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총서(자음과모음)를 읽고
오래전 헌책방에서, 자음과모음이라는 출판사가 낸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라는 이름의 총서물 가운데 두 권을 발견하고 기가 막힌 적이 있었다. 이미 70여 권 넘게 나온 이 총서 가운데 내가 발견한 것은 서정욱의 『데리다가 들려주는 해체 이야기』(2007)와 강용수의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복제 이야기』(2008)이다. 두 권은 각기 이 총서의 52번과 72번으로 출간됐다.
철학 교수가 알기 어려운 철학을 쉽게 풀이하는 책을 쓰거나 강의를 하는 것은 본연의 임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총서처럼 철학 교수들이 초등학생들에게 데리다의 ‘해체’ 개념과 벤야민의 ‘복제’ 이론을 가르치겠다고 나선다면, 문제는 좀 다르다. 물론 두 책의 표지나 띠지, 그리고 표지를 열면 바로 볼 수 있는 발간사 어디에도, 이 총서가 초등학생을 위해 기획되었다는 설명은 없다. 그러나 주로 어린이용 동화책에 이용되는 큼직한 판형과 활자는 물론이고, 본문 가운데 들어 있는 ‘총천연색 전면 삽화’들은 이 책이 중․고등학생용도 못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 명확한 증거는 데리다와 벤야민의 철학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지은이들이 선택한 기술 방법이 ‘학습 동화’라는 점이다. ‘동화로 저학년에게 철학 개념을 가르치기’, 아마 이것이 이 총서의 핵심 개념이자, 판매 전략일 것이다. 『데리다가 들려주는 해체 이야기』의 여주인공이 누군가를 ‘중학생 언니’로 지칭하고,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복제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군가를 ‘6학년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총서가 초등학생용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이 총서는 주인공의 나이나 학년을 절대 밝히지 않는다).
이 지은이들은 어쩌자고 초등학생들에게 데리다의 이름과 그의 ‘로고스 중심주의’니 해체니 하는 것을, 또 벤야민의 이름과 그의 ‘아우라’니 ‘정치의 미학화’니 하는 것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것인가? 『데리다가 들려주는 해체 이야기』와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복제 이야기』에서 한 대목씩을 뽑아보자.
“지난번에 아줌마가 언어에 대한 해체 이론을 주장한 사람이 데리다라고 했잖니? 데리다는 철학의 흐름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사람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이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말인데 자세히는 알지 못해서 아줌마에게 다시 여쭤 볼 수밖에 없었다.
“아 그걸 먼저 설명해야겠구나. 포스트라는 건 ‘무엇 뒤에’라는 뜻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 후에 나타난 이념이라고 할 수 있지. 모더니즘 시대는 보통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말하는데, 그 지나친 이성 중심주의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란다. 데리다는 바로 그 포스트모더니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인 거지.”
“벤야민은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을 구분해. 경험이 하나로 통일되었다면 체험은 부서진 조각처럼 흩어져 있어. 유식하게 말하자면 파편화되어 있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전통과 공동체의 의미가 없어진 대중예술에는 경험이 아닌 체험만이 있다고 할 수 있어.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각 작용은 매번 똑같은 것, 반복되는 것에 민감해지면서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고 했어.”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어요.”
“그럼 예를 들어 볼까?”
아저씨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체험 중에 ‘충격’이 있어. 매일 방송을 통해 충격적인 정보를 접하게 돼도 그것이 내일이 되면 잊히고 다시 새로운 정보로 채워지거든. 그것처럼 체험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흩어진 채라고 볼 수 있지.”
인용된 여러 사항 가운데 어느 것도, 초등학생이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없다. 지은이 가운데 누군가가, 저런 것을 초등학생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태도는 ‘몰아세움’이고 ‘닦달’이라고 말해줘야 한다. 언젠가 이 총서로 무엇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거의 새것인 두 권의 책을 사놓은 것도 벌써 몇 년 전이다.
그러던 오늘, 도서관에서 같은 총서로 출간된 김선욱의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2006)를 우연히 발견했다. 연번이 ‘04’인 이 책은, 앞의 두 권보다 비교적 앞서 나온, 이 총서의 초기 간행물이다. 그런데 이 책의 뒷표지 날개에 이런 문구가 떡하니 인쇄되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철학적 사고’와 ‘통합형 논술’을 한꺼번에!
우려했던 것처럼, 이 총서는 초등학교 저학년용이었다! 내가 아는 어느 동화 작가가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은 너무 많은 것을 배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만물박사로 만들려고 한다. 내가 동화 작가이지만, 나는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는 것도 반대한다. 아이들은 그저 놀아야 한다”(노경실)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어쩌자고!
내가 이 총서로 게거품을 물자, 누가 이렇게 말해준다. ‘그게, 초등학생용으로 나왔더라도, 실제로는 중․고등학생들이 볼 것’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철학적 사고’와 ‘통합형 논술’을 한꺼번에!”라는 문구를 보고, 초등학생 자녀에게 70권도 넘는 저 책을 경쟁적으로 사다 안길 부모가 우리나라에는 실제로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저 문구에 혹해서 아이들을 몰아세우고 닦달할 부모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 총서의 초기에 사용된 저 문구가, 그 후의 총서에서는 왜 삭제되었을까? 속내는 알 길이 없지만(실은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저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더 많은 철학 교수들이 모른 체하고, 이 총서의 필자가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대학원생이나 강사가 이런 총서의 집필에 응했다면 사정이라도 보아 줄 수 있지만, 버젓한 철학 ‘교수’란 것들이…….
더 웃기는 것은, 이런 책에 ‘표4’의 추천글을 쓴 작자들이다. 양해림(충남대 철학과 교수)․홍윤기(동국대 철학과 교수)․박구용(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안광복(중동고등학교 교사) ……. 겨우 세 권의 책만 보고도 저런 이름을 발견할 수 있으니, 70여 권이 넘는 총서에는 얼마나 많은 어처구니들이 등장할 것인가. ‘표4’의 추천글, ‘쓰지도, 받지도’ 말아야 한다. 할 수 없이 쓸 때에라도 ‘내가 어떤 자리에 초대되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자리는 당신이 똥물을 뒤집어쓰는 자리다(나는 여태껏, ‘네 번’ 뒤집어썼다. 그중에 동고동락하는 친구의 시집과, 내가 그 소설의 첫 독자였으면서 그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며 열렬히 후원한 탓에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어느 경우는, 지금도 영예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내 이름만 빌려주고 추천글은 출판사가 알아서 만들었던 두 사례를 포함한 도합 네 번의 경험은, 모두 10여 년이 훌쩍 넘은, 아스라한 시절의 이야기다).
한국 사회는 워낙 ‘연고 사회’라서 ‘표4’의 추천글과 같은 낯간지러운 부탁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래서 글쟁이들은 자꾸 선언해야 한다. “나는 표4의 추천글은 쓰지 않습니다.” 자꾸 선언하고 다니면, 어느 날은 아무도 부탁을 하지 않게 된다. 이런 방법이 없지 않은데도 자꾸만 똥물을 뒤집어쓰는 사람은, ‘자기선전’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4’의 추천글을 수만 번 써봤자, 그런 일로는 결코 알아주는 ‘저자’가 되지 못하고, 유명해질 리도 없다.
‘표4’의 추천사를 쓰는 사람들은, 독자들에게 그 추천사들이 어떻게 읽히는지, 한 번도 역지사지해보지 않나 보다. 독자들은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또 누가 개소리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