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낳은 이산자(離散者)의 증언
전쟁은 인간의 일상을 산산조각 낸다. 개인은 자신이 살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의미 없는 파편이 된다. 파편은 의지 없는 물건이 되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어느 날 오후 불쑥 나타난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땅에 떨어져 낯선 삶을 강요받는 것이다. 조완벽(趙完璧)은 일본 교토로 갔다가 베트남으로, 필리핀으로, 유구(琉球)를 떠돌다가 조선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안토니오 코레아처럼 일본으로, 인도로, 그리고 최후로는 이탈리아까지 흘러간 사람도 있다. 이들의 희한한 경험은 이야기로 떠돌다가 문인의 붓끝에서 기록으로 남고, 때로는 다시 변전(變轉)을 거듭하여 소설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성호가 「양부하(梁敷河)」(14권, 인사문)에서 전하는, ‘양부하’란 인물의 희한한 임진왜란 체험담을 들어보기로 하자.
「양부하」는 양부하의 자전적 체험을 한문으로 옮긴 것인데, 옮긴 주체는 성호가 아니다. 임상원(任相元, 1638-1697)은 양부하를 만나 그의 일본에서의 체험을 듣고 그것을 제재로 삼아 「동래양부하전(東萊梁敷河傳)」으로 쓰게 되었던바, 성호는 다시 이 전(傳)을 『성호사설』에 옮겨 싣고 있으니, 곧 위에서 말한 「양부하」다. 성호의 원작은 아니지만, 성호가 그대로 옮기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으니 「양부하」는 성호의 저술이 아주 아니라고는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 희한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양부하」는 두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앞의 이야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여는 결정적인 고비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서군의 전투, 곧 세키가하라(?ヶ原) 전투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니 췌언을 요하지 않지만, 앞의 이야기는 「양부하」에 처음 나오는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양부하는 자신이 동래부 양가(良家) 출신으로 조부는 양조한(梁朝漢), 작은 조부는 양통한(梁通漢)인데, 임진년 4월 동래가 함락될 때 두 사람 모두 송상현과 죽었으나, 송상현의 비석에는 단지 양통한의 이름만 거두고 있다고 한다. 그를 잡은 일본인은 그가 양인(良人)인 줄 알고(곧 賤人이 아니라는 말이다) 관백(關白), 곧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다.
히데요시는 열두 살 양부하를 찬찬히 보더니 뜬금없이 “조선 아이도 일본 아이랑 같이 생겼구나” 한다. 양부하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물어도 답을 하지 않으니, 히데요시는 통역에게 “네게 이 아이를 맡길 터이니 일본말을 가르쳐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네놈을 죽일 것이야” 하였다. 통역은 겁에 질려 밤새도록 양부하를 가르쳤다. “네가 힘써 배우지 않으면 너랑 나는 모두 죽는다.” 다음날 히데요시가 양부하를 불러 몇 마디 일본말로 물어보자 양부하는 척척 대답을 하였다. 히데요시는 더 가르치라 명했고, 석 달이 지나자 양부하는 일본말에 능통하였다.
조선은 칼과 창에 찔리고 총에 맞은 인간의 비명과 그들이 흘린 피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근신(近臣)을 불러 옛날이야기를 시키고, 흥이 나면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양부하도 천인이 아니란 이유로 특별히 사랑하여 늘 좌우에 머물게 했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그것은 조선인 아이의 희귀한 체험으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역사의 큰 그림자가 드리운다. 1596년 가을 심유경(沈惟敬)이 책봉부사(冊封副使)로 일본에 오게 된다. 심유경은 명의 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고 통보하는바, 이에 히데요시는 크게 분노해 다시 조선 침략의 명을 내린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는 것이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속고 속이는 명과 조선, 일본의 외교전이 그 이면에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접어두자.
희한한 일은 조선 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양부하가 히데요시에게 만나게 해달라고 해서 다행히 허락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신불신(信不信)이란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언가? 심유경이 히데요시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양부하가 전한 이야기는 이렇다. 심유경은 처음 히데요시를 만났을 때 환약 하나를 꺼내 먹는다. 다음 회담 때도 역시 약을 꺼내 삼킨다. 히데요시가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그대는 무슨 약이 있기에 만날 때마다 먹는가?”
“만리 바닷길을 건너오느라 습기에 상해 병이 되었는데, 늘 이 약을 먹으면 기운이 통하고 몸이 가볍습니다.”
“그대가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 역시 접때 섬에서 돌아와 기운이 자못 줄어들었으니, 나도 먹을 수 있겠는가?”
“당연하지요.”
심유경은 즉시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주었다. 히데요시는 양부하에게 받아오라 하고는, 손바닥에 올린 뒤 한참을 뚫어지게 보았다. 환약에는 가느다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일본에서 큰 글씨를 잘 쓰는 것만 못해.” 이쑤시개로 반을 잘라 심유경에게 주자, 심유경이 받아 삼켰다. 히데요시는 심유경을 한참 뚫어지게 보았다. 심유경은 약을 삼킨 뒤 몸을 기지개를 했다. 히데요시는 그제야 물을 가져오라 하고는 약을 삼키는 것이었다. 다음날 심유경을 만나자 히데요시는 약을 먹었다.
약은 독약이었다. 심유경은 사신관(使臣館)에 돌아와 즉시 해독약을 먹었다. 사정을 모르는 히데요시는 갈수록 몸에 윤기가 빠지더니, 미구에 꼬챙이처럼 말랐다. 의원을 불러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침을 놓았지만 피가 나오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어떻게 사람이 진액이 없을 수 있단 말이냐? 뜸을 떠 보겠다.”
히데요시가 내실로 들어가 희첩(姬妾)에게 쑥을 말아서 붙이게 하더니 갑자기 몸을 뒤집더니 웃는 것이었다. 웃는 이유를 묻는 희첩에게 히데요시는 “나는 이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총 몇 줌과 깨끗한 물 한 독을 준비했다가 자신이 죽은 뒤 배를 갈라 창자를 들어낸 뒤 깨끗이 씻고 말총으로 꿰매 시신을 술독에 담가두라고 명했다. 희첩들이 히데요시의 말을 따라 그대로 했지만, 냄새를 숨기지 못해 이내 히데요시가 죽었노라고 알렸다. 결국 심유경이 건네준 독약이 히데요시를 죽였던 것이다. 정말 믿거나 말거나다.
절대권력자의 죽음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히데요시의 죽음은 제환공(齊桓公)이나 진시황의 죽음과 비슷하다. 절대 권력자의 사인이 정확히 밝혀지는 법은 드무니 말이다. 히데요시가 성병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다. 양부하는 히데요시가 죽을 때 곁에 있지 않았다. 그는 히데요시가 내실에 거처하면서부터 그를 가까이에서 모실 수 없었고, 히데요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혼인(?人, 문지기)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양부하는 뒤에 다섯 명의 대로(大老) 중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섬겼는데, 주지하다시피 모리는 세키하가라 전투 때 서군 대장이었지만,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장이 된다. 양부하가 모리에게 조선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하자, 도쿠가와에게 목숨을 건졌지만 크게 감봉을 당해 의기소침해 있던 모리는 자신은 땅이 깎이고 먹을 것이 줄어들어 많은 부하를 거느릴 수 없다면서 허락해준다. 이에 양부하는 돌아가고자 하는 조선인 82명을 데리고 대마도를 거쳐서 부산으로 돌아온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처음에는 히데요시를, 나중에는 모리를 섬겼던바, 모두 19년이었다. 양부하는 문자를 몰랐던 사람이다. 그가 95세 때 임상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겨달라면서 증언한 것이 곧 「동래양부하전」으로 남게 되었다.
성호는 양부하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은 본 적이 없지만 밤낮 가까이서 모셨던 부하가 기억하여 잊지 않은 것이니 ‘아마도 허황한 말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심유경이 독약으로 히데요시를 죽였기에 부산에 있던 왜적이 철수하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던 것이니, 심유경이 큰 공을 세운 것이라 평가한다. 심유경이 이 일을 비밀로 한 것은, 그것이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역사는 늘 큰 줄기만을 그려낸다. 그 속에 미세한 우연을 우리는 믿지 못한다. 하지만 그 미세한 우연이 역사를 만들기도 할 것이다. 양부하의 말은 이래서 굳이 거짓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이 말 역시 믿거나 말거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