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성의 총희와 홍순언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조선은 참으로 난처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4월 13일 부산에 도착한 왜군은 5월 3일 서울에 무혈입성했고,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달아났다.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널 참이었다. 이즈음에 명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명군의 원조야말로 조선이 왜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조선이 이후 명나라의 도움을 ‘재조지은(再造之恩)’, 곧 다시 살려준 은혜라고 표현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만 명나라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파병을 고려했던 것은 아니다. 남의 나라 전쟁에 무엇 때문에 돈을 들이며 군사를 보낸단 말인가. 명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이었다. 성호는 「임진재조(壬辰再造)」(17권, 인사문)에서 임진왜란의 최대의 공로자로 석성을 꼽는다. 이순신(李舜臣)은 그다음이고, 이여송(李如松)과 심유경(沈惟敬)이 또 그다음이다.
왜 석성이 첫째인가. 성호에 의하면 ‘석성이 아니었으면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을 것인바,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의 일을 힘써 주장한 사람이 바로 석성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공로자 이순신은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꺾는다. 이에 일본군은 보급이 어려워졌고, 주춤하여 평양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곧 이순신의 승전은 선조가 있는 불과 이틀거리의 의주로 일본군이 진격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이여송은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군을 밀어냈으니 세 번째 공로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유경은 혈혈단신 평양성으로 들어가 일본군과 담판을 짓는다. 그 결과 자신이 황제에게 보고하여 결과를 얻어올 때까지 50일 동안 평양성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틈에 이여송의 부대가 도착해 일본군을 평양성에서 밀어낸다. 그 뒤 삼남(三南)이 여전히 일본군의 손에 있을 때 심유경은 다시 명나라가 다시 군대를 동원해 서해를 거쳐 충청도로 들어와 일본군의 귀환로를 끊을 것이라고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속인다(「임진재조」). 이로 인해 일본군은 삼남에서 철수하여 남쪽 바닷가로 물러간다. 곧 삼남이 병화를 면한 것은 모두 심유경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심유경 또한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사람이다. 한데 애초 심유경이 일본 사정에 밝은 사람이라 하여 신종에게 추천한 사람 역시 석성이었으니, 이순신은 제외한다면 심유경과 이여송의 공 또한 석성에게서 유래한 것이라 하겠다.
성호는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한다. 당시 중국 조정에는 “외번(外藩)을 위해 재력을 쏟아 부을 수는 없으니, 조선을 둘로 나누고 적을 막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맡기면 충분하다”〔「석성(石星)」, 23권, 경사문〕는 의견이 있었다. 즉 왜병의 점령지는 그대로 두고, 왜병을 막을 적임자를 골라서 그에게 비점령지를 맡기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의견을 극력 반대, 배제했던 석성이었다. 만약 석성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그 계획대로 반분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략하려는 것’이라는 주장도 당시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이 있었지만, 석성이 그렇지 않음을 역설하여 명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출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성호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절(浙)ㆍ섬(陝)ㆍ호(湖)ㆍ천(川)ㆍ운(雲)ㆍ귀(貴)ㆍ면(緬) 등 남북 지방의 군사 21만 명을 동원했고, 883만 냥이 넘는 은(銀)을 전비로 썼다(「석성」). 이 때문에 중국 남부 지방의 재력이 바닥이 난다(명은 이로 인해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성호는 이 거대한 동병은 조선의 한두 신하가 하소연한 결과가 아니라, ‘모두 석성의 힘’이라고 말한다.
석성은 왜 파병을 극력 주장했던가. 왜군의 조선 침략, 점령, 그리고 예상되는 북경 공략은 명나라로서는 참으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고, 석성을 그 점을 가장 설득력 있게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식적 해석 뒤에는 비공식적 해석이 따라붙는다. 뭔가? 성호는 「홍순언(洪純彦)」(9권, 인사문)에서 석성이 조선을 도운 이면의 희한한 이야기를 전한다. 홍순언(1530-1598)은 조선 시대 역관으로 최고의 인물이다. 그는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하는 데 공을 세워 역관으로서 광국공신(光國功臣)이 되고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종계변무란 명나라의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국가 공식 기록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아달라는 요청을 말한다. 태조 때부터 계속 요청하여 선조 때 해결되었던바, 홍순언은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각설하고, 홍순언과 석성의 관계란 대체 어떤 것인가.
홍순언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북경에 갔더니 하룻밤에 엄청난 값을 부르는 창녀가 있었다. 호기심에 그 여자를 만나보니, 아름답기 짝이 없는 젊은 여성으로 부모의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 자신의 몸을 팔게 되었노라는 사연이었다. 홍순언은 그 창녀, 아니 그 처녀를 딱히 여겨 가졌던 거액을 털어준다. 물론 관계는 맺지 않았다. 그 처녀는 뒷날 석성의 총희(寵姬)가 되어, 그를 설득해 자기의 은인인 홍순언의 나라를 도와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홍순언과 석성의 총희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문헌으로 전한다. 심지어 『이장백전』이란 소설로까지 만들어졌다. 이야기는 너무나도 흥미롭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신중한 성호는 역시 “무릇 역관으로서 광국공신이 된 데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것이 석성의 총희 때문이란 것도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닌 것 같다”(「홍순언」)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이다. 물론 어느 정도 합리적인 추측도 가능하다. 홍순언은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갔을 때 통역으로 수행했고, 이여송과 선조 사이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도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런 그였으니, 석성을 만나는 것도 당연지사다. 석성이 파병 쪽으로 생각하게 했던 데도 홍순언의 역할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성호는 홍순언에 관한 세간의 또 다른 전설을 옮겨놓고 있다. 홍순언이 그 뒤 북경에 다시 가자 여자는 금과 비단을 잔뜩 싣고 와서 바쳤다. 홍순언은 당연히 거절한다. “이렇게 하면 내가 이익을 바란 것밖에 더 되오?” 여자는 울며 비단은 자신이 손수 짠 것이라면서 굳이 받기를 청한다. 하는 수 없이 받아보니, 비단에 놓인 수가 모두 ‘보은단(報恩緞)’이란 세 글자다. 서울에 와서 어찌 소문이 안 날 수 있으랴. 홍순언이 사는 동네는 졸지에 ‘보은단골’이 되고 말았다(「홍순언」). 여기까지가 성호의 전언이다. 한데 보은단골은 뒤에 고운담골로 바뀌고, 또 줄여 곤담골로 바뀌었다. 한자로 표기하면 고운담은 ‘미장(美墻)’이 되고, 동네는 미장동(美墻洞)이 되고, 다시 줄여 미동(美洞)이 된다. 지금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가 그곳이다.
석성은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했던바, 정유재란이 일어나 전쟁이 재연되자 강화 실패와 조선 출병의 필요성을 과장해 막대한 전비를 소모케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고, 마침내 옥사한다. 조선의 조야(朝野)는 그의 투옥과 죽음을 동정해마지않았지만, 끝내 석성을 구원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없었다. 이항복(李恒福)이 북경에 갔을 때 석성의 문인(門人) 양씨(楊氏)라는 사람이 찾아와 “귀국에서 말 한 마디라도 올려 구원해주기를 바란다”고 간청했지만, 조선은 “웃으면서 방관했을 뿐이고, 사신 한 사람을 보내어 그의 원통함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석성」). 성호는 이 점을 비판한다.
석성의 죄란 봉공(封貢) 문제를 성사시키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조선이 석성을 허물한 것은 또 뒤에 그가 강화를 주장했다는 데 지나지 않았다. 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일본이 봉공을 청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빨리 강화하고 전쟁을 끝내는 것이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정쟁의 근심을 물리칠 수도 없으면서 남이 죽을 힘을 다해 도와주지 않는 데 노여워하였으니, 우리에게 끼친 큰 은덕을 잊고 작은 원망을 생각한 데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석성」)
성호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선조를 비롯하여 조정의 신하들은 석성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위해 글을 올리려고도 했다. 다만 실행하지 못했을 뿐이니, 그 결과는 성호가 말한 바와 같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조선은 배은망덕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