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네(Marcel Granet)라는 학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사천 몇 백 년 전 황하 유역의 어느 마을에선 이상한 회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9년마다 한 번씩 열린 이 회의는 지금의 관점에선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로 따지면 여의도에서 열린 국정감사의 주요 현안이 말과 글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를 감찰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我’라는 글자는 도끼를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이것을 ‘나’라는 의미로 끌어다 쓰기 시작했다. 이에 ‘我’를 놓고 ‘도끼’와 ‘내’가 연관이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것이 정합한지 여부를 따지고 교정하는 것이 이 회의의 주요 내용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입장에선 다소 낭만 어린 풍경이지만 당시 상황에선 공동체의 존립을 좌우할 만큼 심각한 사안이었던 모양이다. 사람의 말이 말을 듣지 않게 된 것도 얼추 이 무렵의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뇌 용량이 제법 넉넉해지면서 이 아름다운 회의에 대한 기억도 점차 가물가물해졌다. 그리하여 말들은 춤을 추게 되었고, 말과 사물의 괴리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동네 골목에선 꼬마들의 목소리를 타고 이런 말놀이까지 유행할 정도였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높은 것은 백두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인간의 사특한 숨결이 졸지에 원숭이 엉덩이를 태극기로 만들고 말았지만, 이런 널뛰기의 위험성에 대해 누구 하나 문제시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살이란 의미론적 도약의 산물이 아니겠냐는 거였다.
이런 식으로 말들의 널뛰기는 한층 높이를 더해 갔다. 그 원흉은 ‘~는 ~다’라는 신종 발명품이었다. 아무 관련도 없는 두 사물에 이 요물을 들이대기만 하면 어느새 신작로 하나가 시원하게 뚫리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 할 일들이 속출하게 되었고, 급기야 이런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 마을 사전에서 ‘어항’은 ‘완상용 물고기를 기르는 데 쓰는 유리 항아리’였다. 그런데 이 말을 멋대로 쓰다 보니 어느새 ‘큰 강’이 되고 말았다. 논리인즉슨 ‘맑은 물에서 물고기가 살 수 있는’ ‘큰 어항’이 곧 강이라는 거였다. 이에 삽질 난무하던 강변에선 우레 같은 탄성이 일었고, 이로부터 우리의 사전도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수족관’이란 말이 엄연히 있었는데도 말이다. 때는 바야흐로 시의 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선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을 일러 ‘천재의 표징’이라 했으니, 이른바 「어항론」을 한 편의 시라 한들 문제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전직 성균관 관장의 문장이었으니 그 묵향이 오죽했으리. 하지만 본격 시가 되기엔 아직 뭔가가 어설펐다. 아마도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학문에 깊이 침잠해있었던 탓이리라. 그런데 시라는 것의 원래 효용이 경세제민의 수준을 훌쩍 넘어서 있었던 모양이다. 그 신통함이 하늘의 여론마저 흉흉히 만들 정도였다니 말이다.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이 소식을 다섯 글자로 단출히 전한다. “詩成泣鬼神(시가 생겨나자 귀신이 흐느꼈다.)” 하늘의 입장에서야 심히 억울한 일이었겠으나 사람의 관점에선 일대 개가였으니 이로써 인간의 세계 경영은 한층 탄력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얼마 전 또 한 분의 시성이 이 땅에 출현해 고전주의 시학의 시대를 난데없이 알렸다. 그는 세계 경영 대신 국정 운영의 고삐를 잡았다. 그의 붓은 한양의 종이 값은 물론이고 우리의 ‘국격’마저 대번에 드높여 놓았다. 하지만 우리의 시성은 귀신을 울리는 대신 사람을 웃기고 말았다. 그 압권은 「‘좌파교육’이 ‘아동성범죄’에 미치는 색상학적 고찰」이었다. 유려한 언어에 문장을 휘감는 ‘포스’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독자들은 일시에 넋을 잃었고 빛나는 상상력의 내원을 추문했지만 시인은 끝내 눈을 감은 채 염화시중의 미소만 흘릴 뿐이었다. 시인은 작품으로만 말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 미소에 속편이 예고되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좌파주지’를 다룬 속편은 이 땅의 불심을 술렁이게 만들면서 이른바 ‘식(識)’ 논쟁을 촉발시켰다. 표적이 된 ‘좌파주지’는 십여 차례 만남에서의 안면식(眼面識)을 주장했지만, 시인은 “잘 알지 못한다”는 말만 남긴 채 예봉을 아라야식(阿羅耶識)으로 떠넘겼다. ‘부자 절’의 창고엔 좌파의 종자가 함장되어 있다는 거였다. 애초부터가 산문과 시의 대결이었고 분별심을 ‘총체적 망각’의 아우라(aura)로 에워싸는 형국이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셈이었다.
혹자는 언어를 일러 ‘존재의 집’이라 했거늘 어쩌다가 사람의 구업(口業)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필시 사천 몇 백 년 전의 봄날도 지금처럼 혀 비린내가 진동했으리라. 최근 시인은 용맹정진 ‘묵언수행’에 들어간 모양이다. 작품구상 노트에 깨알같이 적어둔 ‘말조심’ 약속을 스스로 지키지 못한 회한 때문이리라. 수행을 풀고 운수행각에 나서는 계절이 오면 또 어떤 대작이 나올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몹시 두려울 따름이다. 제발 석가모니 좌파설 만은 아니기를… 그래서 지금 ‘가난한 시대의 시인이 지켜야 할 율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는 것이다. 세 치 혓바닥을 꽁꽁 묶어둘 ‘한밤인들 한낮인들 변함없는 가늠자’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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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