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5일
신하윤 선역 『이백시선』(민미디어, 2001, 중국시인총서 103[당대편唐代篇])을 읽다
달과 술의 시인
우리나라의 민요 가운데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노래가 있다. 태백太白은 이백李白(712~770)의 자로, 가장 밝은 별인 금성金星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낳을 때 금성 꿈을 꾸었다 하여, 그것을 자로 삼은 것이다.
이백 |
이백이 ‘달의 시인’이라는 것은 현존하는 1,049수 가운데 달을 노래한 작품이 300여 수나 된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동시에 이백이 ‘술의 시인’이라는 것은 그가 남긴 숱한 음주시飮酒詩=頌酒歌가 입증해 준다. 그 가운데 “한 번 마시면 삼백 잔은 돼야지”라는 구절로 유명한 「술을 권하다將進酒」의 전반부를 보자.(어느 번역본도 자연스럽지 못해, 여러 번역을 취합하여, 윤색했다.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대 보지 못하는가
하늘에서 내려온 황하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그대 보지 못하는가
넓고 큰 집의 거울 속에서 백발이 슬퍼하는 것을?
아침의 검은 머리가 저녁에는 흰머리가 되는구나
인생에서 좋을 때 맘껏 즐길 일이니
금술잔을 빈 채로 달 아래 두지 마오
하늘이 나 같은 재목을 낸 것은 필히 쓰일 데가 있음이니
천금을 다 써버린들 아깝지 않다
양 삶고 소 잡아 한바탕 즐겨보세
한 번 마시면 삼백 잔은 돼야지
달과 술은 이백의 시에서 늘 함께 등장하는 불가분의 이미지로, 한 편의 시 속에 두 가지가 동시에 나와야 진짜 이백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月下獨酌」와 「술잔을 들고 달에게 묻다把酒問月」의 첫머리를 차례로 보자.
꽃 넝쿨사이에 술 한 동이
홀로 마시니 벗이 없네.
잔 들어 달님에게 권하니,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구나.
달은 마시지 못하고,
그림자만 날 따라다닌다.
잠시 달과 그림자 벗하여
이 봄이 가기 전에 즐겨볼까나. (신하윤 역)
푸른 하늘의 달이여 언제부터 있었느냐
나는 지금 잔 멈추고 네게 한번 묻는다
사람은 저 밝은 달을 잡을 수 없는데
달은 되레 사람을 따르려 한다 (김원중 역)
이백의 시에서 불가분이었던 달과 술은 그의 죽음에까지 따라와서, 시인에 대한 신화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백이 ‘뱃놀이를 하던 중에 술에 취해,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하다가 채석강에 빠져 죽었다’라는 소문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연구자도 ‘술에 취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허무맹랑한 설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소문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김원중은 『당시감상대관』의 「이백」 편에, 이백이 달과 술에 홀린 까닭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먼저 달.
그는 달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당나라 특히 현종이 통치하던 시기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시비是非가 전도된 난세였으며, 이를 초극하기 위한 이백의 노력은 홀로 심산유곡에 들어가 ‘그 자신을 보호하는康其身’ 은둔적 태도로 선회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 그에게 달은 교결투명皎潔透明의 상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시와 자연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특히 이백에게 자연, 그중에서도 달은 은둔의 상징이요 유락遊樂의 대상이며, 정적무욕靜寂無慾의 경지인 것이다.
다음은, 술.
이백이나 맹호연에게 술이라는 것은 속세를 떠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하면서도 벼슬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성격의 모순과 심적 갈등으로 인한 고민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백은 현실적인 고통과 괴로움, 절망 등 고통스러운 감정을 해소시키는 매개체로 술을 즐겼는데, 시성 두보에게서는 술이 뼈 저리는 애수를 동반하여 처량한 느낌이 들었던 것과 달리, 그에게는 오히려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감정이 깃들어있어 시의 분위기를 서정적이고 명랑하게 바꿔놓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 흔히 말하는 차이점이다. 그러기에 두보가 말했듯이 이백은 술 한 말을 마시면 백 편의 시를 지을 정도로 시적 상상력이 풍부하였으며, 당나라 어느 곳이든 술만 있으면 그의 고향이요, 고관대작도 부럽지 않았다.
진사시 거듭 낙제, 이백은 ‘돌머리’였나?
...당대 독서인이 권력에 다가서는 세 가지 방법
21세의 나이로 보란 듯이 진사시에 합격했던 왕유를 제외하고 이하·맹호연·이백·두보 등 기라성 같은 당대唐代의 시인들은 누구도 그런 행운을 얻지 못했다. 물론 진사시는 1천 명이 응시해서 겨우 10~20명만 합격하는 만큼 낙제생이 많았다. 하지만 시를 짓는 시험에 세 사람이 모두 두 번씩이나 미끄러졌다니, 가휘 때문에 응시 자체가 가로막혀 있었던 이하를 제외한 맹호연·이백·두보는 모두 ‘돌머리’에 불과했지 않을까? 이 문제는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고전이라는 당시唐詩 최대의 추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로 되돌아가 보면, 이들이 매번 진사과에 떨어진 데에는 숨은 이유가 있다.
다카시마 도시오의 『이백, 두보를 만나다』(심산, 2003)를 보면, 당나라 시대의 독서인(사대부)이 권력에 다가서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 번째 길은 과거科擧. 이 길은 문관 등용으로 통하는 정식 통로다. 과거는 표면상의 방침으로는 독서인 누구나 응시할 수 있으며 성적이 좋으면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지은이의 말을 들어 보자.
과거 응시에는 국립학교 학생이 되어 공부하다가 거기서 지원하여 시험을 치르는 코스와, 향공鄕貢이라 하여 혼자 공부하다가 지방 관청의 예비시험을 치르고 거기서 합격한 후 추천을 받아 중앙 시험을 치르는 코스가 있었다. 국립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원칙적으로 관리의 자제였고, 예외적으로 권력과 관계가 깊은 호상豪商의 자제도 입학을 허가받았지만, 이백과 같은 가문의 자제가 입학하기란 애당초 어려웠다. 향공의 경우에는 지방 관청과 지방 유력자의 승인을 얻고, 다시 중앙 관청인 호부(戶部: 호적에 관한 사무를 취급하는 관청)의 심사를 거쳐야 비로소 중앙 관청이 시행하는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따라서 앞에서 예로 든 ‘상지상上之上’에서 ‘하지하下之下’까지에 랭크된 293개 집안 중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사실상 응시가 불가능했으며, 설령 응시를 할 수 있었다고 해도 합격은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이백이 과거를 거쳐 정면으로 당당하게 관계에 진출할 길은 처음부터 막혀 있었던 것이다.
이백은 중국 서남쪽 끝의 촉도蜀道에서 태어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삼국지』의 유비가 근거지로 삼기도 했던 이곳은 중원과는 꽤 격리된 변방이고, 서역과 왕래가 잦은 지역이다. 이백의 아버지인 이객李客은 중국과 서역 간의 통상 교역에 종사한 상인이다. ‘객客’은 이름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을 부르는 별호라니, 이백의 집안은 원래 촉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다가 이객은 성姓마저 촉으로 이주해 오면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하면 내 성을 간다’는 말이 있듯이, 중국에서도 성을 바꾼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객이 수배자였다는 주장에서부터 호인胡人, 즉 투르크인이라거나 이백의 어머니가 이란계였다는 설까지 나온다.
중국의 문인들은 자신을 황제의 일족으로 꾸미기를 좋아해서, 이백 역시 죽을 때까지 자신을 당 황실과 같은 농서隴西 이 씨라고 우겼다. 하지만 당나라 황실조차 선비鮮卑족이었던 자신의 혈통을 은폐하고자 족보를 날조하여 명문인 농서 이 씨에 억지로 연결시켰으니, 이백의 혈통은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그의 시에 볼 수 있는 호인에 대한 낯설고도 비우호적인 묘사를 보건대, 이백이 그쪽 계통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아생전 황족으로 대접받은 적도 없었다. 그때는 ‘개나 소나’ 모두 농서 이 씨였던 것이다.
당 태종의 명령으로 편찬된 『씨족지氏族志』에 가장 고귀해야 할 황실의 가문 순위가 아홉 단계 가운데 세 번째에 불과한 ‘상지하上之下’로 평가된 예에서 보듯이, 그 시절의 문벌 의식은 황제조차 거리낌 없이 멸시할 정도였다. 하므로 서남쪽 변방에서 올라온 근본 없는 이백이 과거를 통해 조정으로 출사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당시의 과거는 반드시 성적순으로 합격·불합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추천자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시험이 시행되기 전에 수석이 미리 정해져 있기도 했다.
과거와 함께 독서인이 권력에 가까이 나가는 두 번째 길은, 중앙의 현관顯官이나 지방 장관에게 접근하여 실력을 인정받고 그 추천으로 관직을 얻는 것이다. 이 통로는 이른바 ‘뒷문’에 해당하는 편법인데(이외에도 군인이 되는 무관과 생식기를 잘라내고 환관이 되는 방법이 있지만, 여기서는 별외다), 이것도 거저 되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유력자만 믿고서는 관직을 얻을 확률이 낮기 때문에 몇 명 혹은 몇십여 명의 유력자를 찾아 다녀야 했고, 다양한 관리 지망생과의 격심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빼어난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유력자의 문전을 방문하는 관리 지원자는 대개 우선 서書와 시를 바친다. 서는 편지를 말하지만, 이는 용건을 전하는 편지가 아니라 문학 작품이므로 세련된 문장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보통 상대방의 가계, 재능, 공적을 극찬하고 말미에 자신을 추천해 주었으면 한다는 취지를 덧붙인다. 이것을 놓고 온 지 며칠이 지나면 재차 방문하여 다시 시와 서를 바친다. 제2차 파상 공격인 셈인데, 이를 ‘온권溫卷’이라고 했다. 앞서 날린 제1탄을 다시 가열한다는 뜻이다. 이로써 상대가 장래성이 있다고 인정해주면 직접 면회를 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에 들면 출입을 허락받아 객客의 일원으로 들어간다. 말하자면 ‘등용문登龍門’을 돌파한 셈이다. 제2탄까지 발사해도 아무 소식이 없으면 다시 제3차 파상 공격을 가해도 되지만, 일단 전망이 없으므로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편이 현명하다.
이 통로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면식도 없는 상대를 작품의 힘으로 끌어당겨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문학 수업이 필요했다. 중국의 정통 문학, 즉 사대부의 문학은 방대한 고전에 대한 지식이 넓고 깊지 않으면 창작도 이해도 불가능했으므로 오랜 세월을 바쳐 고전 공부를 해야만 했다.” 게다가 여기에는 상당히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구직자는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여 마음에 들어야 발탁을 받을 수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비굴한 존재다. 그러나 고관에게 스스로를 철두철미하게 비굴한 존재로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독서인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비굴하기만 한 사내는 자칫하면 비참하게만 보일 뿐 아무런 흥미를 끌지 못하여 상대가 그런 사내를 발탁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굴함만으로는 전술적으로 효과가 없다.
구직자는 본질적으로 비굴하지만, 그래도 기개가 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건방지고 오만하면서도 그 건방짐과 오만함이 상대에게 교묘한 아첨”이 되어야 했다. 기막힌 성공 사례를 보자.
이백보다 조금 연상인 노홍일盧鴻一이라는 은자隱者는 수도에 초청받아 현종 황제를 알현하면서 변변히 인사도 하지 않았다. 재상이 깜짝 놀라 나중에 사람을 보내 힐난하자, 노홍일은 “노자는 예의라는 것은 진심이 옅은 곳에서 나온 것이므로 따르기에 부족하다 했다고 합니다. 저는 촌놈이기 때문에 진심으로써 알현한 것입니다.” 하고 답했다. 늘 남들이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모습만 봐왔던 현종은 이 말을 듣고는 노홍일의 ‘진심’에 대단히 감격해서 내전으로 불러들여 술과 음식을 하사하고 일약 간의대부諫議大夫라는 높은 벼슬을 주었다. 이것은 사태의 경과를 계산하고 또 계산한 뒤에 결정한 전술이다. 당사자로서는 성패를 판가름하는 일대 도박이었겠지만, 이와 같은 ‘건방짐과 오만함’은 진정 비굴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비로소 활용해서 뜻을 이룰 수 있는 요소이다.
딱하게도 이백에게는 이런 기술이 없었다. 그는 “애써 굽히지 않고 남에게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을 무슨 일이 있어도 증명해 보여야만 하는 장소가 다름 아닌 스스로를 굽히고 남에게 바라는 자리”라는 딜레마를 매끄럽게 해결하기에는 자존심과 기개가 너무 높았다. 다카시마 도시오는 아부(비굴)와 오만(저항) 사이를 조절하지 못했던 이백의 약점을 파헤친 다음, 만약 그가 고관들에게 총애를 받을 만한 “조금도 빈틈이 없이 노련한 편지를 쓰는가 하면 총애를 받도록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면, 그가 아무리 많은 시를 지었다고 해도 진정한 ‘시인’은 될 수 없었다”고 평한다.
‘도교 루트’ 타고 황실로
과거도 추천도 여의치 않다고 일찌감치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당나라 시대에 두 가지 통로 말고 또 다른 방법이 있었으니, 이름 하여 ‘도사道士 루트’. 이는 당나라 황실이 도교道敎를 존숭했기 때문에 생겨난 특수한 길이다.
원래 도교는 민간신앙으로서, 본래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노장사상老莊思想으로 장식된 수준 낮은 종교였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지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당나라 황실이 가계를 중시하던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자신들의 가문을 치장하기 위해 같은 이씨 성을 가졌다는 노자를 먼 조상으로 떠받들어 현원玄元 황제라 부르고 도교를 존숭하여 장안과 낙양 그리고 각주各州에 노자묘老子廟를 세운 이래 도교는 국가 종교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로 인해 황실과 도교 지도자 간에 유착 관계가 생겨서 도사가 되는 것은 권력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루트가 되었으며, 이백도 이 루트를 타고 조정에 들어갔다.
이백과 도교·도가道家의 연관성은 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사항이다. 아래는 김원중이 『당시감상대관』에 쓴 일절이다.
이백은 어려서부터 도가적 분위기에서 자라 도가의 습속에 낯설지 않았고, 기이한 서적을 섭렵하는 데도 남달랐고, 심지어 다섯 살 때부터 육갑을 외웠을 정도였다 한다. 19세, 22세, 25세, 30세, 35세 등등 그는 평생 동안 산에 가서 도사들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 중에서 6분의 1이 도가적 특징을 지니게 된 것도 그의 도가적 성향 탓이리라.
내가 연거푸 인용하고 있는 다카시마 도시오는 김원중보다 좀 더 자세히, 이백의 도교 수업에 대해 밝히고 있다.
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한 공부와 수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 촉은 도교가 왕성하여 도사가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조건은 좋은 편이었다. 도교 교단 형성의 기원이 된 후한 시대의 오두미도五斗米道가 발생한 곳이 바로 촉이었다. 촉에 도사가 많았던 이유로는 수업에 적합한 깊은 산이 많다는 점, 농업 생산이 풍부해서 지역 사회에 도사라는 비생산적이고 기생적인 존재를 부양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러한 지역 사정으로 인해 이백이 도교 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은 후일 “5세 때 육갑六甲을 배웠다”, “15세에 기서奇書를 읽었다”는 등의 글을 썼다. 육갑이라는 것은 도교의 점치는 방법 등을 기록한 책이다. 기서란 정통 학문 서적 이외의 책, 즉 노장老莊, 신선, 참위讖緯에 관한 서적 등을 말한다. 5세라고 하면 그의 아버지가 서역에서 중국으로 돌아온 직후였으므로 그 나이 자체는 믿기 어렵다고 해도 그가 상당히 어릴 때부터 도교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도가의 풍격이 물씬 나는 이백의 시 한 편을 감상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은 「고풍 - 5古風 五」.
태백산은 어찌하여 푸르디 푸른가?
별들이 그 위에 줄지어 있다
하늘과는 삼백 리
아득하구나 속세와의 절연이여
산 속의 검은 머리 노인 있어
구름 헤치며 송운松雲에 누워 있다
웃음도 말도 없이
깊숙한 굴에 깊숙이 살고 있다
내가 진인眞人 찾아 만나
무릎 꿇고 비결을 묻노니
빙그레 웃으며 옥 같은 흰 이를 드러내
연약설鍊煉說을 가르쳐준다
뼈에 새겨지도록 그 말씀 전해주고는
몸을 솟구쳐 번개같이 사라진다
우러러보아도 미칠 수 없어
창연하여 애만 태운다
내 장차 단사丹砂를 다루어
영원토록 속세인과 헤어지리 (김원중 역)
이백은 자식 교육에 열성이었던 아버지의 후원으로 유가와 도가를 착실히 공부했다. 그리고 25~26세 무렵에 촉을 떠나, 16년 동안 구직을 한답시고 고관대작과 명문권세가를 사귄다. 그때 이백은 집에서 가지고 나온 30여 만금을 초기 몇 년 사이에 다 탕진해 버렸는데, 이 독후감의 첫머리에 나오는 「술을 권하다」에 그때의 일이 두 구절로 압축되어 있다(“하늘이 나 같은 재목을 낸 것은 필히 쓰일 데가 있음이니/ 천금을 다 써버린들 아깝지 않다”).
25~26세에 촉을 떠나 42세에 장안에 들어가기까지 이백이 벌인 16~17년 동안의 만유漫遊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만한 연보를 작성할 수 없다고 한다. 수수께끼 투성이의 첫 번째 결혼에서부터 장안에 올라가게 되기까지의 복잡한 역정을 신하윤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스물다섯 살 때쯤 이백은 삼협三峽을 거쳐 촉 지방을 나와 전국 각지를 만유한다. 만유는 당대에 특히 성행한 것으로 시인들이 견문을 넓히고 다른 지방의 여러 문인들과 창작경험을 교류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겉으로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듯 세속을 떠나 은일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문인들은 만유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기도 하고 권력자와 친분을 쌓는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십여 년간 이백은 장강 유역의 각종 명승지를 다니면서 [열일곱 살 연상의] 맹호연과 같은 당대의 유명 시인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명성을 쌓아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742년 드디어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가서 대조한림待詔翰林의 벼슬을 제수받게 된다.
위의 설명에서 신하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이백이 명문 사대부의 추천이 아니라, 현종의 초빙을 받고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도교 지도자(도사) 오균吳筠의 천거로 한림공봉(翰林供奉=대조한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학 루트와 도사 루트의 양다리 걸치기 중에 도사 루트가 드디어 걸려든 것이다. 더구나 도중 단계를 전부 건너뛴 천자의 직접 초빙이다. 이보다 더한 명예는 없다. 15년의 신고辛苦가 마침내 보답을 받았다면서 이백은 미친 듯 기뻐하여 씩씩하게 출발했다.” 다카시마 도시오의 말이다.
이백 |
하지만 이백이 맡았던 벼슬은 그리 중요한 직책이 아니었다. “단지 제왕의 포고문에 윤색을 가하고 초안을 잡는 시신侍臣으로 때로는 연회에서 노래할 시를 쓰기도 하였을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이백이 지니고 있는 이상과 크게 달랐다. 황제를 보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이백 자신의 꿈이었[다].”(신하윤), “한림원은 궁중에서 학문과 문학을 하는 선비들을 배치해 놓은 부서인데, 이는 실로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배속되었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관직에 오른 것도 아니어서, 그는 신분으로 말하자면 변함없이 포의(布衣: 민간인)였던 것이다. 관직이 없으므로 당연히 정해진 업무도 없다. 조칙의 문안을 작성하는 것이 한림원의 임무로 되어 있지만, 반드시 여기서 작성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만이 이곳의 임무인 것도 아니다. 천자가 뭔가 시키고 싶은 일이 있으면 부르고 없으면 부르지 않는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으며, 물론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다.”(다카시마 도시오). 그런데 뭐하자고 이런 부서를 만들었을까? 아래는 다카시마 도시오의 설명이다.
설치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러한 부서도 권력 측에서 보면 설치해 둘 의미가 충분한 것이었다. 국가는 인재를 소중히 여겨 결코 초야에 현인을 버려두지 않으며, 우수한 인물은 모두 모아 천자의 밑에 집결시켜 조정에 참여시킨다는 점을 천하에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중국에서는 ‘승평昇平을 점철點綴한다’고 한다. 승평이란 세상이 매우 잘 다스려지고 있는 상태를 뜻하고, 점철이란 화려하게 꾸민다든지 채색을 한다는 의미다. 이백과 같은 인물을 불러 한림원에 넣은 것은 ‘승평을 점철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백이 처음으로 황제에게 문안을 드린 날, 현종은 수레에서 내려 그를 맞이하고는 식탁으로 불러서 친히 국을 따라 주었다고 한다. 이는 극히 정중한 대우이기는 하나, 동시에 이백이 관리로서가 아니라 도사나 은사隱士로서 대접을 받았음을 뜻한다. 여기에 대한 이백의 처신은 어떠해야 했던가? 다카시마 도시오가 가르쳐 준다.
앞서 교묘한 아첨의 말로 현종을 기쁘게 한 노홍일이 금세 간의대부로 발탁된 것을 언급했다. 실은 그 이야기에는 속편이 있다. 노홍일은 그것을 고사하면서 자신은 아무래도 산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럴 때 천자는 물론 간곡히 만류한다. 그러나 만류를 하면 할수록 그것은 천자가 사의辭意를 하는 증거인 것이므로 언제까지고 마냥 우겨대지 않으면 안 된다. 현종은 결국 사의를 인정하고, 특별히 ‘노홍일이야말로 세상에 보기 드문 청결한 선비’라는 의미의 말을 장황하게 적은 조칙을 내려 간의대부 직을 유지한 채 산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이후 매년 쌀 100석과 비단 50필이 약값으로 그에게 배달된다. 더구나 향후 정치에 대해 느낀 점이 있으면 꼭 알려 달라는 고마운 의뢰와 함께 은거용 의복을 하사받고, 노홍일은 아쉬움을 남긴 채 조정을 떠났다. 바로 이것이 잘 다스려지는 치세의 아름다운 미담이며, 바로 이렇게 해야 문자 그대로 은일전隱逸傳에 나오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실 ‘은일전’은 이런 종류의 미담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처신은 도사 또는 은사가 된 사람이면 반드시 심득하고 있어야 할 것인데도, 이백은 이런 미묘한 사정을 전혀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꼭 천자를 도와주었으면 한다’는 형식으로 부른 것이므로, 면전에서 단호하게 ‘이제 그만 산으로 돌아가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천자 대신 주위 사람들은 이백에게 점점 짓궂게 굴고, 이백은 하찮은 간신 무리들이 자신과 천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보석에, 주위 사람들은 똥파리’에 비유한다. 그러면서 이백과 그 주변은 서로 상종하지 못할 사이가 되어 간다. 결국 천자가 약간의 돈을 주어, 이백을 장안에서 내쫓았다. 「고풍 - 37古風 三十七」의 일부는 그런 이백의 억울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내가 대체 무슨 죄가 있어,
조정에서 쫓겨나게 되었는가.
뜬구름이 황궁을 뒤덮어,
태양이 빛을 비출 수 없었네.
무수한 모래가 아름다운 구슬을 더럽히고,
무리진 잡초가 한 송이 꽃을 엉망으로 버려놓았네. (이원규 역)
위의 작품에서, ‘태양․구슬․꽃’은 천자와 이백 자신을, ‘뜬구름·모래·잡초’는 간신배를 가리키는 상투적인 은유다. 하지만 ‘도사 루트’를 따라 황실에 들어간 이백은 애초부터 황실의 대신이나 관료들로부터 존중받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므로 이백이 간신들의 시기와 모함에 더 견디지 못하고 장안에서 쫓겨났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44세에 장안에서 쫓겨난 이백은, 이후 젊었을 때 했던 것과 똑같은 ‘고등 걸식’을 하며 살았다. 젊었을 때와 다른 것이라고는, 가족과 함께였다는 점이랄까? 그러다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 현종의 두 아들인 형亨=肅宗과 린璘이 후계자 싸움을 할 때, 줄을 잘못 선 탓으로 역적이 되어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사면이 되었지만, 이백은 린의 막객幕客으로 있다가 화를 당한 55세부터 병으로 객사하게 되는 62세까지 처참한 말년을 보냈다.
성공해야 은일도 할 수 있다
맹호연·왕유·이백·두보·이하 등의 당대 시인들로 하여금 시를 쓰도록 만든 절대적인 힘은 회재불우懷才不遇다. 『당시감상대관』의 「이백」 편에서 뽑은 두 편의 시를 보자. 먼저, 「인생살이 어려워라行路難」.
푸른 하늘 같은 큰 길
나만 홀로 못 나간다
부끄럽구나 일찍이 장안의 시정배들이여
개부리기 닭싸움 밤과 배 내기만 하는구나
칼 치고 노래하며 괴로운 마음 달래고
왕문에 옷자락 끄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네
회음의 시정배들 한신을 비웃었고
한조의 공경들 가생을 피했건만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옛날 연왕이 곽외를 존중하여
비 들고 허리 굽혀도 싫어하지 않음을
극신과 악의는 그 은혜를 느껴
간과 쓸개 빼내어 재능을 바쳤다
소왕의 백골도 잡초 속에 묻혔으니
그 누가 황금 누대를 쓸겠는가
인생살이 어려워라
차라리 돌아가련다
다음은, 「선주 사조루에서 교서 숙운을 송별하다宣州謝朓樓餞別校書叔雲」.
나를 버리고 가버리는
어제의 날을 붙들 수 없고
내 마음 어지럽히는
오늘 하루 하고많은 번뇌에 휩싸인다
가을바람 만리나 기러기를 보내니
이런 때 높은 누각에서 술에 취하련다
봉래의 문장, 건안의 풍골
이 가운데서 사조의 글 맑고도 매서웁다
모두 뛰어난 흥취를 품고 세속을 날아
푸른 하늘에 올라 밝은 달 보려 했는데
칼을 빼어 물을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잔을 들어 시름을 없애도 시름은 더욱 깊어만 간다
인생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일 아침 머리 풀고 조각배 타고 놀리라
두 편의 시는, 재주를 가지고도 때를 만나지 못한 불우한 사대부 문인의 회재불우가 절절히 드러나 있다. 중국 시인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었던 ‘회재불우의 동력’은, 그 어떤 은거의 유혹 앞에서도 결코 지치지 않는다. 예컨대 이백은 「인생살이 어려워라」에서, 평소에 존경해마지 않았던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한 구절을 빌려 와 “인생살이 어려워라/ 차라리 돌아가련다行路難 歸去來」라고 맺고 있지만, 그는 귀거래 할 수 없었다.
호탕방일하고 탈속초연한 기풍이 넘치는 그의 사상은 도가에 더 기울었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행동으로 옮기고자 했던 정치참여의 정열(그것은 분명 유가적 태도이다)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그의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열망과, 세상을 버리고 자연에 돌아가겠다는 소극적인 은둔사상은 일견 양극의 모순같이 보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현실이란 거울에 비쳐진 그의 사상적 영상에 불과한 것이니, 현실이 맑고 밝으면 나서서 공명을 세우고, 이와 반대로 사회가 어둡고 부패했을 때는 과감하게 버리고 은퇴함으로써 내 한 몸이라도 깨끗하게 보존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중국 지식인의 태도이다. 이 시의 분위기는 후자 쪽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강에 배를 띄워 흥을 일으키고 자신의 현실에 대한 멸시감과 자유롭고 아름다운 이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김원중)
이백은 부와 지위에 대한 욕망이 극히 박약한 사내였다. 그가 추구해 마지않았던 것은 영광이며 명성이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은자가 되어서 아무도 모르는 산림에서 생애를 마치는 따위는 물론 논외였다. 그런 삶을 산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선 큰 공을 세워 천하 사람들에게 우레와 같은 찬양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제1단계다. 그렇지만 이백에게 더욱 소중한 것은, 그 뒤이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빈둥거리고 있는 것은 볼썽사납고 더구나 위험하다. 이백의 시에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으나 거기에 연연하다가 꼴사나운 최후를 맞거나 혹은 비명횡사한 역사상의 인물(그런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다)을 책망하고 비웃는 작품과, 영광의 정점에서 미련 없이 물러나 행방을 감춘 인물(이 쪽은 그리 많지 않다)을 찬미하는 작품이 많이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백은 물론 후자를 따를 생각이었다. 영광의 정점에서 횡하니 물러난다. 사람들이 놀라고, 잠시 뒤에 ‘아깝다! 그렇지만 얼마나 훌륭한가’ 하며 탄성을 지른다. 이백이 평생 추구해 마지않았던 것은 이 순간이었다. 그리고 앞선 영광이 빛나면 빛날수록 뒤의 효과가 커진다. 그 때문에 이백은 관리가 되고 정치에 참여하여 공을 세울 기회를 찾았던 것이다.(다카시마 도시오)
깨끗이 귀거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그런 과정이 없다면, 은일 도인이란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으며, 경전을 읽고도 성인이 될 기회가 없다는 것! 이것이 다카시마 도시오의 ‘출사와 은일’에 대한 또 하나의 얄미운 해석이다.
이백은 자신의 회재불우를 달과 술에 의탁했던 시인이지만, “여인과 소녀의 염원을 노래”(김원중)한 뛰어난 규정시의 작자이기도 한다. 「옥계의 원망玉階怨」·「원망怨情」·「자야오가-가을편子夜吳 秋歌」·「장간행長干行」 등은, 이백이 이 분야에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중국의 남성 시인이 여성 화자로 말하는 규정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는 여성 시인이 없던 시절에 남성 시인이 ‘입이 없는 여성’의 몫까지 도맡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중국 사대부들이 아주 잘 훈련된 ‘트랜스젠더화 된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충성을 바쳐야 하는 천자에 대해, 스스로를 수동적인 여성의 자리에 놓았다. 때문에 이백처럼 출세 욕망이 크면 클수록, 천자를 향한 뛰어난 충군시忠君詩와 여성 화자를 가장한 규정시를 누구보다 더 잘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백의 대표적인 규정시인 「장간행」을 감상해 보자. 내용은 같은 마을에서 소꼽친구로 지내다가 결혼을 했던 부부의 이야기다. 화자로 등장하는 상인의 아내는, 멀리 장사를 하러 떠난 남편을 그리며 무사 귀환을 바라고 있다.
내 머리가 막 이마를 덮었을 때
꽃 꺾으며 문 앞에서 놀았지요
당신은 죽마 타고 와서
난간을 돌며 청매로 희롱했지요
장간 마을에서 함께 살며
우리 둘은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어요
열넷에 당신 아내 되어
수줍어 얼굴 펴본 적도 없고
머리 숙이고 어두운 벽 향하고
천번 불러도 한번 대꾸도 못했지요
열다섯에 겨우 눈썹 펴고
생사를 함께 하길 바랐지요
언제나 기둥을 안는 신의를 지녔는데[노魯나라 미생尾生의 고사]
어찌 망부대에 오를 줄 알았겠어요
열여섯에 당신은 멀리 갔으니
구당은 염여의 돌로 가로 막혀[구당 협곡을 막은 암초]
오월이 되어도 배 갈 수 없고
원숭이소리 하늘에 슬피 울렸지요
문 앞에 당신 발길 끊기고
푸른 이끼 여러 번 돋았지요
이끼 짙어 미처 쓸지도 못했는데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졌어요
팔월에는 나비들 날아와
서쪽 동산 풀밭에서 짝지어 놀았어요
이 광경에 나는 속상해
시름에 겨워 곱던 얼굴 여위었어요
언제로 삼파로 내려오시면
미리 집에 편지 보내어 알려주셔요
길 멀다 탓하기 전에
곧 장풍사로 달려가겠어요
시 속의 아내는 소꿉친구였던 남편과 “열넷”에 결혼하고 서먹해졌으나, “열다섯”에 이르러서야 다시 부끄러움 없이 서로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남편이 “열여섯”에 대상隊商이 되어 집을 떠났다. 옛날에는 고속전철도 없고, 비행기도 없었다. 그래서 장사꾼이 한 번 돈벌이를 나가면, 몇 년씩이고 집을 비웠다.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대륙을 떠돌았을 것이다. 장사가 잘 안되면 본전 생각이 나서, 또 장사가 잘되면 그 재미로 돌아오기가 힘들었다.
아내는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한 집에서 “생사를 함께 하길 바랐”는데, 내가 어쩌다 “망부대[望夫臺: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된 바위]에 오를 줄 알았겠”느냐고 한탄한다. 가을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게 자연의 순리다. 하지만 팔월이 되어 “나비들 날아와/ 서쪽 동산 풀밭에서 짝지어” 노는 것을 보자, 시 속의 아내는 “나는 속상해/ 시름에 겨워 곱던 얼굴 여위었어요”라고 남편을 원망한다. 그렇지만 곧바로, 집 가까이 오게 되면 “편지 보내어 알려주셔요/ 길 멀다 탓하기 전에/ 곧 장풍사로 달려가겠어요”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직 사랑이 식지는 않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