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무기와 조총
불행한 결과지만, 전쟁은 살인과 파괴 기술에 놀라운 진보를 가져온다. 2차 세계대전이 핵무기를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인간은 머리 위에 폭탄을 얹고 사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임진왜란 역시 새로운 무기의 개발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성호는 「화포(火砲)」(5권, 만물문)에서 조선이 쓰는 화포는 고려 말기 처음 만든 것으로 당시 일본인들은 그 기술을 몰랐다고 한다. 왜냐? 화포는 알려져 있듯,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성호는 그것이 우왕 3년(1377)에 최무선(崔茂宣)이 원나라 염초장(焰硝匠) 이원(李元)에게 배운 기술로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이 신병기로 왜구가 침입했을 때 나세(羅世)가 진포(鎭浦) 싸움에서 적선을 태웠고, 또 정지(鄭地)도 이어 화포로써 적선을 태우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성호는 「유정의 동정(劉綎東征)」(23권, 경사문)에서 임진왜란의 신무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먼저 해귀(海鬼). 해귀는 사람이니, 무기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전에 볼 수 없던 사람이고 또 요즘의 특수병과 같은 것이라 소개해둔다. 유정은 1592년 중국에서 나올 때 남번(南蕃) 출신의 ‘수십 종류’의 해귀를 데리고 왔다고 한다. 해귀는 알려진 바와 같이 포르투갈에서 보낸 흑인 용병이다. 포르투갈은 이미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포르투갈이 흑인과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선조실록』(31년, 1598년 5월 26일)에는 선조가 중국인 장수 팽신고(彭信古)를 찾아갔을 때 팽신고가 해귀를 신병(神兵)이라고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 기사에 딸린 사신의 평은 이러하다.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할 수 있다. 거기다 며칠 동안 물속에서 견딜 수 있고, 수족(水族)을 잡아먹을 수 있다. 중원 사람도 거의 보기 어렵다.” 해귀는 아마도 요즘의 유디티와 같은 수중폭파팀이었던 것이니, 일종의 신병기인 셈이다. 다만 성호는 「유정의 동정」에서 수십 명의 해귀를 데리고 왔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4명으로 되어 있다. 성호가 무언가 착각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수중에서 헤엄을 잘 쳤다는 것은 같다.
성호는 또 다른 무기 진천뢰(震天雷)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박진(朴晉)이 영천(永川)에서 승리했을 때 ‘진천뢰’를 썼다. 진천뢰는 군기장(軍器匠) 이장손(李長孫)이 창안한 것이다. 마름쇠과 쇳조각을 인화물질과 함께 둥근 공처럼 만들고 대완구에 집어넣어 불을 붙여 발사하면, 오륙백 보를 날아 성안으로 떨어졌다. 왜병들이 다투어 모여 밀치며 들여다보는데, 속에 있는 포탄이 폭발하면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지고 그것에 맞아 죽은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승리하였다 하지만, 꼭 죄다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진천뢰는 단순한 쇳덩이가 아니라, 둥근 쇠공 안에 마름쇠와 쇳조각, 그리고 화약을 함께 넣은 것이니, 신무기라 할 만하다. 다만 성호는 이것의 원산지가 중국이 아닌가 의심한다. 원나라가 금나라의 수도 변경(?京)을 공격할 때 금나라의 무기로 ‘진천뢰’라는 화포가 있었던바, 그것이 이장손 진천뢰의 원본이라는 것이다. 금나라 진천뢰는 철관(鐵罐), 곧 쇠로 만든 항아리에 화약을 담은 것으로 폭발하면 소리가 1백 리 바깥까지 들리고 그 파편에 철갑도 뚫렸다고 한다. 양자는 동일한 듯하지만 사뭇 다르다. 민승기 선생이 쓴 『조선의 무기와 갑옷』(가람기획, 2004)에 의하면, 중국 것은 손으로 던지는 폭탄의 일종이고, 화포로 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 이장손의 진천뢰는 포탄 내부에 지연 신관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것과는 다르다(앞의 책, 273쪽)는 것이다. 어쨌거나 성호는 이 신무기들의 뒷소식이 궁금했다. 그는 왜 해귀는 뒷날 수전에서 왜선에 구멍을 뚫지 않았던가? 이장손의 진천뢰는 왜 전투마다 사용되지 않았던가? 성호의 물음은 그냥 물음으로 남는다.
임진왜란 최고의 신무기는 당연히 조총이었다. 성호는 「화총(火銃)」(5권, 만물문)에서 조총에 대해 상론한다. 먼저 그가 이해한 조총의 원리. 성호는 불보다 사나운 힘은 없다면서, 우레와 벼락의 경우를 든다. 이 강력한 자연현상은 ‘양(陽)’의 기운이 쌓여 불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이치로 “불이 안에 꽉 막혀 있어 발산될 수 없는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터져 나가면 돌도 쪼개고 산도 부수게 된다”는 것이다. 화약에 열이나 충격을 가했을 때 일어나는 급속한 기체 팽창의 원리를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호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 이 현상을 보고 “조취총(鳥嘴銃) 따위의 화기(火器)를 쇠를 부어 만들었다”고 한다.
조총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가져옴으로써 처음 알려진 것이지만, 성호는 이미 구준(邱濬, 1420-1495)의 『대학연의보』와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실려 있다고 말한다〔「화포」, 5권, 만물문〕. 『기효신서』는 임진왜란 이후 알려진 책이지만 『대학연의보』는 흔한 책이었다. 과연 『대학연의보』 122권에는 구리나 철로 총신을 만들고 거기에 화약을 채워 넣는다는 간단한 총 제작법이 나온다. 성호는 “왜인은 이 방법을 얻어 더욱 교묘하게 이용했다. 우리나라는 임진년 이후 비로소 제조하는 방법이 있었고 그전에는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낭패를 보게 된 것이다”(「화포」)라고 말하고 있지만, 일본인의 조총은 『대학연의보』나 『기효신서』를 보고 만든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사들인 것을 복제한 것이다. 사실 조선이 자랑했던 화포와 조총의 원리는 같다. 비록 성호는 「화포」에서 화포는 주로 배를 태우는 것이라고 하여 총과 화포를 전혀 다른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사실상 같은 원리의 것이다. 다만 총을 만들지 않았던 것은, 조선에서는 활을 주로 사용했기에 조총을 만들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화총」에서 성호가 소개하는 복수총(復?銃)이다.
일찍이 나는 어떤 사람의 집에서 왜인(倭人)의 ‘복수총’을 보았다. 길이가 두어 뼘 정도라 왜인들이 소매 속에서 몰래 발사하는 것이었다. 10보 이내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고, 10보를 넘으면 무력하다고 하였다.
성호가 남의 집에서 보았다는 일본인의 복수총은 아마도 일본에서 수입된 원시적 형태의 권총일 터이다. 길이가 두어 뼘밖에 되지 않는다 했으니, 이전의 총신이 긴 조총과는 확실히 다르다. 물론 지금의 권총 크기는 아니지만, 소매 속에 넣고 다닐 정도의 크기니 사실상 권총인 것이다. 10보 안에서만 유효하다 했으니 대개 암살용이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성호는 화승(火繩)이 없는 총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육약한(陸若漢)」(4권, 만물문)에서는 인조 9년 7월 명나라에 진위사(陳慰使)로 갔던 정두원(鄭斗源)이 이탈리아 신부 로드리게스(Joannes Rodriges)에게서 받아온 망원경, 홍이포, 조총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조총은 화승을 쓰지 않고도 발사되는 총이라고 한다. 『조선의 무기와 갑옷』에는 ‘부싯돌로 점화하는 수석식(燧石式) 소총’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무기 전문가가 아니라서 더 이상 설명을 하진 못하겠다.
성호는 「화구(火具)」(5권, 만물문)란 글에서도 여러 화기를 소개하고 있다. 『계정야승(啓禎野乘)』에 실린 유효 사거리 30리인, 철환이 지나는 곳에는 모든 군대가 전멸된다는 동포약(銅砲藥), 적의 배를 태워버렸다는 의대리국(意大里國, 이탈리아)의 거울(이것은 아르키메데스가 로마의 침입 때 거울로 로마 군함을 불태웠다는 전설을 옮긴 것이다), 도륭(屠隆)이 열거하는 화통(火?)ㆍ화총(火銃)ㆍ화포(火砲)ㆍ화궤(火櫃) 등 13종류의 화기, 척계광이 말하는 수십 수백 종의 화공법 등이 그것이다.
성호의 조총에 대한 총평을 들어보자.
수성전에 능했던 김시민(金時敏) 같은 분과 해전에 탁월했던 이순신 같은 분도 모두 총탄을 맞고 죽었으니, 조총은 병기 중에서도 더욱 잔인한 것이다. 조총이란 물건은 하늘도 화기(和氣)를 줄이고 땅도 근심의 빛을 더하게 되는 것이니, 인간 세상에 더할 수 없는 재앙을 만드는 도구인 것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용(俑)을 처음 만든 사람은 아마도 후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무기를 만든 자는 ‘용’을 만든 사람보다 훨씬 더하다 하겠다.(「화포」)
용(俑)은 나무 인형이다. 어떤 자가 높은 사람이 죽자, 나무 인형을 만들어 무덤 속에 껴묻었다. 그 뒤 나무 인형이 아니라, 산 사람을 껴묻는 풍습이 생겼다. 공자는 그것을 두고 맨 먼저 나무 인형을 만들어 무덤에 껴묻은 사람은 결국 산 사람을 껴묻는 길을 연 셈이 되니 천벌을 받아 후손이 없을 것이라 말했다. 무기를 만든 사람도 그렇다. 조총 만든 사람이 아닌 핵무기를 만드는 사람, 그것을 가진 사람의 죄는 도대체 어떠할까? 대량살상 무기를 고안하는 자, 화 있을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