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장에서 광장을 보려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명실간의 이 엄연한 괴리를 따져보자던 것도 아니었다. 남들 다 가는 데라면 한사코 거절하는 내가 광화문 광장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순전히 졸음 때문이었다. 봄날 지하철의 졸음이 나를 광화문역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나는 광화문 주변이 왠지 무서웠다. 정도전의 저 ‘경복(景福)’에의 염원이 무서웠고, 장군님 동상의 시퍼런 쇠 비린내가 무서웠고, 16차선을 횡단하던 대형 아치의 문자들이 무서웠다. 그래서 가급적 이 동네는 경이원지(敬而遠之) 차원에서 내외를 하곤 했던 것이다.
봄날의 광화문은 황사로 눅진했다. 황해를 건너온 먼지들은 광장의 의뭉스런 의지를 포근히 감싸주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돌아누운 광장은 흡사 기념비들의 무덤을 방불케 했다. 거기선 중세와 근대가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었고, 문화와 정치가 좌청룡우백호였으며, 물과 불이 상생상극의 화엄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기서 기억으로 편입되지 못한 시간은 불임의 시간이었고, 신화로 맺혀지지 못한 시간은 유산(流産)의 시간일 뿐이었다. 그러니 쑥과 마늘 내음 무성한 이 광장에서 살아있는 역사를 논한다는 건 애초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2
목욕재계를 마친 장군의 자태는 한층 늠름했다. 나는 그 늠름함이 못내 안쓰러웠다. 우리네 ‘힘에의 의지’가 가여웠고, 우리 시대 ‘표상에의 의지’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어서 빨리 장군을 눕혀드릴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차였다. 그것이 어린 백성들의 정신 건강에도 득이 될 거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장군의 고단함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간 홀홀단신 얼마나 외로우셨겠냐는 거였다. 음양합덕(陰陽合德)의 대사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문무양반(文武兩班)의 격조는 맞춰드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거였다. 후손의 충정으로서야 더없이 가상했지만, 발상에 음험함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광장에선 몇 달 며칠 동안 뚝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침내 거대한 옥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회춘례가 성대히 봉행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광장엔 성웅과 성군이 짝을 이루게 되었고, 선무(宣武)와 숭문(崇文)이 병립하게 되었으니, “일월광화가 날로 거듭되도다(日月光華, 旦復旦兮)”는 더 이상 경전 속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근자의 국운 상승이 혹 이와 연관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백번 양보한다 하더라도, 기어이 궁합을 맞추고야 말겠다는 저 의지만은 그래도 무서웠다. 삼도 수군 통제영이 있던 내 고향 통영 사람들의 충정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옥에 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왕 충정을 발휘할 바에야 제대로 했어야 했다. 만에 하나 불경의 기미라도 섞여있었다면 그건 좀 곤란하다. 성군의 옥체를 공해 수준으로 전락시킨 우리네 심미안만은 두고두고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 후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근정전 앞마당에 멍석을 깔고 석고대죄라도 청해보는 수밖에.
3
나는 우리의 선천적 고독결핍성 체질이 몹시 궁금해졌다. 독자성이란 것의 미덕을 모르지 않을진대 어찌하여 홀로 있음을 이리도 미워하게 된 것일까? 이몽룡이 있다면 성춘향이 있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라 치자. 십년씩이나 좌충했으니 우돌해야 한다는 논리도 역사의 합법칙성이라 치자.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성웅에 성군이었을까?
식견 있는 분들은 짐짓 이렇게 충고할 지도 모르겠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의 물리적 평형은 으레 심리적 평형을 수반하기 마련이라고. 동서의 문화사가 공히 ‘중용’을 거론하고 있는 것도 이 균형감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고. 과연 그랬다. 황혼의 광장에서 성웅과 성군을 오가며 내가 느낀 것도 그런 균형감과 아늑함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를 ‘우리 시대의 중용’이라 부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용의 본산 중국 땅에서도 이를 둘러싸고 제법 말들이 무성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때와 자리에 따라 변화무쌍한 이 개념의 속성 때문이었으리라. 그 가운데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해석은 이렇다. 가령 날이 후덥지근하니 창문을 좀 열자 한다. 그러자 모두가 안 된다 한다. 이유를 물으니 여태 닫혀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지붕을 들어내 버리자고 한다. 그랬더니 창문이 스르륵 열린다. 이것이 중국식 과유불급이자 대국식 평형감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만치가 않다는 것이다. 그 성질과 작용이 대국을 뛰어넘었으면 넘었지 결코 밀리지 않는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가령 전직 영의정이 조선통운 대행수에게서 대국 통보 오만 냥을 받았다는 풍문이 있었다 치자. 그런데 풍문의 진원지인 대행수가 정작 국문의 자리에서 애꿎은 방석을 지목함으로써 의금부 종사관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치자. 이때 전직 영의정과 방석의 관계가 바로 조선식 시중(時中)이자 우리식 평형감각인 것이다.
그렇다고 만고의 진리 중용에게 죄가 있을 리 만무하다. 다만 이를 억지로 조장하는 자들의 속내만은 무서운 것이다. 심리적 평안이 시신경을 마비시키는 정도라면 그나마 봐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억하심정이나 원한의 수준으로 진도를 나간다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이 경우 성웅과 성군은 무색무취의 마취제 세트가 되고 말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의 광장도 여민동락(與民同樂)의 가설무대가 되고 말 것이니 말이다. 이를 일러 사서에선 ‘참람(僭濫)’이라 부르고, 민초들의 입말로는 ‘가지고 논다’고 하는 것이다.
4
광장을 뒤로 하면서 나는 장군의 탄식 어린 넋두리를 들었다.
새벽 꿈에서 눈 하나가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亂中日記』 갑오 2월 3일)
비,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마음이 산란했다. 무슨 말을 하랴, 어떻게 말하랴. 어지럽고, 꿈에 취한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亂中日記』 갑오 5월 9일)
이어서 진노 어린 대왕의 목소리가 광장을 쟁쟁거렸다.
신문고를 설치한 것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칠 수 있게 하여, 아랫 백성들의 사정이 위로 통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금하였는가. … 이처럼 금지를 당한 사람이 여럿일 것이니, 그 의금부 당직원을 헌부에 내려 국문케 하라.(『조선왕조실록』 세종 무신 을해)
성웅과 성군의 궁합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홀로 계시게 하느니만 못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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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