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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웃기는 일이 천직인 사람이었다. 저 삭막하던 시대, 일자 눈썹 하나로 착해 빠진 한 남자를 무던히도 들볶으며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준 이가 그였다. 사람들은 그를 ‘순악질 여사’라 불렀다. 그의 장난기와 찰진 입담은 이 땅의 고단한 삶에 자그마한 위로가 되었고, 그가 내지른 한 마디 “음매! 기죽어!”는 한 시대의 유행어가 되어 서민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그러던 그가 엊그제 영등포경찰서로 출두를 했다. 출두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무척 떨리고 서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답답함을 토로했다.
여러분! 코미디언을 슬프게 하는 사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의 답답한 심경을 일기처럼 트위터에 올린 짤막한 글 하나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왔습니다.
지난 두 주 동안 입장을 바꿔서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
KBS가, 뭐가 그렇게 고소를 할 정도로 억울했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땅에서 코미디언으로 살아가는 일의 실존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듯 강변 어린 호소를 덧붙였다.
저는 제가 코미디언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를 제발 코미디언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제 꿈은, 평생 코미디언으로 사는 것,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며 사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 제발 저를 잃지 마십시오. 코미디언 하나 이렇게 키우기 어렵습니다. 저를 잃으면 손해 보시는 겁니다.
대체 뭐가 문제되었던 것일까? 무엇이 이 재주 많은 웃음꾼으로 하여금 이런 호소를 하게 만들었을까? 혹자는 그의 사생활을 후비고 든다. 이는 비겁하다. 그럴 권리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또 혹자는 전 정권 하에서의 ‘폴리테이너’ 이력을 문제 삼으면서 그의 이념적 편향성을 물고 늘어진다. 이는 무력하다. 이런 억측에 대한 반박의 근거를 그가 이미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정답일 것이다. 요즘의 우리에겐 사실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니까.
허나 이는 사건의 발단일 뿐 핵심은 되지 못한다. 핵심은 좀 다른 데에 있다. 내 생각에 그의 등에 꽂힌 ‘암전(暗箭)’은 두 방향에서 날아왔다. 그 하나는 KBS로 대변되는 권력 쪽에서다. 이 점에 대해선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가 않다. 김제동의 사례에서 목도한 바, 모진 것이 권력이니까. 그래도 이건 어지간히 견딜 만하다. 견디기 힘든 건 오히려 시민사회 쪽에서 날아온 화살이다. 이 점에 대해 혹자는 고개를 갸웃거릴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자신조차 의아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얼마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앞서 날아온 화살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본질적이니까.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이 사안에 즉하여 시민사회가 보이는 어떤 불편한 시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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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안의 표면적인 이유는 다음의 한 마디에 잘 드러난다. “저의 답답한 심경을 일기처럼 트위터에 올린 짤막한 글 하나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왔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일기로 쓴다는 것, 답답한 심경을 한 친구에게 메일로 보낸다는 것, 답답한 심경을 일기처럼 트위터에 올린다는 것, 이 세 가지 행위의 차이는 무엇일까? 문제는 의외로 이들 차이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애정 어린 충고를 한다. 그처럼 민감한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그처럼 민감한 사안을 트위터에 올린 건 섣부른 행동이었다고. 충고라면 적실하지만, 애정으로선 신뢰할 만한 애정이 아니다. 그래도 효용이 없지는 않다. 이 사안이 ‘트위터 손보기’와 무관치 않음을 말해주니까. 그렇다면 저들은 어떤 연유로 일개 미디어에 대해 손을 봐 주어야 했던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소통의 집중력과 확산력이 전례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과연 길들여질까? 길들여질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6월 2일의 오후는 참 대단했었다고. 트위터라는 미디어를 통해 디지털 유목민들이 빚어낸 사람의 사슬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어쩌면 ‘디지털 공화국(public.com)’이 만들어 낸 화엄법계의 인드라 망이었다고. 그건 분명 계몽주의 시대가 꿈꾼 공동체의 이상을 훌쩍 넘어선 것이었다고. 그건 어쩌면 저 동학의 시대 ‘포(包)’와 ‘접(接)’의 그물망(김지하)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그건 어쩌면 ‘거대한 전자두뇌’로 이루어 진 ‘천공의 성 라퓨타’(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트위터가 블로그 식 소통문법을 몇 단계나 진화시켰다는 점이다. 디지털의 바다를 떠다니는 항해사(navigator)들은 그날그날의 정보를 한데 모아 항해일지(web-log)를 쓴다. 이것이 블로그(blog)다. 그런데 이 일지는 정역학에 입각해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열람하기 전에는 ‘열리지 않는 책’이다. 일종의 창고가 되고 마는 셈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일촌’ 헤르츠의 주파수를 타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블로그의 생리학이다. 그런데 트위터의 생리학은 다단계 동역학이다. 여기에 트위터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적 성격이 드러난다. 거기선 위계가 존재한다. ‘퍼블릭 닷컴’ 상의 하이어라키, 즉 숙주-포자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팔로워(follower)다. 그런데 문제는 숙주-포자의 관계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짜라투스트라 지팡이 위의 뱀이 제 꼬리를 제가 물고 있는 것처럼.
그러니 저들의 ‘트위터 손보기’가 ‘전염’이나 ‘박멸’ 같은 단어에 입각해 있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저들은 분명 ‘창궐(猖獗)’이란 단어를 떠올렸을 테니까. 이런 의미에서 이 사안은 근대적 위생 담론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한 근대국가(nation-state)가 ‘디지털 유목민’들의 공화국에 대해 벌인 일 초식 광선검의 혈겁 같은 것. 그러니 한 코미디언의 ‘섣부른 행동’이 ‘국민국가라는 괴물’의 청결 강박증을 어찌 자극하지 않았겠는가. 가뜩이나 미운 털이 박힌 마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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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경로는 시민사회를 통해서다. 이 사안에 대해 시민사회가 보이는 무언의 불편함 말이다. 이렇게 한 번 물어 보자. 그가 백지연 같은 번듯한 앵커 출신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다못해 그가 대학 강단에라도 몸담고 있었다면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보자. 그는 코미디언이다. 코미디언은 사람을 웃겨야 한다. 그런데 그는 사람을 심각하게 만든다. 이것이 불편하다. 이것이 맘에 안 든다. 이 점은 나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웃음은 원래 심각한 것이 아닌가?
얼마 전 김제동의 강연을 들으면서 ‘사람을 웃기는 일’의 의미를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유머의 라틴어적 의미는 액체다. 고인 것을 흐르게 만드는 것이 유머라는 말이다. 이 말은 웃음 전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베르그송은 사람의 안면 근육 속에 항 부조리성 뉴런(neuron)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웃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모든 웃음은 발랄한 사물이 뻣뻣한 것으로 변하는 데서, 생생한 움직임이 기계적인 것으로 변하는 데서 발생한다.” 누군가를 흉내 내는 걸 보고 터지는 웃음을 생각하면 된다.
웃음은 위험하다. 이는 규율조직이 곧잘 발하는 한 마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빨 보이지 마!” 그러므로 모든 웃음은 비웃음이다(이런 식의 의미의 급전을 반훈反訓이라 한다. “亂은 治의 의미다”라는 경우가 그러하다). 웃음에 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론에서 라블레의 웃음론에 이르기까지, 몰리에르의 웃음론에서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이들 논의가 도달하는 결론은 이것이다. 웃음의 본질을 기성의 질서에 대한 ‘안티’라는 것. 그런데 이 ‘안티’가 그냥 ‘안티’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 부조리에 대한 인식의 계기와 이를 통한 회복의 계기가 뒷받침되어 있으니 말이다.
골계(滑稽) 역시 마찬가지다. ‘滑’이란 미끄러짐(滑)이자 어지럽힘(亂)이다. ‘稽’는 표준, 규칙, 장애, 우김을 의미한다. 따라서 골계의 본질은 규범을 어지럽히는 것, 같고 다름의 경계를 어지럽히는 것, 꽉 막힌 장애를 뒤흔드는 것, 동일화의 우김을 잡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골계는 수평적 혼란뿐 아니라 수직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골계는 돌제(突梯)다. 여기서 ‘突’은 파괴의 뜻이고, ‘梯’는 사다리, 즉 위계적 질서(階)의 의미이니, 한 사회의 기성적 위계질서를 혼란시킨다는 의미쯤 된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것이 혼란을 위한 혼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이 겨냥하는 대상은 가짜 질서, 가짜 화해이고, 이를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새로운 질서, 드높은 차원의 화해를 지향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혹자의 비유를 빌자면, ‘탈’을 쓰고 기성의 질서로 들어가 ‘탈’을 낸 뒤 다시 ‘탈(脫)’하는 운동(김진석)이 그것인 셈이다.
어지러운 얘기는 이쯤하자. 다만 이것만은 확인해 두자. 모든 웃음은 진지하고 심각하다는 사실 말이다. 이 전제 위에서 우리 시대의 웃음―〈웃찾사〉로 대변되는―의 의미와 우리 시대의 광대―코미디언으로 대변되는―의 실존성을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의 웃음은 얼마나 시퍼렇게 살아 있는가? 우리의 웃음꾼들은 얼마나 건강한가? 물론 그들에게 이런 요구치를 들이댈 수는 없다. 문화정책의 이데올로기와 문화시장의 논리가 엄연하니 말이다. 그래도 한 사람쯤 있으면 안 되는가. 있다면 그를 애지중지 보듬고 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 이제 솔직히 말하자.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불편함은 이런 것이었다고. 일개 코미디언이, 그것도 여성 코미디언이, 저녁 황금시간대 시사 프로를 진행하면서, 세상일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고담준론을 설파하고 있으니 불편하다고. 그래서 평범한 시민인 내가 마음이 편치 않다고. 왜냐고? 내 범용한 시민의식을 자꾸만 긁어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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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무리하자. 올 여름은 유난할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생각거리도 많고 공부거리도 많다. 하여 이런 시라도 한 수 삭히며 찜통의 나날을 건너가 보자. 맑아서 시퍼런 웃음을 떠올리면서. 한물갔어도 썩지 않을 사람을 떠올리면서.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 최승자, 「올 여름의 인생공부」 부분 ―
그리고 이 한 마디를 덧붙여두자.
순악질 여사, 악다구니로 버틸 것, 기죽지 말 것, 절대로,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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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