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와 고려
대중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국사 교과서는, 몽고에 대한 수십 년의 항쟁을 민족사의 영웅적 투쟁으로 꼽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앞의 「고려의 생존술, 사대」에서 검토했듯 성호의 해석은 판이하게 다르다.
몽고는 세계사에서 가장 큰 제국을 이루었다. 몽고가 지나간 땅에는 어김없이 검붉은 피가 강을 이루었다. 몽고 관련 저작물을 보면 몽고가 벌인 전쟁이 잔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떤 학자는 그것은 서구 역사학의 관점이 배어 있는 것이며, 전근대나 근대 이후 할 것 없이 전쟁은 모두 잔혹한 것이니 몽고라고 해서 특별히 더 잔혹했던 것은 아니라 하지만, 그래도 문헌에서 확인되는 몽고 군대의 잔혹함은 유별난 것 같다. 고려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은, 몽고가 점령한 지역의 국가는 이름을 잃고 모두 소멸하고 말았는데 유독 고려는 속국이 되기는 했지만 국호를 보존하고 잔혹한 대우는 덜 받았던 것 같다. 왜인가?
성호는 이 역시 외교, 곧 사대의 공으로 돌린다.
세조(世祖)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 남쪽으로 송나라를 치고자 양양(襄陽)에서 군대의 위세를 펼쳐 보일 적에 그의 아우 아리크부카(阿里?哥)가 막북(漠北)에서 변란을 일으키자, 제후들이 우려하며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원종(元宗)이 세자가 되어 원(元)나라로 가서 항복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연몽(燕蒙)에서 출발해 서리와 이슬을 맞으며 5천 리 길을 건너 변량(?梁)에 이르렀고, 길에서 세조를 만났다. 세조는 기뻐하며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하였다.〔「고려의 사대(高麗事大)」, 22권, 경사문〕
세조(1215-1294)는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忽必烈)다. 헌종(憲宗), 곧 몽케칸(蒙哥汗, 1208-1259)이 죽자,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형제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쿠빌라이는 1260년 3월 개평부(開平府)에서 황제로 즉위한다.
『원사(元史)』 「세조본기」에는 원종이 직접 쿠빌라이를 만났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제현(李齊賢)의 「정동성(征東省)에 올리는 글(上征東省書)」에 “(원종이) 곧장 변량으로 가서 길에서 (세조를) 맞으니, 세조께서 멀리서 바라보시고 놀라 기뻐하며, ‘고려는 아득히 먼 나라인데 이제 내가 북방으로 돌아가 대통(大統)을 이으려 할 때 세자가 스스로 찾아와 내게 복속하니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이로구나’ 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고려 쪽의 기록만 원종과 세조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세조본기」에 실린 기록은 이렇다. 섬서선무사(?西宣撫使) 염희헌(廉希憲)은 세조에게 이런 의견을 올린다. “고려의 세자(원종)가 들어와 머문 지 3년인데, 이제 부왕의 사망 전갈을 듣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세자를 후히 대접해 보내면 은덕으로 생각할 것이고, 우리는 따로 번거롭게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나라 하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의견을 따라 세조는 원종을 후히 대해 보냈다. 만약 원종이 이때 항복하지 않았다면 고려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고, 우리는 그 시기를 공백으로 비워두어야 할 것이다.
원종의 맏아들은 충렬왕이다. 충렬왕은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하여 세조의 부마가 된다. 성호는 고려의 왕이 원 황제의 부마가 된 것이 고려로서는 엄청난 다행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곧 “충렬왕은 왕위를 계승하고 세조의 총애하는 사위가 되자 그의 말은 무슨 말이든지 따랐고, 고려 안에서도 아무도 감히 마음대로 날뛰는 자가 없었다”(「고려의 사대」)고 한다. 과연 그랬던 것인가? 『고려사』에 그 증거가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세조는 고려를 특별히 대우했다고 한다. 원종 원년(1260) 8월 원에 파견되었던 장계열(張季烈)과 신윤화(辛允和)는 귀국하여 세조의 말을 전한다. 세조의 말이다. “짐이 즉위한 뒤 너희 나라가 가장 먼저 와서 축하하였으니, 너무나도 기쁘다.” 세조는 가장 먼저 찾아온 고려 사신이 퍽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세조는 또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장계열과 신윤화에게 “너희 나라가 사대(事大)한 지 40년이다. 지금 조회(朝會)한 나라가 80여 나라가 되지만, 너희들이 보기에도 예우하는 것이 너희 나라와 같은 나라가 있는가?” 세조는 고려에 내리는 조서에서도 “의관은 본국의 풍속을 그대로 따르고 조금도 바꿀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고려는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게 된 것이다.
세계를 석권했던 몽고의 지배하에서 고려는 국호를 유지하고 문화와 전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은 항쟁한 덕분이 아니라, 곧 적절한 시기에 항복했기 때문이었다. 이 역시 외교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성호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하여 거듭 강조한다.
뒤에 충선왕과 충혜왕은 비록 연달아 구속되어 스스로 떨칠 수가 없었지만, 찬탈의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원나라를 두렵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동진(東眞)이 큰소리로 을러대면서도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일본이 늘 엿보면서도 감히 침입하지 못한 것은, 원나라의 힘에 의지했기 때문이었다. 비유컨대 오래 병을 앓은 사람이 원기는 이미 사그라졌지만, 객열(客熱)로 시일을 끌어나가는 것과 같았다.(「고려의 사대」)
〔*동진(東眞): 금나라 잔존 세력이 두만강 유역에 세운 나라〕
하기야 고려가 떳떳한 독립국이라 할 수는 없었다. 성호가 위에서 밝혔듯 충선왕은 1320년(충숙왕 7년) 원나라의 환관 임파이엔토그스(任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으로 귀양을 갔다가 풀려난 일이 있었고, 충혜왕 역시 학정(虐政)을 일삼았다고는 하지만 정동행성에 의해 체포되어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 가는 도중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으니, 이런 사례로 미루어볼 때 고려가 주체 있는 독립국이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것인가. 성호의 해석을 더 들어보자.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 때 공주와 결혼해 세조의 총애하는 사위가 되었으므로 그가 말하는 것이라면 세조는 모두 들어주었다. 비록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야 제 주장대로 할 수는 없었지만, 국운이 장구했던 것은 그 힘이 아님이 없었다.”〔「왜구의 시말(倭寇始末)」, 14권, 인사문〕
성호의 해석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고려가 원에 사대함으로써 동진과 일본의 침입을 면했다는 부분이다. 그는 자신이 구해 읽은 『일본외사(日本外史)』에 일본인 스스로 “거의 무너져 패망할 뻔했는데 다행히도 태풍의 덕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라고 쓴 것을 발견하고는 몽고의 일본 정벌이 일본에 엄청난 충격을 주어 고려를 침입할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왜구가 고려를 침입한 것은 원나라가 쇠약해진 다음이라고 말한다(「왜구의 시말」).
명나라가 성립하자 고려는 원나라와 외교관계를 끊는다. 성호는 이에 대해서도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1386년 명나라 홍무 원년에 경신제(庚申帝)가 도읍을 북쪽으로 옮겼다는 소문을 듣고 고려가 북원(北元)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명나라로 귀의하려고 한 것이 아주 큰 실책이었다는 것이다. 성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요동에는 아직 원나라가 웅거해 있었고, 고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니, 원나라가 고려를 쳤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또 저들이 이적(夷狄)이라 하더라도 이미 군신의 관계를 맺은 지 100년인데, 하루아침에 배반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명나라가 원나라를 섬기는 것을 문책한다 해도, 역시 원나라를 하루아침에 배반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말하고 앞으로 그 신의로 명나라를 섬기겠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는 것이다. 현실과 명분의 절묘한 조화다. 이런 점에 입각해 정몽주조차 비판한다. “다른 사람은 비판할 거리도 못 되지만, 포은(圃隱, 鄭夢周)처럼 현명한 분도 오직 공리(功利)를 따지는 주장을 펼쳤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북원과 외교를 단절하다(絶北元)」, 22권, 경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