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군사를 기르는 방법
「미리 군사를 기르는 방법(預養兵)」(13권, 인사문)에서 성호는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두고 앞일을 내다보는 선견이었다는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편다. 즉 한가하게 노는 사람이 풍부하게 있었으니 적절한 방법으로 군사로 동원할 수 있겠지만, 양성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성호의 계산을 들어보자.
군사를 양성하려면 무엇보다 군량이 필요하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조선 사람은 하루에 쌀 2승(升)을 먹어야 하는데, 10만 명이라면 하루에 2만 두(斗)가 되고, 15두가 1석(石)이 되니 모두 1천3백30여 석이 든다(요즘 단위와는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 한 달이면 4만 석이다. 만약 여기에 기병(騎兵)이 있다면 말이 먹는 꼴과 콩은 계산을 따로 해야 한다. 또 행군하는 데 우마(牛馬) 1필이 20두를 운반한다고 계산하면, 양식 운반에 우마 1천 필이 있어야 한다. 물론 우마를 모는 사람도 1천 명이 필요한데, 이들의 양식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10만 명의 군사가 10일을 행군한다면, 사람과 우마가 먹을 양식과 꼴과 콩은 엄청난 양이 소요될 것이다. 거기에 각종 기구나 잡다한 비용이 추가됨은 물론이다. 성호는 수성전(守成戰)을 또 예시한다. 수성전에 돌입한다 해도 사람들이 원래 저축해놓은 것이 없고, 부모 처자를 데리고 성에 들어간다면 하루도 못 가서 물자가 바닥이 나므로 살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성호는 현재 나라의 형편으로는 10만 명을 양성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사정이 이러하니, 다만 천년만년 난리가 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난리가 나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하지만 평시에 군사와 백성을 사랑하여 기르면, 비록 10만 명은 아닐지라도 외침(外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백성의 기름을 짜고 거죽을 긁어내어 노약자의 시신이 골짜기와 도랑에 나뒹굴고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있으니,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고 슬프다. 어떻게 하여 10만 명의 군사를 얻는다 해도 아마도 무용한 것이 될 것만 같다(「미리 군사를 기르는 방법」)
군사를 기를 비용이 없어 오직 난리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소 군사와 백성을 사랑하여 기른다면 10만 명이 아니라도 외적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백성을 착취하여 굶겨 죽이고 흩어지게 하는 상황에서는 소용이 없다. 성호의 비판은 이어진다.
성호는 「군사에 딸린 보(軍兵保)」(10권, 인사문)에서 조선 전기 군사 제도인 오위제(五衛制)를 혁파하고 설치한 새 군영 제도, 곧 훈련도감과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의 삼영제(三營制)를 비판한다. 이들 군영에 따로 군사의 몇 배나 보인(保人)을 두어 원래 양병에 사용하기 위해 거두는 전부(田賦) 외에 따로 쌀과 포(布)를 거두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원래 전부로 거두어들인 쌀이 잡용으로 쓰이기에 따로 군사를 기를 비용을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직업군인을 기른다는 명분에는 찬성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 어영청과 금위영에서 번갈아가면서 쉬는 군사에게도 포를 거두는 얼토당토 않는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호는 「군사에게는 반드시 농토를 주어야 한다(兵必授田)」(14권, 인사문)에서 유몽인(柳夢寅)의 목격담을 든다. 유몽인이 북경을 가다가 화려한 옷에 준마를 탄 기병이 수십 일 동안 길에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물어보았더니, “중국에서는 군사들에게 약간의 농토를 주어 그 농토를 갈아 준마를 사도록 하고, 여유가 있으면 옷가지며 먹을 것에 쓴다”는 답이 돌아왔다. 성호는 이 이야기 끝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군사는 죽을 땅에 놓이는 자다. 평시에 즐거운 마음으로 따른다 해도, 급한 변란이 있으면 오히려 달아날까 두렵거늘, 하물며 작은 이익도 없고 큰 화(禍)가 닥치는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후세에 와서 억지로 군액(軍額)을 뽑기에 강하고 힘이 있는 자는 빠질 수가 있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는 면하지 못하니 어떻게 적을 꺾어 막을 수 있겠는가? 농토와 땔감의 이익이 있다면, 백성들은 군사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들을 먼저 시험해본다면, 허약한 자는 끼이지 못할 것이다. 이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군사는 죽을 곳에 자기 목숨을 던지는 사람이다. 평소 아무리 잘 대해주어도 전쟁이 나면 달아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평소 아무런 이익을 주지 않으면 누가 군사가 되어 적을 막으려 할 것인가. 그들에게 농토와 땔감을 준다면 백성들은 군사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중에서 힘 있는 사람을 군사로 뽑고 허약한 사람은 버린다. 이것이 요령이다.
한데 성호가 본 조선의 사정은 어떤가. “군사의 액수를 채워 넣는데 마치 강도를 잡는 것처럼 하고, 이웃끼리 보(保)가 되게 하되 채찍질 회초리질로 위세를 뽐내며 흡사 양과 돼지를 몰듯 한다. 외적의 침입이 없을 때에 갖가지 물건을 매겨 징수하면서 한 푼 어치의 혜택도 없다.”(「군사에게는 반드시 농토를 주어야 한다」)
성호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전요(田饒)의 말을 끌고 온다. “재물은 임금이 가볍게 여기는 바이고, 죽음은 군사가 소중히 여기는 바입니다. 임금이 가벼운 재물을 쓰지 않으면서 군사의 소중한 죽음을 바치기를 바란다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뼈를 찌르는 말이 아닌가. 창고에 넘쳐나는 재물은 아까워하면서, 사람의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허술히 버리라니 말이 되는가?
성호는 대책으로 고려 말기 조준(趙浚)의 상서를 끌어온다.
국가에서 기름진 농토를 갈라서 갑사(甲士) 10여 만 명을 길러 옷과 군량과 무기가 모두 이 농토에서 나왔으므로 나라에는 따로 군대를 기르는 비용이 필요 없었습니다. 이것이 조종(祖宗)께서 삼대(三代)를 본받아 군사를 농민에게 맡겼던 유의(遺意)입니다.
지금은 군사와 농토의 제도가 모두 없어졌고, 생각지도 못한 전쟁이 일어나면 농부를 몰아 군사를 보충합니다. 이 때문에 군사는 허약하여 적군의 먹이가 되고, 농민의 곡식을 덜어내어 군사를 먹이므로 호구 수가 줄어들고 마을이 쪼그라드는 것입니다.
상고해보면, 조준이 이는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올린 글이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3권 ‘우왕(禑王) 4년’조〕. 요지는 병농일치(兵農一致), 곧 농민에게 농토를 넉넉히 나누어주고 그들을 병사로 삼아 스스로 의복과 군량, 군기를 마련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농토는 농민에게 있고, 어떤 특권 세력도 농토를 독점할 수 없다. 농민은 나라를 지키는 것이 곧 자기의 농토를 지키는 것이 되니, 힘써 싸우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 성호의 생각이다.
농민에게 농토를 지급하여, 군사와 농민을 하나로 묶자는 발상은, 서울보다는 변방을 중시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이어진다.
대저, 변방의 국경지대를 험하게 만드는 것을 팽개치고 도성을 견고하게 하는 데에만 전적으로 뜻을 기울이거나, 지방 사람들의 원망을 불러일으키면서 서울의 군사만 기르는 것은 모두 무모한 것이다. 만약 적이 뱃속으로 들어온다면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인들 보존되기를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인정이란 가까운 일에 눈이 가려 먼 곳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기 마련이다. 도성은 몸이 의탁해 있는 곳이고, 금려(禁旅, 임금 직속의 서울 수비군)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이에 마음을 다 쏟고 힘을 다 쓴다. 하지만 변방에 걱정이 없으면 도성이 절로 편안해지고, 지방의 형세가 튼튼하면 금려의 위세도 펼쳐진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양병(養兵)」, 7권, 인사문〕
서울은 중요한 곳이 아니다. 왕과 관료들은 막상 자신이 사는 곳을 튼튼히 하고 자신을 지켜줄 금군(禁軍)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지만, 그보다는 변방을 튼튼히 하고 지방의 군대를 길러야 한다. 그것이 서울을 방어하고 금군의 위세를 떨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성호는 그러기에 지방 군사에게서 빼앗아 서울의 군대에 줄 수가 없다고 말한다(「양병」). 양민에게서 군포를 거두어 서울 군대의 군사를 양성하는 비용으로 쓰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군포는 영조 때의 균역제로 일부 개혁이 있었을 뿐 대원군 집정기까지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농민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 그렇게 착취당한 농민이 과연 나라를 지킬 필요를 느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