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4일
조영남의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한길사, 2007)을 읽다. - 제목 그대로 난해한 현대미술을 약간의 ‘우상 파괴’적인 시각으로 읽어낸 책이다. 미술사나 미학적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오랫동안 그림 동네를 엿보면서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저자의 경험이 녹아있는데다가, 방송 화술을 연상시키는 자연스러운 ‘글발’이 합쳐져 가독성 높은 책이 되었다.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식의 부정확한 논평과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대목이 너무 많다. 현대음악의 시조를 바흐나 베토벤으로 잡는다?(57쪽), 2차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은 ‘엽기정신’으로 뭉쳐 있었기 때문이다?(119쪽),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는 독일 표현파 그림을 보고 2차 세계대전이라는 퍼포먼스를 구상했다?(123쪽), 러시아의 예술은 모두 날씨가 추운 덕에 발전했다?(138쪽) 등등. 저자는 물론 농담으로 썼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게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 때문에 독자가 얻게 될 폐해는 적지 않을 것이다.
사족: 숙제삼아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을 읽고나서, 우연히 도서전문 잡지
7월 27일
윤흥길 원작·윤삼육 각색 『장마』(커뮤니케이션북스, 2005)를 읽다. - 시나리오 속에서 동만의 이모 길자는 언니(동만의 어머니)에게 존댓말을 쓴다. 너무 궁금해서 소설을 찾아보니, 원작이 그렇다. 왜 그랬을까? 시집을 간 언니기 때문에? 형부의 낯을 세워주기 위해? 아무래도 어색하다. 소설은 그렇더라도, 영화에서는 바꾸었어야 할 대목이다. 아니, 시나리오는 원작대로 존대를 했지만, 영화에서는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위의 예에서 보듯, 본 시나리오는 원작을 거의 따라 한다. 그래도 틀리는 게 영 없지는 않은데, 동만의 삼촌 순철이 길자에게 욕정을 품는 설정이다. 그건 #48에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 설정이 없었다면 서울에 살던 외가댁이 동만네로 피난 온 #34장면의 지문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모 길자.”와 #45의 지문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길자의 모습이다.”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 두 장면 때문에 나는 또 원작을 뒤져 보았는데, 바로 이 대목이 각색자의 창의가 발휘된 부분이었다. 그런데 각색자는 왜 이 대목을 더 심화하거나 확대하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순철 삼촌이 길자 이모에게 욕정을 품는 설정 말고, 각색자가 창의를 발휘한 대목은 동만의 마을 친구 옥이다. 그녀가 등장하는 대목은 #17~#19, #35, #81, #106이다. 원작에는 없지만 각색에는 있는 옥이는, 전쟁으로 물고가 나는 남성을 보존하는 여성의 역할을 다시금 보강해 준다.
8월 15일
윤범모의 『첫사랑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다』(다흘미디어, 2007)를 읽다. - ‘화가 나혜석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소문’은 무성하지만 한 번도 온전한 실체가 조망된 적이 없는 여성, 나혜석. 저자는 행려병자로 죽은 그녀를 불행하게 보기보다, 자유를 찾은 인간으로 긍정한다.
8월 23일
전후 1950년대 하면 우리는 곧바로 정치적 혼돈을 떠올리게 되고 문화적 폐허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1950년대, 한국영화와 문화담론』(소명출판,2007)을 쓴 오영숙의 생각은 퍽 다르다. 50년대는 미약하나마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대중문화 매체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추상의 수준에서이지만 민주주의나 개인적 주체 같은 근대적 개념이 열렬히 ‘상상’되기 시작한 때다. 이 책의 말미에 강조되었듯이, 전후 9년간의 50년대가 없었다면 4·19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중들은 그 시기에 집단이나 이념에 매몰되지 않는 ‘개인성의 훈련’을 쌓았으니 4·19는 ‘개인성’에 대한 그간의 축적된 감각이 공적 역할을 자각하면서 ‘시민의식’으로 성장해간 변증적 성숙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은 늘 부정적으로 채색된다.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도록 조선 시대까지 소급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조선 시대의 신분 질서는 개인을 억압했으며 사대부들 역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매뉴얼로부터 한 치도 자유롭지 못했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 2004)나『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휴머니스트, 2007)에 출현하는 각종 ‘매니아’들은 공식적인 ‘성인’되기 매뉴얼로부터 탈주해 개인을 자각하려는 조선 후기의 집단적 지식인 운동이었으나, 모험이 시작되고 연이어 일제日帝가 왔다.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동안 개인은 다시 한번 억압되었다. “모든 개인적인 문제는 지하실에 몰아넣어야 한다”는 임화의 선언이 증명하듯이 민족이 모든 개념의 상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독립이라는 숙원의 과제를 짊어졌던 일제 강점기에, 개인성의 추구는 퇴폐주의거나 이기주의로 치부되었다.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은 근대성의 주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적 생활양식은 식민 지배에 눈감는 무책임한 행위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나온 나운규·심훈 등의 조선 영화는 ‘민족 해방’과 ‘계몽’을 영화의 내용으로 삼았으며, 매우 흥미롭게도 배우들의 연기술 또한 자신의 ‘개성’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민족의 표정’을 드러내어야 했다.
해방이 되자 일제 강점기 동안 ‘나라찾기’에 방점이 찍혔던 영화 담론이 ‘나라만들기’로 중심 이동을 하면서, 영화가 ‘대중계몽’의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영화 담론은 오히려 무성해졌다. 거기에 더하여 영화의 대중적 파급력은 남·북의 위정자들에게 좌·우 이념 대립의 선전장으로 영화를 이용하게 만들었고, 남한의 경우 일제시대에 민족(민족주의)이라는 단어가 쓰이던 자리에 반공(반공주의)이라는 단어가 대체되는 형국으로 해방공간(19454~1948)과 6·25 직전까지의 영화 담론을 지배했다.
1950년대는 개인·개성·자유·민주주의 같은 단어와 가치들이 인구에 회자되고 생활양식 속으로 파고들던 시대였다. 산업화와 민주주의는 이인삼각二人三脚 경기처럼 얽혀 진행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산업화가 미비한 상태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운위되곤 했다. 그러나 물질적 토대가 시원치 않았던 바로 그 때문에, 서구 추수주의나 토대 없는 추상화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앞서 열거한 가치는 열화 같은 대중의 성원을 받았다. 거기에는 피비린내나는 동족상잔을 치른 뒤에 따라온 이념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놓여 있었고, 미국식 민주주의와 생활양식에 대한 환상도 개입한다.
영화는 대중들의 염원과 당대의 풍향을 반영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이 구체화하지 못한 염원을 앞서 실현하면서 한 시대를 선도하기도 한다. 50년대에 유행한 대표적 장르영화였던 시대극·범죄물·멜로드라마·코미디는 50년대 이전과도 다르고 5·16 이후와도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영화 속에 개인과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이상을 아로새겨 놓았다. 그래서 저자는 이때의 영화가 “어떤 점에서는 현실의 반영보다는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성격이 더 강했다”면서 “50년대 영화는 자기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고자 한 문화운동”이라고 평가한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를 위해 50년대의 시대극·범죄물·멜로드라마·코미디가 어떻게 개인과 민주주의적 가치를 부각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실례는 생략한다.
이 책을 보고 나서 안 것이지만, 1950년대의 영화 필름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무척 놀랍다. 때문에 저자의 텍스트 분석은 영화의 형식적 분석보다 시나리오·영화평·포스터 문구 등을 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비가 죽죽 내리는’ 오래된 국산 방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독자는 나만이 아닐 것이다.
사족: 모든 저자들은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다른 대상과 극구 차별하고 싶어 한다. 오영숙의 경우, 50년대를 ‘반공계몽’이라는 검열로부터 벗어난 특별난 시대로 취급하고 싶어 한다. “반공주의라는 이름으로 계몽성을 주창하는 담론이 분명히 존속하고 있”긴 했으나, “반공주의는 민족주의가 지니던 위력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면서 50년대에 이르면 ‘반공계몽’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집단화된 신념에 대한 인식이 힘을 잃게 된다고 부연하는 대목이 그렇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 지면을 할애했던 <피아골>(이강천 감독, 1955) 상영금지 사태가 그랬듯이, 그 시대 역시 ‘반공계몽’이라는 공식적 집단 신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50년대 한국영화는 도시화·근대화와 발맞추어 대중성·상업성을 표피적인 영화 담론으로 삼지만, 한국영화 담론의 공식적 지도 이념(?)으로서의 ‘반공계몽’ 담론은 정권과 시기에 따라 강온의 차이가 있었을 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야 옳은 평가일 것이다. <피아골> 이후 <오발탄>(유현목, 1961)이 그랬고 <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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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