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수군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 임진왜란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이순신이란 걸출한 인물을 낳았다. 만약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이순신은 그냥 평범한 무인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범상한 이름만 남겼을 것이다.
성호는 『성호사설』 여러 곳에서 이순신의 공을 기리고 있다. 앞서 「석성(石星)」(23권, 경사문)에서 보았듯, 명의 파병을 가능하게 했던 석성을 제외한다면 이순신은 임진왜란 최대의 공로자다. 이순신이 전쟁 초기에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일본 수군이 남해안을 돌아 서해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평양에 일본군을 묶어놓고, 이어 이여송 군대가 일본군을 평양에서 몰아냈으니 이순신의 공로는 막대한 것이다.
특히 성호는 일본이 전쟁 중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한 것은 모두 이순신의 해전에서의 승리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1597년 7월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원균의 수군이 전몰한 뒤 재기용되어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대승한 것을 평가하는 부분을 보자.
이해 7월에 원균이 패배하자 이순신은 다시 수군을 거느렸고 명량(嗚梁)에서 승리하여 바닷길을 막아버리자 왜적은 수륙(水陸)으로 같이 진격할 위세를 잃어버렸다. 게다가 명나라 군대가 또 크게 출동하였다. 추측건대 가등청정 등은 우선 남해로 우선 물러나 있다가 본국과 연락하면서 재차 동병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해생(海生) 등 네 장수가 그 뒤를 밟아 약간의 참획(斬獲)이 있었던 것이다〔「양호(楊鎬)」, 25권, 경사문〕.
이순신의 명량대첩으로 인해 왜군을 다시 바다와 육지로 한꺼번에 공진(功進)할 기회를 상실했으니, 이순신은 전쟁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렸던 것이다. 성호는 이것을 근거로 하여, 전쟁 초기 평양의 지척에 있는 의주를 왜병이 계속 공략할 수 없었던 것 또한 수군의 패배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양호」).
성호는 이순신이 모함으로 파직되고 백의종군한 것에 대해서도 지적을 남겼다. 「남의 공을 시기함(忌功)」(23권, 경사문)에서 성호는 희한한 말을 한다.
대저 대장이 공을 이루는 방법은 말을 달려 돌격하고 활을 쏘아 적을 죽이는 데 있지 않다. 칼날을 부닥치고 사로잡고 죽이고 하는 것은, 결국 군교(軍校)의 힘에 달린 것이다. 군교가 아무리 용기와 힘이 있다 해도 윗사람을 피붙이처럼 여겨 그를 위해 죽고자 하지 않으면 패배하기 마련인 것이다. 이치가 이렇다면 무사할 때 인심을 후하게 얻는 사람이 바로 장수의 재목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변방에서도 시험해보고 서울 군영에서도 시험해보되, 아랫사람을 어루만지며 거느리는 것이 마땅함을 얻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보답할 방도를 생각한다면 어찌 적에게 승리를 거두는 방법이 아니랴? 적정(敵情)을 엿보고 변통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기이한 계책을 내는 문제라면 끝내 예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전쟁이 연달아 일어날 경우, 심원한 지략은 반드시 편비(偏裨, 보좌관)에서 나오는 법이다. 평소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후한 녹을 먹는 사람은, 그런 지략을 내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심원한 지략을 내는 사람은 남에게 참소하는 인간들에게 질시를 당하기 마련이다. 그가 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공이 높아지기 때문인 것이다. 공이 높아지면 질투가 일어나고, 권세가 무거워지면 의심을 받는다. 이럴 경우 막아낼 방도가 없다.
가슴을 치게 만드는 글이다. 장수의 능력이란 직접 전투를 잘하는 데 달려 있지 않고, 평소 전투를 수행하는 군사의 마음을 얻는 데 있다. 서울에 있어도 경상도에 있어도 내직에 있어도 외직에 있어도, 그가 거느린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 그를 따른다. 이런 사람은 이런저런 현장에서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갖는다. 전쟁이 나면 이런 사람이 심원한 지략을 낸다. 하지만 조정의 요직을 골라 거치며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평소 그 지위를 누리는 데 열중하여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위기를 타개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이 소속되어 있는 조직을 생각해보라. 그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다.
이 높으신 나리들은 위기의 순간 자신들의 무능이 폭로되었다는 사실이 창피하고 짜증스럽다. 반면 전에 하찮게 여겼던 사람이 전쟁을 통해 공을 세우는 것이 너무나도 불쾌하다. 전쟁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공을 세운 사람을 몰아내는 방법을 찾는 데 혈안이 된다. 성호는 그것을 이렇게 간명하게 정리한다. “미천한 처지에서 일어난 사람이면 그 사람이 미천한 출신이라고 미워하고, 그가 세운 공이 크면 공이 큰 것을 미워하고, 인심을 얻으면 인심을 얻었다고 헐뜯는다.”(「남의 공을 시기함」) 성호의 구체적인 예는 당연히 이순신이다. “이충무공은 이미 큰 공을 세웠지만, 형벌을 받고 귀양을 가야만 했다. 유서애(柳西厓, 柳成龍) 같은 분이 맹세코 발탁하지 않았더라면 저 도랑 속에서 굶주려 죽는 신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남의 공을 시기함」)
이순신 같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다. 그 역시 조정이 돌아가는 판세를 정확히 읽었을 것이다. 성호는 「두예와 이순신(杜預李舜臣)」(25권, 경사문)에서 그 점에 대해 언급한다. 먼저 두예. 두예는 진(晉)나라의 명장이고 학자다. 그의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는 지금도 좌전학(左傳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저작이다. 문무를 겸비했던 두예는 군중(軍中)에 있으면서도 서울의 고관대작들에게 자주 선물을 보냈다. 누가 이유를 물었다. “저들이 해를 끼칠까 두려워서 그렇다네. 내 이익을 바라서가 아니네.” 선물을 보내는 이유는 오직 소인배들의 훼방을 피하기 위해서다. 성호는 이순신의 경우도 소개한다.
우리나라의 충무공 이순신 같은 분도 임진년 난리 때 수군을 통제하면서, 또한 틈만 나면 공인(工人)을 모아놓고 부채 같은 물건을 만들어 경재(卿宰)들에게 두루 선물로 보내었고, 마침내 중흥의 공을 이루었다. 이것은 천고 이후 지사들에게 눈물을 떨구게 하는 일이다.(「두예와 이순신」)
전 조선의 수군을 지휘하는 장수가 수하에 있는 수공업자를 모아 부채 따위를 만들게 하고,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벼슬아치들에게 선물로 보낸다.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시기하는 소인배들이 어떤 해코지를 할지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모함을 받아 백의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했던 것이니, 한심스런 일이라 하겠다.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던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뒷날 어떻게 되었던가. 성호는 「수군(水軍)」(16권, 인사문)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조선은 땅이 그리 넓지 않지만 삼면이 바다라 5,000리가 되는 해안선을 갖고 있어 해방(海防)이 가장 걱정거리라는 것이다. 한데, 실상은 어떤가? 임진왜란의 참화도 결코 교훈이 되지 않았다. 성호는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평소 먼 앞날을 걱정하는 법이 없으니, 만약 시간이 흘러 상황이 달라지고 세상이 바뀐다면 장차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임진년의 큰 난리는 그나마 전쟁의 끝에 있었지만, 이제 평화가 오래 지속된 나머지 수군을 통솔하는 자들이 군사들의 살을 바르고 거죽을 벗겨 뇌물로 바치고 자신의 살찌울 뿐이다.” 그래, 그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성호의 대책은 이렇다. 섬과 연안에 거주하는, 물에 익숙한 어민들이 많으니, 적절한 방법만 쓴다면 수군으로 만들 수 있다. 어민 중에는 관청의 일용 잡비에 충당되는 잡세의 징수에 시달려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사람이 허다하다. 이들은 농사지을 땅도, 거주할 집도 마땅히 없다. 이들에게 수군으로 징병할 대상이라는 문서를 주고 관청에서 잡세를 거두지 않는다면 금방 수천 명의 군사를 얻을 수 있을 테니, 수시로 훈련을 시켜 바다를 방어하게 하면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성호의 대책은 대책일 뿐이었다. 그는 「기병(騎兵)」(17권, 인사문)에서 자신이 듣건대 왜(倭)는 큰 바다 한가운데 있으면서 사방으로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기계, 곧 무기의 정교함도 새로 배워 익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 1876년 개항 후 일본에게 시달리다가 마침내 식민지가 되고 만 것을 예고하는 말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