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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난 지 며칠이 되지도 않았는데, 월드컵의 열기 속에 세상은 이리도 천하태평입니다. 형. 근황은 어떠신지요?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졌을 그 속을 모르지 않건만, 이 아침 지난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형의 안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일면식도 없고 진보와도 거리가 먼 제가 이렇게 서신을 올리게 된 것은, 이제쯤 형이 흘린 눈물을 의미를 냉정하게 한 번 짚어봐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념에서입니다. 그 눈물에 대한 정치공학적 분석은 이미 몇 차례 이루어진 바 있고, 저도 몇 편은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107인 선언’의 의미와 한계에 대한 지적, ‘5+4 반MB연합’의 맹목성과 불가피성에 대한 분석, 그리고 형의 사퇴를 둘러싼 제반 논의들 등등, 만시지탄의 감이 없진 않지만 적실하고 예리한 통찰들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이들 분석에 입장 하나를 덧보탤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제 지적 형편이 그러하거니와 제 공부의 영역이 이를 허락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껏 드릴 말씀이라야, 제 나름의 방식으로 형이 흘린 눈물을 의미를 곱씹어 보려는 데 불과합니다. 억지로 의미를 갖다 붙이자면, 진보정치인 심상정의 울음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 정도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게 도리일 듯싶습니다. 외람된 호칭, 존경과 애정의 표현이니 혜량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중성적 만다라를 꿈꾸었던 저 시대, ‘형’이라는 한 마디에 담긴 우주의 크기가 결코 만만하진 않았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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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진보정치의 길을 묻는 어느 인터뷰에서 형은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이번 선거는 촛불에너지가 선거와 만난 것이다. 촛불은 기존 정치구조를 뛰어넘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경직된 보수 세력, 가치와 비전이 소진된 민주당, 소수파에 머물러 있는 진보정치 세력을 뛰어넘는 그런 정치에너지가 바로 촛불이다. 촛불은 민주주의와 더불어 사회경제적 기본권에 대한 요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촛불에너지는 이명박 정권 심판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제기한 의제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더 나갈 것이다. 진보정치는 촛불의 에너지와 굳건히 손을 잡아야 한다는 인식이 이번에 ‘엠비 심판’을 요구하는 민심으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한다.(<한겨레신문> 2010. 6. 15)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지방선거를 분석한 대부분의 글에서 공동의 지반 같은 것이 감지된다는 점입니다. 형의 분석 역시 이 암묵적 지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건 이를 테면, ‘6·2’ 지방선거를 ‘민심의 승리’로 해석하면서도 정작 어떤 수준의 어떤 민심인지에 대해선 줄곧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침묵은, 민심을 순수하고 자기완결적인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초월론적 낙관주의와도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맹자님 말씀처럼 우리 시대의 민심도 여전히 천심인 걸까요? 촛불은 입김에도 흔들리고 잔바람에도 춤을 추는 그런 ‘카오스모스(chaosmos)’적 사태가 아닐까요? 그러니 이를 ‘창문 없는 단자(monad)’처럼 진공 포장해 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제쯤 보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민심에 대한 성찰 같은 것이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닐까요?
진보진영의 입장에서 물론 이 점을 의식하지 않았을 리 만무합니다. 다만 정치공학적 현실이 이를 허락지 않았던 것이겠죠.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이런 곤혹이 여실히 읽혀지니 말입니다. “민주개혁세력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민심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어디까지 성찰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진보의 미래』란 책에서 일정 부분 성찰을 했는데,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건 노무현 대통령의 ‘나를 밟고 진보로 가라’는 주문이라고 본다.”
이 대목에서 진보 담론의 계몽적 성격이 드러나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민심의 요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점입니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을 두런거리고 있는 어두운 소리, 그 욕망의 밀어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태 말입니다.
이런 변화와 맞물려서 이웃이 사라진 욕망의 경제가 소비사회의 시민적 영혼의 심장을 대체했다. 이런 욕망의 경제 아래 사회적 배제 현상은 이웃에 대한 망각을 통해 견고해졌다. … 민중은 존재하지만, 시민사회는 그들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다.’ … 하여 과학주의 담론으로 채색된 천안함 서사를 퍼뜨린 정부를 시민사회가 지지하지 않은 것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신냉전주의가 시민적 욕망의 경제를 훼손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한 가계부채에 대한 심리적 안전망인 부동산 거품은 지구화 시대를 맞아 작은 파도에도 심하게 동요한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독주에 제동을 건 시민의 선택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게 아닐 수 있다. 탐욕을 분출시키려 경쟁하는 정치는 파행화된 정치만큼이나 시민사회를 오염시켜 놓았기 때문이다.(김진호, 「분출하는 시민적 욕망이 위험하다」, <한겨레신문> 2010. 6. 15)
‘몰가치와 동거’를 꿈꾸는 ‘시민적 욕망’, 이 욕망을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우리 안 저 깊은 곳에서 아프게 확인한 바 있습니다. 특히나 저 같은 ‘386’ 세대의 입장에서 이를 인정하는 데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핵심에 바로 저희 세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한 걸음만 내디디면 중산층 저 안온한 보루로 들어설 것 같은데, 그러니 욕망의 바다로부터 울려 퍼지는 사이렌의 노래에 어찌 귀를 막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주식이며 펀드며 사교육이며 부동산이며 재개발 등등등, 그 떨칠 수 없는 고혹적 선율 말입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MB’라는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우리 안의 욕망구조가 합성해 낸 보통명사였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역시 외계로부터 온 에이리언이 아니라 우리 안 깊은 곳에 존재해 온 카프레 섬이었습니다. 그 매혹의 선율에 영혼을 맡기는 순간, 한때 우리가 꿈꾼 대시민의 이상은 소시민적 욕망으로 급전했고, 이내 그것은 보다 세련되고 노회한 방식으로 ‘창조적 진화’를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배어나온 실존적 슬픔의 한 자락을 우리는 엊그저께 새벽 박주영의 골 한 방으로 바겐세일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지방선거는 어떤 의미에선 ‘민심의 승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시민적 욕망’의 자기 학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성찰과는 아직 거리가 먼, 우리 안의 ‘트랜스포머’가 부린 섣부른 자기 학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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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이런 이야기가 문제의 본질을 지나치게 내면성의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형의 눈물이 제 가슴에 닿았던 대목이 바로 이 어름이었으니까요.
형.
적당하다는 건 어떤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웬 뜬금없는 이야기냐고 하시겠지만, 전 요즘 이 질문이 자꾸 머리를 맴돕니다. ‘시민적 욕망’의 자기 성찰이라는 차원에서도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 같기도 하구요.
역사를 공부하는 선생님께 귀동냥을 해 보니, ‘proper’라는 말이 있었더군요. ‘적당한’, ‘타당한’ 할 때의 그 ‘proper’ 말입니다. 알고 보니 이 말은 중세적 위계질서의 산물이더군요. 이 질서가 정연히 작동되던 시대 특정 가문, 특정 개인은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를 테면 어떤 가문이 자신의 상징이나 문장(紋章)을 만들 수 있는 권리, 어떤 개인이 교회의 앞좌석에 앉을 수 있는 권리 등등을 일러 당시엔 ‘적당하다’, ‘타당하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이 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들 가문이나 개인의 공공적 책임이 전제되어야 했습니다. 이러던 것이 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어 전통적 질서가 붕괴되면서 이 단어에 내포된 정신적 내용은 휘발해 버리고 물질적 내용만 남게 된 모양입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요즘 우리가 쓰는 ‘property(재산)’라는 말이라는군요. 삭막한 말이 되어 버린 거죠.
그렇기는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자기 규제 원리는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노모스(nomos)’가 바로 그것인데, 시장이라는 살벌한 ‘게임의 법칙’이 그나마 이것 때문에 지탱될 수 있었다는군요.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내 돈 내가 쓰는 데 누가 뭐라 그래!’라고 하지 않을 수 있는 고상함, 알짜배기 땅에 관한 ‘비급’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투기를 삼갈 수 있는 고결함 같은 겁니다. 참 어려운 거죠. 한국적 천민자본주의가 배우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인데, 우리 시대의 가난이 이것의 결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이제쯤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순연한 공감의 연대(common-sense), 이 인지상정의 ‘노모스’야말로 민심의 참된 바탕일 터인데, 우리네 민심에 이것이 얼마나 튼튼히 밑받침되어 있는지 솔직히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는 분명해 지는 것 같습니다. 이 바탕의 회복이 진보정치의 의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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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을 뒤적이다가 복괘(復卦)에서 한동안 눈길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회복’, ‘복귀’, ‘복원’ 할 때의 그 ‘복’ 말입니다. 맨 아래 양효(陽爻)가 깔려 있고 그 위로 다섯 개의 음효(陰爻)가 중첩되어 있는 이 괘는, 대지의 중심 저 깊은 곳에서 우레가 나직하게 요동을 준비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동짓달을 의미하고 새로운 시간의 출발을 알리는 이 괘를 통해 옛사람들은 ‘천지의 마음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돋아나는 시간의 새살을 보았던 거죠. 집현전 학파의 일원이었던 정인지가 이 말을 받아 ‘곤복지간위태극(坤復之間爲太極)’이란 주석을 달았던 걸 보면, 이 괘의 무게가 그리 만만치는 않았나 봅니다. 음효만 여섯 개인 곤괘와 양효가 바탕에 하나 돋아난 복괘 사이, 바로 이런 동세와 추이를 세계의 본질로 삼는다는 의미이니 말입니다.
이 괘의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희망이란 것도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루쉰(魯迅)의 글 한 편을 떠올렸습니다. 「복수(復讐)」라는 제하의 글인데, 근대 중국의 민심을 향한 루쉰 식 복수 전략입니다. 그런데 이 복수라는 것이 단순한 보복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꽤나 복잡하고 미묘한 우주 위에 얹혀져 있습니다. 되갚음으로 되감고 되감음으로써 되돌리는 그런 운동의 궤적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괘의 동세와 추이를 실상(實相)의 차원으로 전유한 것이 이 글인 셈입니다. 좀 길긴 하지만 일부만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벌거숭이가 되어 손에 날카로운 칼을 들고 광막한 광야에 맞서게 된다.
그들 두 사람은 바야흐로 포옹하려 하고 바야흐로 살육하려 한다…
통행인들이 사방에서 모여든다. 덕지덕지 떼 지은 털벌레가 담벽을 기어가듯이, 또는 개미떼가 마른 생선 대가리를 떠메고 가듯이. 입고 있는 것은 모두 아름다우나 손은 비어 있다. 그러나 사방에서 모여들어 마음껏 고개를 쳐들어 이 포옹과 살육을 감상하려 한다. 그들은 미구에 그 혀가 맛보게 될 땀, 혹은 피의 생생한 맛을 미리부터 예감하고 있다.
그들 두 사람은 광막한 광야에 벌거숭이가 되어, 손에 날카로운 칼을 쥐고 마주선다. 그러나 포옹도 하지 않고 살육도 하지 않는다. 아니 포옹이나 살육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들 두 사람은 영원히 그대로 있다. 생기에 넘치는 육체가 시들어 간다. 포옹 혹은 살육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통행인들은 지겨워하기 시작한다. 지겨움이 그들의 털구멍으로 스며드는 듯해지고, 지겨움이 그들 자신의 마음에서 털구멍 밖으로 기어 나와 광야에 번지고 또 타인의 털구멍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리하여 그들은 목과 혀에 갈증이 일고 목이 아파지게 된다. 나중에는 얼굴을 마주 보며 하나씩 둘씩 흩어져 간다. 마치 생기를 잃을 때까지 갈증에 시달림을 받은 것처럼.
이리하여 광막한 광야만 남는다. 더구나 그들 두 사람은 벌거숭이가 되어 손에 날카로운 칼을 쥐고, 고갈된 채로 계속 그 자리에 버티어 서 있다. 송장 같은 눈빛으로 통행인의 고갈과 무혈의 대살육을 감상하면서 생명이 비약하는 극치의 대환희로 영원히 빠져들어 간다.
이 글에 대한 구구절절한 해석은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80년이 더 지난 글이지만, 삭지 못해 즙이 되어버린 글이니 말입니다. 이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야기 속 저 무료한 군중에 ‘라이방’을 씌우고 ‘가스통’만 들리면 ‘지금, 여기’ 벌떡 되살아나는 글이라는 점 말입니다. 제대로 미워해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제대로 죽여야 제대로 살릴 수 있다는 것, 루쉰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형. 이런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복수는 어떨까요…
위 그림을 복괘의 이미지 위에 포개보면 묘한 오마쥬가 생성됩니다. 별들이 운행하는 광야에 두 사람이 마주서 있는 모습, 이 모습을 보다가 문득 진보정치의 현실을 여기에다 투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답이 나오더군요. 기왕 노회찬 대표께서 첼로의 활을 잡으셨으니 이제 형은 칼을 드십시오. 그리고 민노당 대표로 이정희 의원이 유력하다 하니 형이 꼭 끌어안으십시오. 음양이 그 집에 서로를 감싸주고(互藏其宅), 무기와 악기가 서로를 갈마드는 그런 지경, 저는 형의 눈물이 이런 지경에서 되살아 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절망이 이런 수준까지 바닥을 치지 못하면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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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옛글 한 편이 떠오르는군요. 당나라 장안(長安) 정치의 아웃사이더였던 한유(韓愈)가 정치적 동지 맹교(孟郊)의 초라한 출사길을 위로하며 쓴 글 입니다. 넉넉한 재능을 품었음에도 세상이 이를 알아주지 않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한유는 이런 언어로 시작합니다.
대개 만물은 평정을 얻지 못하면 운다
초목은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면 울고
물은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휩쓸면 운다
그 솟구침은 무언가 그걸 부딪기 때문이고
그 치달음은 무언가 그걸 막았기 때문이며
그 들끓음은 무언가 그걸 데우기 때문이다
금석은 소리가 없지만 무언가 그걸 두드리면 운다
사람의 말 역시 이러하니
부득이한 것이 있고난 뒤에야 말이 있게 되는 것이다(…)
무릇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하나같이 가슴에 맺힌 바가 있어 그런 게 아니겠는가!
(「맹동야를 보내며(送孟東野書)」 부분)
자신보다 17살이나 어린 후배의 격려에 대해 맹교가 보인 회음(回音)을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요즘 들어서야 ‘불평즉명(不平則鳴: 평정을 얻지 못하니 운다)’이란 이 말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내면의 리듬과 균형과 평화가 깨어지니 당연히 울음이 터지겠지요.
형.
만유의 소리, 만물의 울음과 더불어 나아가고 흘러가고 돌아오는 우주는 어떤 우주일까요? 우리 진보정치의 우주가 이런 우주와 만나는 날은 불가능한 걸까요? 하여 진보정치인 심상정을 시대를 위해 ‘가장 잘 운 자’로 기억할 그런 날은 올 수 없을까요? “불가하단 걸 알지만 그래도 해 볼 수밖에 없겠죠.(知其不可而爲之而已)” 그래야겠죠.
용맹히 일어서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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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