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인간의 뒤섞임, 혼종(混種)
전쟁은 사람을 뒤섞는다. 베트남전에 참여했던 한국인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의 존재가 그렇거니와 전쟁은 언제나 인간을 뒤섞는다. 무기보다는 사람에 의존하던 전근대의 전쟁은 특히 그 정도가 심하다. 그것은 대규모의 이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성호는 「풍기의 유전(風氣流傳)」(1권, 천지문)에서 그 뒤섞임, 혼종의 역사를 개관한다. 예컨대 영남 지방은 중국 진(秦)의 백성이 들어와서 산 곳이고, 그 증거로 경주의 원전(轅田)은 상앙(商?)이 구획을 지은 농지의 흔적이라고 한다. 개성의 ‘삿갓과 타래머리는 은(殷)나라 백성이 낙양에 살 때 풍속으로 기자(箕子)를 따라 들어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앞의 진나라 백성 운운하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박혁거세 38년’조에 실린 기록, 곧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 때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와서 변한 동쪽에 많이 살았고, 진한과도 어울려 살았다”는 자료에 근거할 것이다. 다만 경주에 남은 밭의 모양이 직선으로 된 것이, 상앙의 원전(轅田, 구획이 곧은 밭)의 유허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또 은나라 백성의 삿갓 운운하는 말 역시 근거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명백한 증거를 가진 것도 있다. 요(遼)나라가 멸망한 뒤 요나라의 유민을 받아들여 살게 했던바, 그 집단 거주지를 ‘거란장’이라 불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성호는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남만 지방의 해귀족(海鬼族) 출신인 만자군(蠻子軍) 1만4천 명을 보내 해주(海州)ㆍ염주(鹽州)ㆍ백주(白州) 3개 주에 주둔하게 했던 것도 한반도에 외국인이 살았던 사례로 든다. 다만 무과 시험에서 황해도 출신이 강궁(强弓)에 발군의 솜씨를 발휘한 것도 아마 황해도 사람이 만자군의 후손이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성호의 추측은 신빙성이 없다.
사람이 가장 크게 뒤섞인 시기는 임진왜란 때였다. 임진왜란은 중국, 일본이 참가한 국제적인 전쟁이었기에 자연 중국인과 일본인의 대량 이주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대량의 일본인 정착민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이 단일민족임을 내세우는 거룩한 민족주의자들은 불쾌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일본인의 피가 내 몸속 어딘가에 비록 양은 적을지 몰라도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분 나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인이 모두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민족’이라는 것은 근대에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인 내부의 일본인을 찾아가 보자. 성호는 「삼포왜(三浦倭)」(19권, 경사문)에서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이란 책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책에 의하면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한 뒤 왜인 60호가 제포(薺浦)ㆍ부산포(釜山浦)ㆍ염포(鹽浦) 등지에 와서 살고자 하므로 조정에서 허락을 해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만 이주를 허락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전기의 『왕조실록』에는 일본인이 조선으로 들어와 사는 경우에 관한 기사가 적지 않다. 대마도 정벌 이후 특별히 한꺼번에 많은 호수가 정착했기에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 일본인들이 중종 5년 4월에 대마도의 일본인을 끌어들여 폭동을 일으킨 것이 이른바 삼포왜란이다. 일본인의 연안 침범에 골머리를 앓았던 조선 정부는 강온 양책을 구사했으니, 대마도 정벌이 강경책이라면 삼포에 일본인의 거주와 면세를 허락한 것은 온건책이었다. 한데 중종 즉위 이후 면세를 철회하고 정해진 인원 이상의 거주를 불허하자 폭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삼포왜란 이후 일본인이 조선 땅에 전혀 살지 않았느냐 하면 결코 아니다. 성호의 지적처럼 “삼포의 왜적을 토벌한 뒤에도 남은 종자가 여전히 많아 지금도 바닷가에 향화촌(向化村)이라 부르는 곳이 무수하다”〔「왜구의 시말(倭寇始末)」, 14권, 인사문〕. ‘지금도’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건대, 이는 임진왜란 이후의 정황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후 항왜(降倭)들이 대량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난중잡록』과 『일월록』 등의 자료에 의하면, 1593-1594년 어림에 영남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중에는 오랫동안 군대에서 시달리는 것이 싫어서 조선에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중 김응서(金應瑞)가 항복을 받은 사람이 1백 명 가까이 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조선군이 되어 공을 세운 자도 있었다. 김향의(金向義)란 일항왜가 이끈 부대는 전공이 많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한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만, 김향의란 이름도 재미있지 않은가. ‘향의(向義)’라, 옳은 쪽은 향한다는 말이니, 조선을 옳은 나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항왜들은 경상도 밀양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들의 마을은 항왜촌, 혹은 항왜진(降倭鎭)이라 불렀다. 항왜 중 별다른 공이 없는 자들은 솎아내 서북 지방에 살게 했는데, 이들은 뒷날 이괄(李适)의 부대에 소속되었고,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모두 죽임을 당한다.
어쨌거나 전쟁통에 이런저런 이유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자들은 모두 조선에 남았고, 특히 왜인은 전쟁 끝에 최후로 머물렀던 해안 지방에 많이 남았을 것이다. 이것이 앞서 성호가 바닷가에 존재하는 ‘향화촌’이라고 불렀던 곳일 터다. 그런데 성호에 의하면 이들은 좀처럼 조선 사람과 섞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바닷가 여러 고을에는 제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사는 자들이 아주 많다. 그들을 ‘향화(向化)’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 사람과는 혼인을 하지 않고 따로 마을을 이루어 사는데 점점 그 수가 불어났다. 조정에서는 예조(禮曹)에 맡겨 아전들에게 세금을 마음대로 받게 한다.(「풍기의 유전」)
일본인들은 일종의 격리된 상태로 살았던 것인데, 「삼포왜」에 의하면 조선 사람들이 천하게 여겨 그들과 통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조선 쪽에서는 임진왜란 때 당한 쓰라린 상처가 있고, 또 17세기 이후로는 혈통을 중시하는 친족의식이 강력하게 작동했기 때문에 일본인과의 통혼이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호는 이 부분을 걱정한다. 즉 그들이 정착해 살고는 있지만 일본의 풍속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니, 만약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경우 반드시 기회를 보아 배반할 것이니 미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풍기의 유전」). 성호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약 80년 뒤에 태어났고 그가 활동한 것은 18세기 중반이었으니, 거의 한 세기 반이 지나서도 일본인의 마을은 조선 사람과 섞이지 않았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분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충청도에도 예전부터 일본인 마을이 있었는데, 3?1운동이 났을 때 그 마을만은 만세운동이 없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성호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 아닌가.
성호의 대책은 이렇다.
중국의 벌열(閥閱)과 씨족(氏族)도 그 근원을 따져보자면 오랑캐에서 나온 경우가 어찌 한정이 있을 것인가. 지금 왜인도 전해 내려온 대수가 오래되고 중국에서 중국인이 된 지 오래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유독 우리나라의 왜인만 심하게 대우하는 것인가? 지금 왜관(倭館)에서는 간통하는 남자와 여자는 죽인다 하니, 이것은 정말 좋은 법이다. 귀화한 지 오래된 사람은 각 고을에서 일을 맡겨 부릴 만한 우수한 사람을 가려내 현달하게 만들어주고, 차츰 우리나라 사람과 얼려 살게 해주어야 속내를 털어놓게 될 것이다.(「삼포왜」)
요컨대 귀화한 일본인을 차별하지 말고 꼭 같은 백성으로 대우해야 저들도 마음을 털어놓고 진정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성호의 말은 외국인 노동자와 관련하여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국말을 하면서 한국에서 일하고 한국에서 살면 한국인이다. 다른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재일교포의 차별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던 한국인이 어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그렇게 야박한가. 국가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도 줄어든다는데 어찌할 것인가. ‘다문화가정’이란 말조차 쓰지 말았으면 한다. 그저 사람일 뿐이다. 새로 들어온 식구, 곧 이내 한 식구가 될 사람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