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잡을 수 없는 것이 시간인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옛 사람들은 시간의 결을 헤아리고 향방을 가늠하는 일을 일러 역(易)이란 말로 불렀다. 그 무렵은 시간이 사방팔방으로 종횡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들이 겪었을 애로와 고충은 십분 수긍이 간다. 이리하여 주나라 버전의 『주역(周易)』이 만들어졌고, 시절이 수상하면 으레 별의별 역이 창궐하기에 이르렀다. 요즘 말로 하자면 언필칭 ‘과학적 세계관’이었으니, 분서갱유 사건 때 무지막지한 불세례를 면하게 된 것도 순전히 이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귀신을 울린 이 지혜마저 진보라는 신화에 의해 미신으로 강등된 뒤, 시간은 내처 앞으로만 달음질하게 되었으니, 이제 갈 데라고는 ‘종말’ 아니면 ‘태초’거나 혹은 ‘진보’ 아니면 ‘복고’일 뿐이었다. 물론 저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길을 나선 시도가 없진 않았지만, 복희(伏犧)와 문왕(文王) 시대 저 풍성하던 시간의 육질은 영영 회복 불능일 것 같았다. 나 또한 그런 줄만 알았다. 암문비경(闇門秘境)의 묘리(妙理)나 황극삼세(皇極三世)의 철리(哲理) 따위는 이제 ‘미아리 철학관’에나 떠도는 이야긴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경기도 어느 국도를 지나다가 이런 내 생각의 미욱함을 실감하게 되었다. 호젓한 차도 변엔 말쑥하니 광고대 하나가 서 있었는데, ‘맑고 풍요로운 새 ○○’라는 문구로 보아 해당 지자체의 배려인 듯했다. 거기선 한창 형형색색의 현수막들이 저마다의 의미를 뿜어대고 있던 중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살가웠으나 몹시 야했고, 그 무늬는 천박했으되 꽤나 고혹적이었다. 그럼에도 언어와 언어 간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비의가 엄연했고, 또 무늬는 무늬대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비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 땅의 비루한 일상이 거기에 빼곡했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전설상의 역리(易理)가 거기서 버젓이 작동 중인 거였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돌연 현수막들이 자리바꿈을 하더니 이상한 조합들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하도 기이해서 눈을 씻고 다시 보니,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역리 하나가 거기서 희붐하니 떠오르고 있는 거였다.
‘그랬구나…!’
내 눈에 어른거린 것은 여섯 장 현수막이 만들어낸 괘(卦) 하나였다. (괘는 양을 의미하는 ―와 음을 의미하는 --가 여섯 개의 층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하나의 층을 효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현수막 하나가 곧 이 괘의 효(爻)였던 셈인데, 그 효사(爻辭)들이 자못 요상해서 행인의 발목을 부여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래로부터 훑어보자면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초구(初九)는 천하의 잠룡(潛龍)이 현룡(見龍)을 꿈꾸도다. ‘기숙학원 등용문’이 지척이니 ‘재도전 모집’에 응하면 ‘서울대, 연·고대, 의대’에 오름이 이로우니라.
육이(六二)는 곤궁이 극심하다. ‘신용회복 개인회생 파산/면책’이 불가피하니 딱하도다. 서쪽에서 귀인이 ‘무료상담’을 행하니 이에 응하면 길하니라. ‘출장상담가능’하나 내방하면 더욱 길하니라.
구삼(九三)은 용문(龍門)이 참 아득도 하여라. 잠룡이 ‘MOTEL 자이안트’에 똬리를 틀었으니 꽃뱀을 경계할지라. 지대무외(至大無外)의 섭리가 번연하거늘 삼가지 않으면 필시 큰 화가 있으리라.
구사(九四)는 삼 년간 거병치 못했으니 결단의 날이 왔도다. ‘강한남성수술’이면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모란’ 들판에 ‘24시간’ 촛불을 밝히도다.
구오(九五)는 ‘○○시 해병대 전우회 회장 이·취임식’, 천지사해에 두 기운이 교체하니 맹호가 털갈이를 하도다. 육각모와 선글라스를 멀리하면 큰 탈이 없으리라.
상육(上六)은 귀신을 대함에 도타움이 있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니 ‘남원 제기/병풍’이면 끝내 후회가 없으리라. 단돈 ‘99.000/55.000’냥.
비록 저 전설 시대의 문아함이 적잖이 손상되긴 했으나, 경위(經緯)가 반듯하고 사리가 분명한 것이 괘상(卦象)을 이루기에 한 치 부족함도 없었다. 하지만 중세의 겨울 한기와 양물이 뿜어대는 비린내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하여 그 한기와 비린내를 담아 괘명(卦名)으로 포장해 보았더니, 어라! 이게 웬 일인가, ?(조)괘가 나오는 게 아닌가.
용모가 범상치 않은 이 괘명은 물론 전설의 64괘엔 없다. 그러니 수고로이 『주역』을 뒤적거릴 필요는 없다. 대신 눈을 똑바로 뜨고 우리 주변을 한 번 둘러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도처에서 이 글자의 암약상을 목도하게 된다. 구태여 이를 번역해 보면 “어머나!” 정도가 되고, 주석을 달자면 “망측해라!” 쯤이 된다. “하늘의 운행이 하도 장해서, 군자가 이를 본받아 자강불식(自彊不息)”이 지나쳤던 것일까? 필경 “오만한 용(亢龍)에 후회가 있을지니.”(『周易 · 乾卦』)
효의 당위(當位)와 부당위(不當位), 응(應)과 비(比) 등등 상세한 해석법에 관해서는 나로선 요령부득이다. 그 심오함에 대해선 강호 역술 제현의 명쾌한 해석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다만 효의 음양을 따져 『주역』을 뒤적여본즉 택화혁(澤火革)괘가 여기에 준한지라 참작이 될까하여 몇 자 부기해 둔다.
“연못 가운데 불이 있는 것이 혁(革)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천시(天時)의 변화를 연구하여 때를 밝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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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