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8일
쇼펜하우어의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원앤원북스, 2003)을 읽다
유명한 철학가의 주저 목록에도 없는 이런 류의 책은 위서를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헌책방에서 자주 보았던 이 책은 진짜 쇼펜하우어가 쓴 책이다. 그는 유고로 발견될 이 미발표 원고를 1830~1831년쯤에 썼다. 이 작은 논문은 『토론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육필 유고에서』라는 제목으로 1864년에 처음 빛을 보았고, 1991년 이탈리아어판 쇼펜하우어 전집의 편찬 책임자에 의해 편역되어 그해 이탈리아에서 15만 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성욱의 이 판본 외에, 김재혁이 번역한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고려대학교출판부, 2007)도 있다. 두 판본은 각기 장단점을 갖고 있으나, 여기서는 지적하지 않으련다.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은 논리학Logic와 토론술Dialektik을 동의어로 사용했지만, 쇼펜하우어는 두 개념을 새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논리학은 ‘선험적’이면서 ‘이성의 방식’을 따르지만, 토론술은 대부분 ‘경험적’이다. 왜냐하면 전자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고독하게 사고하는 형식인 반면, 후자는 항상 하나의 대상을 놓고 두 사람이 경합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바로 그 때문에 토론에는 순수한 이성이 아닌, 각자의 ‘인격’이 개입된다. 정리하면 이렇다.
내 생각 같아서는 ‘논리학’(이 낱말은 그리스어의 ‘숙고하다, 계산하다’와 ‘말과 이성’―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에서 왔다)은 ‘사고의 법칙, 즉 이성의 행동방식에 관한 학문’으로, 그리고 ‘토론술’(이 낱말은 그리스어의 ‘담화하다’라는 말에서 왔다. 모든 담화는 사실이나 의견을 전달한다. 즉 담화는 사실적史實的이거나 혹은 숙고적이다)은 ‘논쟁하는 기술’(이 낱말은 현대적 의미로 쓴 것이다)로 정의하고 싶다.(김재혁 역, 120~121쪽)
진리를 추구하는 논리학과 달리, “토론술의 원래 목적은 논쟁에서 이기는 것”(최성욱 역, 134쪽)을 목표로 한다.
쇼펜하우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몇몇 대목을 보면, 쇼펜하우어 자신이 대단한 논쟁가였던 모양이다. 그는 토론 당사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논쟁의 요령을 일반화하여 그것을 사용하거나, 그것으로 상대방의 요령을 물리치는 데 긴요하게 쓰일 수 있도록 이 책을 썼는데, 토론의 요령을 일반화하는 데는 쇼펜하우어 자신의 체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면 토론에서 이길 수 있을까? 도움이 되는 구석이 없지는 않다. 특별히 여기서는 38가지 방법 가운데, 쇼펜하우어가 “실제로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으면, 다른 기술은 모두 쓸모가 없다”라고 강조한 ‘동기부여를 통한 호소’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이 기술을 “비록 상대의 견해가 타당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상대에게 줄 수 있다면, 그는 실수로 뜨거운 쇳덩어리를 잡았을 때처럼, 얼른 자신의 견해를 내려놓게 될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이런 예를 든다.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부자가 증기기관이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영국의 기계생산 방식의 우수성을 옹호할 경우, 우리는 얼마 후에는 마차도 증기기관으로 대체될 것이고, 그러면 그의 목장에 있는 수많은 말들의 값도 폭락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시켜 주고,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살펴보면 된다.(최성욱 역, 22~23쪽)
이 기술의 요점은 상대가 내세운 주장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가 속한 직업이나 종파의 공동 이익에 배치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암시해 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요령에 ‘유용성을 통한 논증법’이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 방법이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결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지와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옳은 논리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논리가 자신의 이익을 훼손한다면, 인간은 언제라도 자신의 이성(‘옳은 논리’)을 취소하고 욕망을 택한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
이 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용사는 ‘뻔뻔함’이다. 기만과 억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수 있어야만 토론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요령에 따라 토론에서 이겨봤자, 그것은 그 ‘순간의 착시’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에는, 전자 기록 매체가 없었다. 때문에 이 책에 나오는 유용한 요령으로 한순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방송과 인터넷 등 전자 기록 매체가 예전의 기록을 무한히 되풀이 재생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뻔뻔함’은 오히려 놀림감이 되기에 알맞다(이 책을 통해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겠다는 사람은, 반드시 이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의 장점은 최성욱이 ‘옮긴이의 말’에 잘 지적해 놓았듯이, “‘토론술’이라는 테마를 통해 인간 본성의 문제점에 대해 함께 성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인용된 ‘유용성을 통한 논증법’은 아주 좋은 일례였다. 여기에 또 한 사례를 덧붙이자면, 쇼펜하우어는 토론의 최후 수단으로 등장하는 ‘인신공격’을, 기막히고도 절묘하게 인간 본성과 관련짓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으며, 이 허영심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 더 아픈 것은 없다. (바로 여기서 “명예가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라는 격언이 나왔다. 이런 허영심의 충족은 주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성취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주로 지력과 연관해서 생긴다.
문제는 이 지력이 논쟁 시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론에서 진 사람은 비록 그가 부당하게 진 것이 아니라고 해도,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 기술을 꺼내게 된다.(최성욱 역, 116~117쪽)
인간의 허영심과 분노는 모두 ‘너 아는 게 많아(너 머리 좋아)/ 너 아는 게 없어(너 머리 나빠)’에서 비롯한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것만은 참지 못하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 인신공격을 꺼내 든다는 것이다.
논쟁에서 이기고 싶은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38가지 기술은 모르더라도, 이 한 가지만은 꼭 알고 논쟁에 임해야 한다. 교사와 깡패는 ‘사람을 때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교사는 ‘가르치기’ 위해서 때리고, 깡패는 상대를 ‘병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때리는 게 다르다. 논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사람은 상대를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고, 깡패가 되어야 한다. 그만한 힘이 없거나 그게 싫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토피카』에서 했다는 충고를 따르는 게 현명하다.
아무나 상대로 닥치는 대로 논쟁을 벌이지 말고, 자신이 아는 사람으로서 결코 불합리한 것을 내세우지 않고 만약 그럴 경우 스스로를 창피하게 여길 만큼 충분한 분별력을 지닌 사람들과만 논쟁을 하라. 그리고 권위적인 명령이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논쟁을 하고 우리가 내세우는 근거에 귀를 기울이고 또 거기에 동의할 수 있을 만큼 분별력을 지닌 사람과 논쟁을 하라. 그리고 끝으로 진리를 높이 평가하고 비록 논쟁의 적수의 입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정당한 근거라면 거기에 기꺼이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 또 진실이 상대방 측에 있으면 자기 의견의 부당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과 논쟁을 하라.(김재혁 역, 114~115쪽)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 직후,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보면 100명 중에서 논쟁을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 될까 말까 하다는 결론이 나온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