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
윤대녕 형의 매혹적인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창비, 2007)를 읽고 어느 지면에 짤막한 대담을 실었던 때가 올해 봄이었다. 그때 우리는 4년 만에 만났고, 또 4년 전에는 무려 7년 만에 만났었다. 그러니까 11년 동안 서울로 대구로 제주로 흩어져 살면서 우리는 고작 두 번을 만났던 셈인데, 그 사실이 나를 웃음 짓게 한다. 소설집에 실린 차례대로 「연鳶」에 나오는 우섭과 정연은 6년 만에, 표제작에 등장하는 형우는 무려 35년 만에 문희와 재회한다. 어디 그뿐인가. 「탱자」의 나는 근 30여 년 만에 경자 고모를 대면하게 되고, 이어지는 「편백나무숲 쪽으로」에서 다섯 살 때 종적 없이 사라졌던 아버지는 35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작품에서도 인연은 반복된다.
마치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우리도 오래 헤어졌다간 다시 만나곤 했으니 어찌 미소 짓지 않을 수 있으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랬지만, 읽는 중에도 나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한 차례 웃음 지은 순간이 있었다. 바로 「낙타 주머니」에 나오는 이진호가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이 듣고 싶은 밤이군. 게반트하우스와 쿠르트 마주어가 1975년에 동독에서 연주한 걸로 말이야. 나는 그게 가장 좋아.”라고 말하는 대목에서였다.
11년도 더 전, 윤대녕 형과 내가 서울에서 같은 지붕을 이고 살 때였다. 소설을 쓰는 선배 P, 후배 K 그리고 그와 나 넷이서, 지금은 누가 불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묘령의 아가씨와 신촌에서 만나 술을 마시기로 한 날이었다. 그날 그는 다른 일행보다 조금 늦게, 아주 무거워 보이는 라면 박스 만한 짐 하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타났다. 클래식은 LP로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작심하고 어디선가 한 100여 장 정도 구해 오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날 그 무거운 레코드 박스를 진짜 낙타의 혹처럼 어깨에 짊어진 채 몇 군데의 술집을 옮겨 다녔다. 바로 그런 노고가 그의 소설을 유려한 문장으로 만들었으며, 항상 음악처럼 단단한 구성을 낳게 했으리라.
올봄에 만났을 때 동갑내기 윤대녕 형은 말하길 아주 일찌감치 “중학교 때부터 소설을 습작했고, 군을 제대하면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흠, 나야 물론 윤대녕 형이 쓰는 작품의 발치에도 못 따라가지만, 나 역시 중학교 3학년 때 신춘문예에 시를 투고하기도 했으니 그와 나는 거의 동시에 문학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대녕 형은 대개의 문학청년이 문학에 대해 가지는 환상이나 허영이 없었으니,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때부터 오직 “문학을 통해 인생론을 터득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한다. 스님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다.
윤대녕 형의 주인공들은 늘 어디론가 떠난다. 은어·사막·소·말·별·사슴·제비·편백나무·낙타 등을 찾아서 ‘지금-여기’로부터 훌쩍 사라지는 주인공들은 묘한 흡인력으로 우리를 유인한다. 까닭은 승진과 재테크라는 아귀다툼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내면에도 말하지 못할 먹먹한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그의 소설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일상의 비루함과 반복을 견딜 수 없었던 그들에겐 직장은 물론 가정마저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업보일 뿐이다. 주인공들은 그래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혹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찾아 떠난다. 비록 여행이 완수되지 못하고 회귀로 끝나더라도, 상처를 지닌 등장인물들의 만행蠻行은 언제나 그것을 읽는 독자들의 재생에 바쳐진다.
‘이미지로 사고’한다는 평을 들을 만큼 윤대녕 형은 빼어난 이미지를 잘 만든다. 이번 소설집에도 그것에 능한 작가 특유의 지문이 군데군데 찍혀 있지만, 그 지문은 이제 작가의 개성을 구축하거나 미학적인 에피파니 제시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어, 삶이라는 만다라 문양으로 화한다. 이미지가 말을 아끼게 만들고 침묵으로 삶의 비의를 가르치게 만들었다면, 이번 소설집에서 늘어난 수다는 좀 더 삶과 밀착한다. 나는 그게 40대 중반이 된 윤대녕 형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소설은 그렇지만, 소설 밖의 사람들은 좀 더 자주 만나야 한다. 밀착한다. 나는 그게 40대 중반이 된 윤대녕 형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소설은 그렇지만, 소설 밖의 사람들은 좀 더 자주 만나야 한다.
9월 28일
미술·음악과 같은 예능과 체육은 대학 입시 과목에서 제외된 지 오래되었다. 많은 학교에서는 대학입시에 아무 쓸데없는 예·체능 시간에 자율학습을 하거나, 영어나 수학 같은 중요 과목을 보강한다. 그래서 예·체능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옛날보다 훨씬 편하다’는 말을 자조 삼아 내뱉고는 한다. 이런 상황은 대학 입시 위주의 기형적인 교육으로 일그러진 우리나라만의 사정일까? 우리는 늘 그게 궁금하다.
앤 뱀포드의 『예술이 교육에 미치는 놀라운 효과』(한길아트, 2008)는 2004~2006년에 걸쳐 호주예술평의회가 진행하고 유네스코가 지원했던 공동연구 과정의 결과물이다. 이 연구는 예술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과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 예술 교육의 실태를 분석한다. 연구자들은 그 작업을 위해 유네스코 회원국을 대상으로 미리 준비된 설문지를 보내고, 거기에 응한 37개국의 예술교육 담당자(기관)의 응답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분명 한국도 유네스코 회원국일 텐데 바베이도스·가이아나·몽고·콩고도 응답했던 저 설문지를 누군가가 깜빡 잊고 보내지 않았던 걸까?
놀랍게도 이번 연구의 개괄적 결과는 퍽이나 우리를 안심(?)시켜 준다. 조사에 응하지 않은 나라까지 합쳐 전 세계 84% 국가에서 예술교육을 독립된 가치를 지닌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고 있지만, 실상은 매우 다르다. “예술교육이 문서 상에는 존재하지만, 교과과정과 학급 내 예술교육 활동의 가치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많은 나라에서 확인된 문제점”이다. “거의 모든 국가가 교육에서 예술의 가치에 대해 말만 앞세우”고 있을 뿐 “교육은 과학적, 수학적, 기술적 사고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좋지 못한 시기에는 대개 다른 과목보다 예술 프로그램 쪽 예산을 삭감”하곤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대체 책 제목이 가리키는 ‘예술이 교육에 미치는 놀라운 효과’는 어디서 빌어 온다는 말일까?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예술교육의 목표는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그 효과는 꽤 분명하다. 긍정적인 자기 인식과 정체성 확립, 학습 능력과 집중력의 배가, 다양한 문화와 타인에 대한 이해, 정서적·사회적 소외감 치유, 평생 교육 추구에 기여 등등. 언제부터인가 예술은 예술 자체로 자신의 효용성을 주장하지 못하고 예술 외적인 효용성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왔다. 이건 긍정적인 발전이다. 예술을 돈으로 여기는 경제환원주의만 아니라면, 이모저모로 예술의 쓸모를 많이 찾아내는 것이 예술의 신비화를 강화하는 것보다 바람직하다. 사례를 보자.
“1980년대 미국의 상당수 학교가 교과과정에서 예술의 비중을 줄였다. 예술이 경제적 합리주의 교육 모델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선택과목’으로 여겨진 것이다. 예술을 교과과정에서 제한한 데 따른 여파가 거의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학업 성적이 고전을 면치 못했고 학교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유대와 협동 내지 균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교사와 학생들은 예술을 그리워했고, 1990년대 초에 이르자 교내에서 예술을 부활시키고 양질의 민주적 교육을 통해 예술의 중요성을 옹호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방금 읽은 인용은, 미국 사회의 악명 높은 ‘교실 붕괴’ 사태의 원인과 해결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순진하게 설명된 반면 예술 교육의 효능은 턱없이 과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사에 응답했던 국가들이 초등학교(176시간)와 중등학교(165시간)에서 예술교육에 할애하는 연평균 시간과, 미국의 공립 초등학교(46시간)와 중등학교(44시간)에서 이뤄지는 연평균 시간이 거의 세 배 이상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은, 위의 인용과 예술의 효용을 다시금 곱씹게 한다.
이 책의 어느 대목에서 연구자는 한국의 예술교육에 대해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듯이 언급한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여전히 그렇게 비치나 보다. 정말이지 이 책은 학교와 지방자치제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교육 종사자는 물론이고, 예술교육 정책 입안자들에게 굉장히 귀중한 영감과 실제적인 조언을 베풀어 줄 것이다.
9월 30일
두 주 전에 모 인터넷 서점으로부터 추천도서 감상문을 의뢰받았다. 서점 측의 말을 전해준 함형 말에 의하면, 뭐, 고료 같은 건 없고 ‘독서운동’의 일환으로 여러 저자들로부터 독자에게 추천하고픈 책에 대한 짤막한 감상문을 받아 인터넷 서점에 게시한다는 것이다. 고료를 준다고 하면 거절하기가 퍽 쉬운데(아암, ‘돈’이 필요 없다는 데에야), 고료는 없으나 ‘독서운동’ 운운하면 오히려 빠져나가기 힘들다. 어쨌건 의뢰를 받는 순간, 미리 읽어둔 바는 없으나, 반드시 이 책을 읽고 추천문을 써야지 하고 낙점한 책이 있었다. 기리노 나쓰오의 『다크』(비채, 2007). 이유는 거의 스무 권 가까이 신간을 보내준 이 출판사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아무런 대타 없이 이 책만 달랑 들고 대구로 내려갔는데, 하늘도 무심하군. 도저히 추천문을 쓸 수 없는, 문제가 많은 추리 소설이었다. 무라노 미로가 부산으로 도망가기 전까지는 굉장히 흥미진진했는데, 그녀가 부산으로 도망가는 데서부터 작품은 ‘날림’ 공사 투성이다. 그리고 여기 묘사된 ‘80년 광주’ 일화는 실소를 자아낸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모든 잘못된 작품에는 작가가 제 작품을 망치는 치명적인 ‘지점’을 가지고 있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여의치 않을 때를 대비한 후보작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며칠 전에 썼던 책에 대한 감상문을 재탕해서 보냈다. 아래 글이다
현대자동차가 미국에 1년 동안 수출했던 순익보다 할리우드의 영화 한편이 거두어들인 경제적 이득이 훨씬 많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던 때가 있었다. 문화가 곧 경쟁력이고, 예술이 고부가 가치가 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세계는 상업·소비·사회 각 분야에서 ‘창조산업’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통신 같은 첨단 분야일수록 기술과 예술의 접목이 밀접해 지고 있다.
아마 지금 자라나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심미적 감수성이나 창의력이 곧바로 생존을 위한 경쟁력이 되는 인류 최초의 세대가 될 것이다. 37개 유네스코 회원국을 대상으로 각 나라의 예술교육 실태를 분석한 앤 뱀포드의 『예술이 교육에 미치는 놀라운 효과』는 학교와 같은 일선의 예술교육 종사자와 지방 자치 단체의 문화·예술 기획자, 그리고 예술교육을 입안하는 정책 담당자들에게 귀중한 영감과 실제적 조언을 베풀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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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