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종로에서
종로를 걷다가 문득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떠올렸다. 이 시절 그의 노래를 떠받치고 있던 언어는 동사 ‘보다’였다. 남도 땅에서, 시청 광장에서, 정동진에서 그는 거듭 이 동사를 벼리고 있었던 것 같다.
황사 탓인지, 수상한 봄날의 춘정 탓인지 얼마 전부터 자꾸 눈이 간지러웠다. 그래서일까, 사소하고 가까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것, 비루하고 남우세스러워 잘 드러나지 않는 것들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라도 시내를 쏘다니며 말을 걸고 무늬를 입혀보고 싶었다. 여기에 실릴 글들은 내 이런 외출의 흔적들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대개는 저자거리를 쏘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내 나름의 문자로 엮어 본 것이다.
삭아야 할 것이 삭지 못해 노래로 불리는 시대는 불우하다. ‘발견’이란 단어도 이런 축에 속한다. 더욱이 그 대상이 ‘생활’이라면 적잖이 민망함을 무릅써야 한다. 내 말이 세계에 접수될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다. 접수되지 못하고 표류하는 말들은 어찌 보면 불가피하다. 그러니 ‘발견’이란 말은 눈가림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의 무늬[人文]라는 지평에 우리의 일상을 올려놓고 보니 일그러진 풍경의 내원이 어렴풋이 보일 듯도 하다. 내가 구태여 이 칼럼의 제목을 ‘생활의 발견’이라 이름붙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풍자도 있고 비판도 있다. 그리고 학적 담론도 있고 이야기도 있다. 더러 이들이 한데 엉겨들어 읽기를 가로막기도 할 것이다. 가독성은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가급적 내 생각의 리듬과 결을 순연히 따라가 보고 싶다. 일상에 관한 성찰적 글쓰기의 한 양식을 모색해보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는 이 글들을 문화비평의 일종으로 여길 지도 모르겠다. 문화를 비평한다는 것이 사람의 무늬와 그 토대에 관한 성찰이라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비평이란 말은 부담스럽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그저 생활자의 입장에서 일상의 눈높이로 내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경쾌하진 못하겠지만, 재미가 없지 않다면 나로선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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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