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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대목의 댓글에서 어떤 분이 이런 반문을 하셨더군요. “우리 안에 흐르는 피의 농도를 어떻게 하면 묽게 만들 수 있습니까?” 전들 어찌 우주적 역사(役事)의 오묘한 비밀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제 아이를 두고 ‘같은 집에 사는 타자’라며 주문을 걸어보지만 차가워야 할 이성은 번번이 혈관을 거치면서 불콰함을 면치 못하니 말입니다. 응당 물음이 던져져야 할 대목에서 ‘묻지 마’ 진실이 작동할 때, 이때 효과 만점의 약방문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며칠 전 김수영의 시집을 뒤적이다가 흥미로운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겐 근대국가를 모색하는 해방 공간에서, 그것도 전통 문화의 아이콘 공자(孔子)를 뒤집는 시도로 읽혔는데, 물구나무 선 공자의 입에서 나온 힘센 눈뜸의 언어는 혈관을 관통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합니다.
꽃이 열매의 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
(…)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事物의 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공자의 生活難」(1945)
그래서 이 서늘한 언어 위에 「나의 家族」을 한 번 올려놓아 보았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냐 /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할 때의 그 가족 말입니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不自然한 곳이 없는
이 家族의 調和와 統一을
나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이냐
— 「나의 家族」(1954)
흔히 이 대목을 두고 가족의 소중함 운운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초점이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난 해석입니다. 6.25를 전후한 당시의 처경이나 그의 룸펜적 기질이나 모더니스트로서의 정신세계에 비추어보자면 그렇단 이야깁니다. 이 대목은 얼핏 혹자가 말하는 ‘가족적 유사성’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가부장이라는 하나의 중심에 의해 구심화 된 그런 집합체가 아닌, ‘겹치고 교차하는 유사성들의 복잡한 네트워크’ 같은 ‘놀이’ 규칙 말입니다.
변호사님
문명사를 보다 보면 의외의 것에 눈길을 뺏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도형적 상상력 같은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신기한 건 동서를 막론하고 문명 초기 공동체의 기본형은 대개 원형이라는 점입니다. 물리적 차원에서든 심리적 차원에서든 대개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모종의 중심을 전제하기에 가능한 것인데,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왜 원은 중심이 하나일까요? 아니, 왜 우린 으레 원의 중심은 하나일 거라고 상상할까요?
그런데 중심이 둘인 원도 존재합니다. 타원이 그렇습니다. 고대 그리스 수학사에 벌써 타원이 등장하는 걸 보면, 사람들이 이런 기하학의 존재를 모르진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사람살이는 이 같은 비동심적 기하학으로는 심리적 평형을 이룰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중심이 몇 개씩 되는 원이 없으리란 법도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거나 상상하지 못할 뿐이겠죠.
‘閥’이라는 공동체의 기하학도 그랬습니다. ‘伐’이란 글자는 인신공양을 위해 과(戈)라는 무기로 사람 목을 베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閥’이란 사람을 희생으로 바쳐 제사를 드릴 때 여기에 참가할 수 있는 단위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제사 공동체인 셈입니다. 이것이 공동체로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배제와 축출을 통한 결속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이후 ‘伐’ 자가 토벌, 정벌과 같은 배타적 의미로 발전된 것은 이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뒤 유가 이데올로기의 토대가 되는 ‘家’ 역시 이런 방식으로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國’ 역시 ‘家’가 확장된 형태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훗날 맑스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 불렀던, 가부장(국왕)이라는 강력한 중심에 의해 구심화 되어 배제와 결속의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공동체 말입니다.
변호사님
예전에 어느 불친절한 선배가 느닷없이 이런 화두 하나를 던지더군요. 당시 기억으론 참 난해했는데, 지금 읽어봐도 여전히 난해합니다. 역시 김수영의 시 한 편입니다.
그녀는 盜癖이 발견되었을 때 완성된다
그녀뿐이 아니라
나뿐이 아니라 賤役에 찌들린
나뿐만이 아니라
여편네뿐이 아니라 안달을 부리는
여편네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새끼들까지도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의 새끼들까지도
그녀가 온 지 두달만에 우리들은 처음으로 완성되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 「식모」(1966)
참 어렵죠. 그래도 입에 침이 고이는 걸 보면, 뭔가 오묘한 이치가 옹알이를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혹여 이 시를 ‘가족의 탄생’에 관한 비망록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요. 그녀의 ‘도벽’으로 인해 ‘완성’된 ‘우리 가족’의 슬픈 내력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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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좀 이상한 데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앞서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족이 확대된 형태가 국가라고 말씀드렸는데, 보충이 필요할 듯 합니다.
외람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영포’까지는 못가더라도 그 언저리에서 물을 먹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경상도 식 아버지의 멘탈리티는 조금 압니다. 그때는 으레 그런 것이려니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나름대로의 문법이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의 시선에 비친 한 가장의 집안 경영방식이었으니, 넓게 보진 못했어도 맑게 보긴 했을 겁니다. 그 문법이란 이를 테면 이런 식이었습니다. 어떤 일에 즉하여 장기적이고 주도면밀한 생각이 서툽니다. 흥에 겨우면 말이 그냥 나옵니다. 토론이 필요 없습니다. 큰 목소리로 우기면 됩니다. 설령 틀렸다 해도 절대 인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당신의 생각대로 그냥 밀고 나가거나 당신 쪽으로 상대를 끌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많이 본 풍경 아닙니까? 지난 2년 여 간 청와대의 국정 운영에서 어린 시절의 우리 집안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렸다면,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여기에다 보통명사로서의 ‘고대 정신’이 가미되면 사태가 좀 더 복잡해집니다. 저 역시 변호사님처럼 안암동 언저리에서 십 여 년 젊은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라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다 메시아적 원리주의의 ‘원한(resentment)’ 의식과 자기 ‘닦달’이 덧대어지면 사태가 한층 더 심각해집니다. 몰두와 매진만 하다 보니 ‘절대 고독’이 결핍될 수밖에요. 그러다 보니 좀처럼 멈추어 서서 성찰하는 법을 모릅니다. 이것이 이번 정권 초기 구설수에 올랐던 ‘고소영’이라는 ‘금발의 야수’의 유전자 지도입니다. 적어도 제 눈엔 그렇게 보입니다.
변호사님
이즈음에서 노무현이라는 인물의 의미를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러 차례 이루어진 바 있지만, 문화적 차원에서의 평가는 아직도 미진한 것 같습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이제쯤 우리에게도 ‘87 체제’의 정치공학적 심급과 노무현 정권의 문화생리학적 심급을 한데 조망할 수 있는 여유 같은 것이 절실해지는 것 같습니다. 좌/우와 진보/보수라는 승산 없는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이는 대안적 진보의 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도 심각히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 같습니다.
집권 초기 그가 젊은 평검사들에게 “토론해 봅시다”하며 맞장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 우리는 얼마나 뜨악했습니까. 그리고 그의 입에서 생활자의 입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을 때, 우리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습니까. 하여 우리는 그를 향해 얼마나 많이 침묵과 자중과 근신을 요구했었습니까. 정치적 의제와는 별도로 적어도 청와대에 계신 문화적 아버지는 그래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자체만으로 그는 우리 안의 아버지를 저격하고 나선 계몽주의적 전사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이로 인한 불안이 집권 내내 심리경제의 위축으로 이어졌겠습니까. 실물경제의 지표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안의 이런 불안과 자기모멸이 그를 부엉이바위로 내몰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엉이바위는 일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노무현 식 ‘생계형 진보’의 아포리아가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바위는 중세의 황혼녘에 날개를 편 미네르바 부엉이의 고독한 둥지였습니다.
변호사님
이런 식으로 ‘우리 가족’은 ‘잃어버린 10년’을 메우며 다시 한 번 ‘완성’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새로운 리더십을 선택했고, 그 결과 우리네 문화생리학의 저울추도 어렵사리 평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의 일은 저도 잘 모릅니다. 아마 우리 모두가 목도하고 체험하는바 그대로일 겁니다. 공자님 말마따나 “仁을 구하다가 仁을 얻었으니 또 누굴 원망하겠습니까.(求仁而得人又何怨)”(『論語?述而』) 제 학생 한 녀석은 수업 시간에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더군요. “싸다, 싸!” 그냥 씁쓸히 웃고 말았지만, 암울한 중세의 황혼에도 인류는 이렇게 진보를 거듭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주석을 달아주었습니다. “진실은 당해보아야만 아는 법, 그 매서운 맛을.”(신용호, 『인간의 圓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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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님
애초엔 『삼성을 생각한다』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家國’의 문제로 새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성이라는 화두가 너무 크고 버거워서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일 겝니다. 어쩌면 어느 머리 좋은 계몽 군주가 나타나 삼성이라는 ‘家’와 대한민국이라는 ‘國’을 동종 교배하여 중상주의 시대로 역사를 되돌릴까봐 그게 제일 무서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수미산만한 이 화두를 제대로 대접할 기회가 없진 않을 겁니다. 그런 상서롭지 못한 예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으니까요.
저는 『삼성을 생각한다』가 본격적인 ‘삼성학’의 정립을 위한 시금석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특정 초일류 글로벌 기업에 관한 문제제기만도 아니고 당신 앞의 골리앗을 향한 돌팔매질만도 아닙니다. 이는 이 땅의 문화생리학에 관한 생생한 텍스트이자 우리 안의 골리앗에 관한 슬픈 비망록입니다. 제게 삼성은 이런 의미입니다. 물론 이 속엔 다양한 하위 디렉토리가 존재하겠죠.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국책사업 감으로도 손색이 없는 그 과제들 말입니다. 그러니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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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