴 작가는 록만이 ‘진짜 음악인 듯 강변하지만, ‘진짜 음악’은 록이나 트로트처럼 어느 한 장르로 정해져 있지 않다. 과장해서 말하면, 백 사람이 즐기는 ‘진짜 음악’도 있으며, 천 사람이 즐기는 ‘진짜 음악’도 있을 수 있다. 즉 ‘진짜 음악’이란 특정 장르를 가리키는 게 될 수 없으며, 온갖 배타성을 휘두르고 나서야 획득되는 게 ‘진짜 음악’은 아니라는 얘기. 이것은 문학·미술·연극·영화 등 ‘진짜’라는 접두어가 붙은 채 통용될 수 있는 모든 예술에 두루 해당한다(예를 들어 추리소설이나 SF소설을 ‘진짜 문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태도는 시정되어야 한다).
덧붙일 사항. 기태로 대변되는 오늘의 세대는 성우 세대가 시달렸던 식민성(허위의식) 정도를 간단히 넘어선 곳에서 작업한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레이션 박스로 영양 보충을 했던 성우 세대는 미국(서구) 문화를 우월하게 여기는 선험의 상태에서 그걸 모방하는데 급급했다면, 서태지 이후의 세대는 적어도 음악적 ‘보릿고개’는 면한 상태에서 서양의 팝과 동등하게 작업한다. 즉 그들은 우리 것과 세계의 모든 음악을 함께 녹이는 야금술(혼종성)에 능하다는 것, 그리고 미국(서구)이 먼저 유행을 선도하고 한국은 뒤따르는 게 아니라 동시성과 상호성의 기반 위에서 작업을 한다는 걸 눈여겨봐야 한다. 요컨대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희망은 성우나 기태 모두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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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