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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얼마 전 러시아를 떠나셨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착잡한 표정으로 북국을 떠나는 사진 한 장을 접하면서 문득 지난 2002년 선생께서 보여준 ‘마법’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일면식도 없고 축구의 축자도 모르는 제가 불쑥 이런 글을 올리게 된 것은, 이제쯤 그 ‘마법’의 한국적 맥락과 문화사적 성격에 관해 몇 가지는 짚어져야겠다는 어떤 절박성에서입니다. 그러니 글을 올리는 저의 심사 역시 아늑할 리 없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저 바라기는 느닷없는 이 글이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선생의 심기를 더 어지럽히지나 않기를 소망할 따름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선생은 중세의 어느 날 이양선을 타고 이 땅에 발 디딘 벽안의 전도사였습니다. 그 옛날 그들이 가져온 것이 히브리 사막에 강림한 복음이었다면, 선생이 가져온 것은 구라파 중원의 토털 사커였을 뿐입니다. 이것의 철학과 진법이 얼마나 낯설고 당혹스러웠는지 선생은 아마 이해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리고 선생의 포교가 의외의 부흥을 이룩해냈을 때, 선생의 호쾌한 액션 한 방이 가져다 준 희열의 성격에 대해서도 아마 상상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이런 속사정을 구구절절 거론함으로써 선생께 마음의 짐을 보태드릴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그래도 축구공은 굴러간다는 점, 어쨌거나 우리도 볼은 차야한다는 점, 그리고 올해 월드컵에서도 일부 아이들이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s!)”며 철없는 망발을 일삼을 거라는 점 등등이 이런 서한을 올리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다소 글이 장황해지고 말이 갈피를 못 잡더라도 널리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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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본향 구라파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 축구는 한갓 스포츠만이 아닙니다. 그건 엄연히 문화사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일대 공안(公案)입니다. 이는 선생의 고국에서 전해진 화승총 몇 자루가 임진년 조선반도의 난리로 귀결된 것만큼이나 오묘한 대목입니다. 여기서의 문화사적 공안이란, 축구라는 종목이 한국적 삶의 보이지 않는 토대를 대단히 상징적인 방식으로 대변해주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이 점을 설명 드리기 위해 한국 축구의 전사(前史)를 잠시 일별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 혹시 알고계신지 모르겠지만, 한국 축구팬의 가슴 속엔 영원한 로망 하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박종환’이라는 이름입니다. 일각에선 그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한국형 축구의 매트릭스이자 ‘근대화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백락(伯樂)에 버금가는 명 조련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지도 철학은 알고 보면 무지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유의지론과 닦달이 전부였습니다. 생활자의 신조로선 꽤나 유용했겠지만, 축구의 전략이라면 너무 초라하고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이 빈약한 전략이 ‘멕시코 4강’이라는 의외의 신화를 이룩해내고 만 겁니다. 그때부터 ‘박종환’이라는 이름은 고유명사의 수준을 넘어 보통명사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어쩌면 이 쾌거는 ‘의지’와 ‘닦달’의 변증법에 관한 그의 탁월한 해석학 덕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전반전의 헛발질도 라커룸의 ‘푸닥거리’를 거치고 나면 신기하게도 120%의 효율성을 발휘하는 거였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문화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푸닥거리’가 창출한 20%라는 잉여효율은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저 역시 이 불가사의한 비밀에 대해 무던히도 물음을 던져보았지만 아직도 신통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이를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려우실 겁니다. 혹 선생께선 “발에 땀이 난다”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서양에선 임상병리학의 차원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 증상은, 이 땅의 문화기상학에선 ‘신바람’이라 부르고 미학적 용어로는 ‘흥(興)’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이 액체의 성분 분석이 여간 어렵지가 않습니다. 온갖 첨단 이론을 들이대도 좀처럼 분석의 틀 속으로 들어오려 하질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이게 배어났다하면 무서워집니다. 제 개인적으론 이걸 조선 민중의 핏속에 녹아있는 혼돈의 DNA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선생께선 분명 고개를 갸웃거리실 겁니다. 그러니 이를 ‘한국적 효율성’이라는 말로 미봉해 둘 수밖에요.
그런데 이런 집단생리학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나선 풍운아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바로 선생께서도 알고 계시는 차범근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짚어 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어릴 적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는 가장 토착적인(?) 스타일의 축구를 했던 사람입니다. 고교생 신분으로 소위 말하는 ‘국대’가 되었으니 쟁쟁한 선배들 틈바구니에서 주눅이 들 법도 했건만, 정말이지 그는 쌩쌩거리며 잘도 달렸습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여항(閭巷)에선 이런 노래 하나가 허다한 동심을 설레게 만들었겠습니까. “떴다 떴다 차범근 날아라 이회택…” 그런데 그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그저 차고 달리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극히 고전적인 방식의 축구였던 것입니다. (차두리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랬던 그가 분데스리가 밑바닥에서부터 중원의 합리주의 축구를 온 몸으로 체득한 뒤 금의환향한 것입니다.
그는 축구계에 만연한 ‘한국적 효율성’에 대해 펜티엄 노트북 한 대로 맞섰습니다. 그에겐 축구도 관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에게 ‘인상파’는 낡은 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대신 그는 선수들의 안녕과 선전을 위해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습니다. 공중파로 생중계된 이 모습이 일부 인사들로 하여금 혀를 차게 만들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차범근’이라는 이름은 이 땅의 축구사에 하나의 돌연변이가 되었고, 또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1990년대를 대변하는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탄탄대로를 활보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적지 않은 장애물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일단 선수들부터가 그의 노트북에 대해 마뜩찮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엄연히 축구도 인간학이고 사람의 사업인데 컴퓨터가 웬 말이냐는 일종의 인간 소외론이었습니다. 게다가 둥근 공에 얽힌 한국적 연기(緣起)의 사슬이 그를 칭칭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결국 관리 축구의 요람이었던 그의 펜티엄은 조선 발 고춧가루 바이러스에 일격을 당한 뒤 다운되었다가 급기야 이역만리 중국 땅으로 축구적 망명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뒤의 일은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는 굵은 허벅지 하나로 자신의 시대를 성큼 넘어서고자 했던 업사이드의 대가였습니다.
이로부터 이 땅의 축구계는 안팎으로 진퇴양난의 험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2002년 안방 잔치를 생각하자니 중원 축구에 정통한 안목과 리더십이 절실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적 효율성’을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불어 닥친 국가 부도의 위기를 이 토착형 효율성으로 근근이 저당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선생께선 납득을 할 수도 없겠지만 장롱 속 깊이 숨겨준 금붙이에 햇빛을 쪼이게 만든 원동력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세계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이 풍경은 맑스의 자본주의로도 설명하기 어렵고, 케인즈의 자본주의나 하이에크의 자본주의로도 온전히 해명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한국 축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패러다임상의 ‘지양’이 절실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박범근’ 내지 ‘차종환’ 축구여야 할 거라는 점도 왠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뉘라서 이 희대의 거족적 난제를 자임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이 대목에서 요청된 것이 ‘외부적 시선’이었고, 그 시좌가 바로 거스 히딩크 당신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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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한국 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이 ‘지양’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떠했으리라 집히는 대목은 몇 가지 있습니다. 아마도 선생께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은 선수들 몸에 배인 한국적 문화생리였을 겁니다. 언젠가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합숙 훈련 중 식사 시간에 최고참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사불란한 질서에 기겁을 하셨다고요. 그 서슬 퍼런 서열에 주눅이 들어 입도 벙긋 못하는 막내들을 보며 심히 절망을 하셨다고요. 그때 선생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모름지기 축구란 발로 하는 게 아닌데, 그건 엄연히 열한 명 아티스트가 만들어내는 종합예술인데, 그러려면 발랄하고 창조적인 상상력이 필수적인데, 그래야 아름답고 변화무쌍한 진법이 가능한데, 저 무거운 침묵으로 대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두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고래로 이 동방예의지국에선 밥상머리에서 입을 여는 것을 금기로 여겨왔습니다. 어린 시절 저 역시 남녀 겸상 불허의 엄숙한 밥상 앞에서 얼마나 빈번히 입단속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밥상 앞의 대화가 자연스런 선생의 문화에선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의 생활세계에선 추상같은 법도였습니다. 그러니 그 어린 막내들을 나무랄 일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통찰은 바로 이 대목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이 땅에 발 디딘 쟁쟁한 명장들을 하나같이 나가떨어지게 만든 주범을 선생은 대번 알아채고 만 겁니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 문화 심처에 똬리를 튼 모종의 생리와 구조였습니다. 선생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홍명보라는 포석이었습니다. 정신적 리더는 절실하지만 그의 위상이 과중할 때 야기되는 문제점을 꿰뚫어 보셨던 거겠죠. 그래서 선생은 그를 하릴 없이 벤치에 묵혀 두곤 했었습니다. 과연 선생의 통찰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얼개를 이루어가던 조직력이 그가 빠진 경기에서는 당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였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여지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런 모습에 선생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셨겠죠. 모르긴 해도 이날 선수들 개개인도 꽤나 힘든 밤을 보냈을 겁니다.
홍명보라는 포석을 걸고넘어진 선생의 전략은 분명 쾌거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 전략은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선생이 뒤흔들고자 한 이 포석은 적어도 이 땅의 문화에선 유구한 자기 기반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이 점을 제대로 설명 드리기 위해선 꽤나 먼 길을 에돌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선생의 정신을 사납게 만드는 일은 가급적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성글더라도 몇 개 바둑돌만은 깔아 두기로 하겠습니다. 이 땅의 문화에서 패밀리(家)라는 이름의 실체 없는 실체는 거의 무소불위의 지위에 가깝다는 점, 여기서의 패밀리란 선생의 문화에서 말하는 ‘society’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 그 구조가 자못 중앙집권적이어서 가부장의 권력이 거의 절대적이라는 점, 여기선 ‘society’처럼 개별자의 목소리가 쉽지도 않을뿐더러 개별 주체간의 ‘계약’ 같은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한국 축구는 이런 생리와 구조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등등 말입니다.
이 명민한 리베로는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의 민감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번번이 자신의 완장을 반납하며 스스로 음과 양을 오갔습니다. 그는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는 고금의 진리를 몸소 실천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사견이지만, 이 상호 교대와 통섭의 이치는 그 오묘함이 선생네 문화의 변증법보다 몇 수 위입니다. 어쨌거나 시중(時中)을 잡아채는 그의 순발력과 상황판단이 없었다면, 선생은 아마 이 ‘무물(無物)의 진(陣)’에 빠져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따라서 2002년의 붉은 영광도 불가능했을 테지요. 그렇다고 제 이런 이야기에 서운해 하거나 발끈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께선 이미 손자(孫子) 선생의 가르침 하나를 완벽히 구현해 놓은 상태였으니까요. “진정한 조작자는 장치의 기능과 하나가 되어 그 장치 속에 용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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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이 땅을 떠난 뒤 우리네 축구계엔 한파가 몰아 닥쳤습니다. 득달같이 들이닥친 기상이변을 두고 분분한 의견이 제출되었지만, 끝내 그 원인을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엔 선수들의 정신 기강을 문제 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설도 있었고, 진즉에 그럴 줄 알았다는 존재론적 자학사관도 있었으며, 다시 선생을 모셔야 한다는 히딩크 재림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 혈 자리를 짚기엔 왠지 역부족인 듯싶었습니다. 어쨌거나 한국 축구는 이로부터 다시금 중세의 암흑으로 되돌아간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잠복했던 ‘한국적 효율성’도 어느새 멀쩡히 제 자리를 회복한 듯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쯤 이 토착형 효율성에 대한 근본적인 진단과 성찰이 요구되어야 했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요즘 프리미어 리그의 박지성 선수를 보면서 종종 이 단어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가 축구 종가에 첫발을 디뎠을 때 솔직히 우리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들의 축구는 거의 예술 수준이더군요. 축구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경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선수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그는 ‘히딩크와 아이들’의 직계 적통이었습니다. 이 순박한 터벅머리가 맨체스터 평원을 질주하는 적토마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는 프리미어 리그를 횡행하는 예술 지상주의에 대해 8기통 심장 하나로 달랑 맞섰습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그는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그의 양말을 걱정할 정도였겠습니까. 엊그제 경기에선 90분 동안 무려 11.8 킬로미터를 달렸다고 하더군요. 이 날도 공격 포인트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환호는 슬며시 허탈로 변모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광 역시 서글픔으로 바래지고 맙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고효율의 아트 사커를 구사할 수 없을까요? 왜 우리는 아직도 게임 자체와 게임을 벌이지 못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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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제 이 민망한 글도 끝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뒤끝이 개운치 않은 걸 보면 우린 아직도 선생을 보내드리지 못했나 봅니다. 제대로 보내지 못했으니 제대로 맞이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이제 선생께 정중히 부탁을 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미련이나 아쉬움이 많으시겠지만 이제 이 땅을 떠나달라고요. 그리하여 그 나머지는 이 땅 사람들의 몫으로 온전히 남겨 달라고요.
올해 월드컵에선 선생을 뵙기가 아마 어렵겠죠. 그래도 여전히 축구공은 굴러갈 것이고, 우리 역시 희망봉을 바라보며 씩씩하게 볼을 차고 있을 겁니다. 또 우리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꿈은 이루어진다”며 한껏 목성을 높이고 있을 겁니다. 16강도 좋고 8강도 좋습니다. 예선 탈락이면 또 어떻습니까. 이 모든 건 지엽적인 일입니다. ‘신바람’ 축구면 어떻고 또 ‘허무’ 축구면 어떻습니까. 이 역시 부차적인 일일 뿐입니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건 더 이상 ‘삽질’ 축구만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냅다 달리지만 말고 멈추어 서서 한 번 생각해보는 겁니다. 머리로만 생각지 말고 발로도 성찰을 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그림을 한 번 그려보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된 한국형 축구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죠. 그날 선생을 모시고 힘차게 볼을 한 번 차고 싶습니다. 선생의 호쾌한 액션 한 방을 곁들여서 말입니다.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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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