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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괴물』을 보다가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랐던 것은, 한 가족의 사투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어쩌면 퇴치가 불가능할 지도 모르는 괴물의 존재성과 위력 때문이었다. 봉준호는 이런 해석에 마뜩찮아 하는 모양이지만, 영화를 잘 모르는 나는 한국적 근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 영화를 읽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강에 사는 그 괴물은 ‘한강의 기적’이 만들어낸 ‘우리 안의 타자’였다. 이 괴물은 한국적 근대의 모든 아이콘―이를 테면 화염병과 쇠파이프와 양궁―이 총동원되어도 퇴치되지 않는 ‘존재하는 부재’ 내지 ‘부재하는 존재’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까지 강두는 자꾸만 한강을 두리번거린다.
7월의 한강에서 『괴물』을 다시 떠올린 것은 송강호를 닮은 매점 아저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날, 용산 미군기지 하늘 위로 독립기념의 불꽃이 수를 놓던 그 저녁에도 ‘우리 안의 타자’는 여전히 거기서 건재한 듯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제도 속에서, 관념 속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일상 속에서 괴물은 그렇게 개체발생과 계통발생을 되풀이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나와 당신 자체가 이미 괴물의 일종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고 보니, 요 며칠 내 눈에 비친 몇몇 풍경이 한 두루미로 죽 꿰어지는 거였다. 이런 사소한 풍경들 말이다.
【풍경 하나】
한강 고수부지. ‘한강 르네상스’의 총아 일직선의 자전거 도로는 다지류(多肢類) 괴물의 천국이다. 거기서 자전거를 탈 때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군장이 필수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건 충분조건이다. 여기에다 한 무리 대오까지 이루면 금상첨화다. 거기서 행여 휘파람이라도 불며 살랑대는 바람과 노닥이는 건 규칙 위반이다. 노동하듯 사무치듯 페달을 밟아야 한다.
【풍경 둘】
양재천. 청계천이 묻지 마 공학의 사생아라면, 양재천엔 사람을 감싸는 자본의 미학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삼성이 무섭다. 거기서 산보자는 소요유(逍遙遊)를 꿈꾸어선 안 된다. 거기서 계급은 여인네의 피부 위에 각인되지만, 연령은 몇 마디 귀동냥으로 어림해 볼 수 있다. 학원, 유학이면 30대, 부동산이면 40대, 결혼이면 50대. 거기서 산보자는 대개 로보캅이 되지만, 그 가망 없는 팔놀림엔 열량 소모 이상의 이데올로기가 감추어져 있다. 고독과 원한, 이것이 이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것이다.
【풍경 셋】
사당역 금요일 밤 열두 시. 주말 새벽산행을 떠나는 관광버스의 대열. 출발 전 장비 점검이 한창이다. 그 분위기는 아무리 봐도 자연과의 교감을 꿈꾸는 자의 설렘이라기보다는 출정을 앞둔 병사들의 다짐과 긴장에 가깝다. 다시 주말 관악산 매표소. 광장엔 나부끼는 깃발들. 거기서 군상들은 ‘同’으로 헤쳐 모였다가 산으로 긴 행렬을 이룬다. ‘화이부동(和而不同)’과는 거리가 먼 ‘동이불화(同而不和)’의 ‘同’. 동향, 동문, 동창, 가끔은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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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이 익숙한 타자들을 다시 만난 것은 『산해경(山海經)』에서였다. 옛사람들의 세계 박물지도 속에서 괴물들은 이미 그렇게 군거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우리 시대 괴물의 유전자 지도가 이미 이 박물지도 속에 매핑(mapping)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아래 도표는 그중 몇 개만을 추려 특성을 모아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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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절(肢節)에 뼈를 세우고 살을 입혀 전체를 한 번 결합해 보면 어떤 모습이 될까? 내일은 우석훈의 『괴물의 탄생』을 읽으며 이 울트라 괴물의 계보학을 한 번 더듬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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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