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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었습니다. 참 쉽고 별반 낯설 것도 없는 내용인데, 왜 그리 잘 읽히지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이 시려서 그랬나봅니다. 저는 삼성과는 가전제품 몇 개 정도의 관계 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책의 내용이 저 같은 사람과도 무관치만은 않을 거란 생각이 독서를 어렵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그간 변호사님이 겪었을 고뇌와 번민, 고통이 곳곳에서 느껴지더군요. 참 힘든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것도 저 무시무시한 골리앗을 상대로 말입니다. 책 곳곳에서 전종훈 신부님의 한 마디가 실감나게 다가오더군요. “쪽 팔린다”는 한 마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좀 다른 맥락에서 읽었습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마주하고 있는 그런 느낌으로 말입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삼성은 변호사님의 말씀처럼 ‘그들만의 세상’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엔 왠지 ‘우리들의 삼성’이나 ‘우리 안의 삼성’이라 해야 할 어떤 세계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제가 속한 학계에서도 「삼성과 학계의 끈끈한 유착을 끊자」(김기원, 〈창비주간논평〉)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의외의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둘러싼 발화의 환경이 생각처럼 그리 녹녹하지가 않습니다. 목소리에 배인 조심스러움과 이를 바라보는 시선의 불편함,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학계의 현실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문득 공포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실체는 보이지 않는데 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그런 류의 공포 말입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이는 또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변호사님
오늘 외람되이 글을 올리게 된 것은 이런 문제들을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해서입니다. 변호사님이 드러낸 사실들 저 아래서 은밀히 작동하고 있는 거대한 진(陣) 같은 것, 그리고 이 진이 만들어내는 소리 없는 진법 같은 것, 이것들의 문화사적 맥락을 한 번 캐물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소 이야기가 세상 물정을 벗어나 서생의 관념세계를 맴돌더라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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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재벌(財閥)이라는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학벌, 족벌, 군벌 등 소위 ‘벌(閥)’ 패밀리의 일원인 그 단어 말입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외국의 경제학 사전에서도 이 단어는 그냥 ‘재벌’로 발음되는 모양입니다. 그만큼 ‘재벌’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업조직은 아니라는 거겠죠.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정의가 되어있더군요. “거대 자본을 가진 동족(同族)으로 이루어진 혈연적 기업체군”(『두산대백과사전』) 메가톤급 파장을 지닌 단어의 정의치고는 너무 인색하고 단출합니다. 그래서 서늘한 행간을 약간 복원해 보았더니 대충 이런 정도의 의미가 가능해지더군요. 재벌, 자본주의가 동아시아 사회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적 문화 토대와 기형적으로 결합해서 만들어 낸 가부장적 기업조직.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IMF 사태 때 세계 자본시장이 요구한 첫 번째 항목이 바로 ‘재벌 해체’였습니다. 이 요구 앞에서 우리가 받은 충격과 당혹감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을 해체하라는 요구가 따로 없었으니 말입니다. 국민 정서의 입장에서야 재벌 없는 한국 경제는 상상조차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국제 자본시장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생명줄 같은 돈을 빌린 마당에 어떤 형태로든 성의는 보여야 했고, 성의를 보이는 과정에서 애꿎게 희생양이 된 것은 ‘세계 경영’의 깃발을 날리던 한 재벌이었습니다. 털어보면 그 정도 먼지 안 나는 기업이 없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고스란히 우리 ‘아버지’들의 몫으로 돌아왔습니다. 길거리로 내몰린 축 처진 어깨의 그 사내들 말입니다.
혹 변호사님께서도 기억을 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때 우리의 염장을 지르고 나선 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일본계 미국 지식인이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에 환호하면서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고 나섰던 그가, 이번엔 세계체제의 한 모퉁이에서 파산 직전에 놓인 한 국가를 향해 이런 발언을 날린 것입니다. “IMF 사태는 한국의 입장에선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
시간이 좀 더 지난 뒤에야 안 일이지만, 그의 지적이 옳았습니다. 미처 그걸 돌볼 여력이 없었을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는 정치경제학적 차원의 요구가 아니라 문화적 차원의 요구였습니다. 그러니까 ‘글로벌 스탠더드’에 준하는 투명성과 ‘신용’을 차제에 확립해야 한다는 게 그 요체였는데, 문맥을 따지고 보면 한국적 문화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갈아엎어야 한다는 요구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게 어디 순순히 들어줄 수나 있는 요구였겠습니까. 어쨌거나 이로부터 새삼스레 주목을 받게 된 것 중 하나는, 우리 문화의 한 축을 구성하면서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고 있는 시간의 운동양식, 즉 핏줄로 이어지는 한국적 시간의 끈질긴 지속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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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님
혹시 ‘지속의 왕국’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동아시아 문명(특히 중국문명)의 시간적 운동양식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헤겔이 썼던 말입니다. 그의 눈에 유럽적 시간은 성찰적이고 반성적인데 비해 동아시아적 시간은 덜 성찰적이고 덜 반성적인 것으로 비춰졌던 모양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래서 유럽 문명이 동아시아 문명보다 우월하다는 논지입니다. 이런 식의 정신 현상학은 맑스나 맑스 베버 같은 후배들의 담론 속에서 계통발생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의 계보를 형성하게 되는데, 지금 입장에서 검토해 봐도 새겨볼 대목이 없진 않습니다.
이 ‘지속의 왕국’에 후쿠야마 식의 축복론을 올려놓고 보면 이런 물음 하나가 가능해집니다. 아버지가 한 조직의 총수라는 사실과 그 아들이 아버지의 권력을 당연하게 승계하는 일이 어떻게 하나의 사태로 연결될 수 있는가? 이 민망하고도 불편한 질문의 무게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근대 유럽 합리주의 문화의 첨병이었던 교회조차 이 땅에 상륙한 뒤 ‘세습’이라는 올가미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정도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헤겔 식의 ‘덜 성찰적이고 덜 반성적인’ 시간성이란 결국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피의 진실, 핏줄을 통해서만 이어지는 ‘묻지 마’ 진실.
이 진실을 둘러싼 수많은 말 가운데 ‘불초자(不肖者)’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 ‘부모님 전상서’ 하던 편지글에서 ‘불초소자’ 운운할 때의 그 ‘불초’ 말입니다. 응당 닮아야 할 부모를 제대로 닮지 못했으니 허물이 적지 않다는 뉘앙스의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는 그냥, 순순히, 아무 생각 없이 닮아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효였고 그것이 사람의 도리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이 버젓이 경전에 자리하고 있었겠습니까. 임금이 잘못할 경우 세 번 간(諫)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떠난다. 아버지가 잘못할 경우 세 번 간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대로 따른다.
이 대목을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가적 패밀리즘의 형성에 관한 역사적 고찰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다 패밀리의 중심인 중세적 아버지가 근대적 아버지로 옷을 갈아입는 과정이나 이 아버지를 제대로 죽이지 못해 제대로 살릴 수 없었던 근대의 속사정에 대해서도 부연설명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역시 미루어두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핏줄로 이어지는 지속성 위에 에버랜드 사태 같은 것을 얹혀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인지상정의 차원에서 많은 것이 이해의 폭으로 들어옵니다. 이 일을 둘러싸고 삼성 일가가 보인 눈물겨운 노력이나 초일류 글로벌 기업에서 노조 하나 만들지 못하는 어이없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문화적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 수 없는 마당에 노조 결성 운운 하는 것이 대체 가당키나 한 이야기겠습니까.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고차원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외로 단순한 데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안에 흐르는 피의 농도를 어떻게 하면 묽게 만들 수 있을까? 이 낡디 낡은 문제 말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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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