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생존술, 사대
고려는 강력한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웃에는 강력한 국가가 있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중국의 북방을 지배하는 거대한 국가 요(遼)나라를 세웠고, 이어 여진족은 금(金)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요나라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이어 금나라를 쓸어버리고 이내 송나라까지 멸망시킨 몽고의 원나라가 등장해 세계사에 다시없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다. 한족(漢族)의 송나라는 이들 북방 민족이 세운 국가에 시달리다가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약체의 국가였으니, 고려가 존속했던 시기야말로 북방의 민족이 절정을 구가한 시대였다고 하겠다.
희한한 것은 고려가 거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소멸하지 않고, 국가를 유지하면서 생존했다는 것이다. 고려는 살아남아 송나라와 요나라, 금나라와 원나라가 세계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차례로 목도했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겠다.
고려는 국내 정치도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
고려 때에는 권간(權奸)들이 번갈아 우두머리가 되어 임금을 폐하고 세우는 짓을 내키는 대로 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32대를 전해 내려왔고, 누린 햇수는 475년이었다. 면면히 이어오면서 나라를 잃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고려의 사대(高麗事大)」, 22권, 경사문〕
강신(强臣)이 왕의 폐립을 마음대로 하는 나라가 어떻게 32대, 475년을 존속할 수 있었던가. 성호는 이에 대해 ‘사대한 힘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답한다. 사대라니! 중국 대륙의 강대국을 섬겼기 때문이란다. 성호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우리나라는 고려 때부터 요ㆍ금ㆍ원 세 대국을 번갈아 섬겼다. 스스로 생존할 수 없었던 형편이었으나, 다행하게도 사대(事大)하는 정성 덕에 겨우 멸망을 면했을 뿐이다. 어디 한 번이라도 위엄을 펼쳐 승리한 적이 있었던가? 저 세 대국은 중국도 두려워 떨었던 나라였다. 고려처럼 작은 나라가 감히 덤빌 수 있었을 것인가. 가령 한때 이겨 제 뜻대로 할 수 있다 해도 그 후환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원나라 때에는 나라 이름을 없애고 행성(行省)을 설치하고 머리를 깎고 관복(冠服) 제도를 바꾸려 들었는데, 손이야 발이야 애걸 끝에 겨우 면하게 되었다. 또한 잘 섬기겠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으므로, 그들이 기뻐하면 다행으로 여기고 화를 내면 몸둘 곳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명나라 태조는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자 했지만, 사신이 말을 잘해 그만두게 되었다. 세상이 크게 변할 때마다 이런 일은 꼭 한 번씩 생겼다.〔「한공이 피눈물을 쏟다(韓公泣血)」, 17권, 인사문〕
요·금·원은 중국, 곧 송나라도 두려워했던 강대국이다. 그들과 한때 싸워 이겼다 하자. 하지만 그 후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남는 길은 오로지 외교밖에 없다. 그 외교는 덩치 큰 강대국을 상대하기에 ‘사대(事大)’라 부른다. 성호의 답은 이것이다. 약자의 생존술은 오직 외교에 있고, 사대에 있다.
성호는 외교적 생존술로서 사대를 『성호사설』 곳곳에서 역설한다. 그는 「앞의 실패를 거울 삼지 않다(前覆不戒)」(21권, 경사문)에서 태조 왕건이 요나라를 배척하고 돌아보지 않은 것을 역사가가 실책이라 지적했다고 말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왕건은 942년(고려 태조 25년)에 거란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국교를 끊고 사신 30명을 섬으로 귀양을 보낸 뒤 낙타를 만부교(萬夫橋) 아래 묶어 방치해두어 굶겨 죽인다. 여기에 대한 사씨(史氏), 곧 역사가의 평이란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실려 있는 최부(崔溥)의 평을 말한다. 최부는 “나라와 군사가 부강하여 중원(中原)을 석권할 뜻이 있었”던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한 것이 전쟁의 참화를 초래했다고 평가한다. 과연 거란은 993년(성종 12년) 소손녕(蕭遜寧)의 80만 대군의 1차 침입부터 1010년의 2차, 1018년의 3차 침입까지 세 차례나 고려의 국토를 유린했던 것이다.
왕건으로서야 발해 멸망 이후 귀순한 발해 유민의 도움으로 후삼국을 평정했으니 그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거란은 금수의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도 다르니 의관 제도를 본받지 말라고 못 박은 것’은 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의 실패를 거울 삼지 않다」에서 성호는 금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금나라 건국 직후 아골타(阿骨打)의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자는 요청을 고려의 대신들은 극력 반대한다. 오직 어사중승(御史中丞) 김부철(金富轍)만이 성종(成宗) 때 요나라의 침입을 받았던 전례를 상기시키며, 화친을 하자고 주장해 조소거리가 되었다. 1126년(인종 원년) 인종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 문제를 회의에 부친바, 대부분 반대했으나 오직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이 금나라가 북송과 요를 멸망시킨 강대국임을 이유로 들며 사대할 것을 주장했고, 인종은 그 견해를 따라 금에 대해 신사(臣事)하는 표문을 보낸다. 인종은 당시 권력자 이자겸과 척준경의 정세 판단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현실주의자 성호는 인종의 이런 처사를 높이 평가하여 인종의 결정으로 인해 “변방 지역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다(小事大)」(21권, 경사문)에서 성호는 인종이 계속해서 현실적 판단을 내리고 있음에 주목한다. 금나라를 섬기기로 결정한 지 석 달 뒤였다. 송나라가 금나라를 협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왕은 단호히 거부한다. 이어 “송나라 군대가 금나라 군대를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정지상(鄭知常) 등은 송나라를 도와서 공을 이루자고 청한다. 그 공이 중국의 역사에 실려 만세에 전해질 것이라는 듣기 좋은 말도 덧붙인다. 인종이 김인존(金仁存)에게 의견을 묻자, 김인존은 “전해 듣는 말은 사실과 어긋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근거 없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강한 적의 화를 돋우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답한다. 과연 그 보고는 헛소문이었다. 곧 고려가 진중했기에 후환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성호의 평가다.
김부철은 김부의(金富儀, 1079-1136)다. 부철은 초명이다. 김부의는 저 유명한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의 동생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전기 문벌귀족사회 최고의 명문이다. 그들은 사대주의, 중화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있다. 이에 반해 정지상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파로 고구려의 고토 회복을 원하는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떤가. 정지상의 주장을 따라 망해가는 송나라를 도와 금나라를 공격했다면 고려는 아마 결딴이 나지 않았을까?
현실주의자 성호는 「앞의 실패를 거울 삼지 않다」에서 몽고와 고려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즉 고려는 몽고가 강성할 때도 그들에게 주는 예물과 폐백을 모두 추포(?布, 품질이 나쁜 베)로 하는 등 박례(薄禮)로 일관했고, 사신이 오면 퉁명스럽게 “전에 온 사신도 응접할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뒤에 온 사신이야 말해 무엇 하랴?”고 하면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시켜 위유(慰諭)해 돌려보내게 했던바, 이에 모두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견했다는 것이다. 과연 몽고는 고려 땅을 휩쓸었다. 개성이 피바다가 되려고 할 즈음 최씨 무인정권의 수장인 최우(崔瑀)는 고종을 협박해 강화도로 들어간다. 이에 반대한 사람이 유승조(兪升朝)다. 유승조의 반대 논리는 이러하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올바른 도리다. 예(禮)로 갖추어 섬기고 신의로 사귀면 저들이 무슨 명분으로 우리를 곤란하게 할 것인가? 쥐새끼처럼 섬으로 들어가 숨어 구차하게 세월을 끈다면 장정은 칼과 화살에 깡그리 죽고 노약자는 묶여가 종이 될 것이다. 섬에 들어가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최우는 듣지 않았다. 성호는 그 결과 강화에 성과 궁궐을 쌓았지만 백성들만 골병이 들었다고 말한다.
강화도로 들어간 것은 20여 년이었지만, 그 해독은 10대에 끼쳤다. 원나라의 공주(公主)는 안에서 권세를 움켜쥐고, 정동행성(征東行省)은 밖에서 자기 세력을 펼쳐 임금을 꽁꽁 묶어 귀양을 보내기를 마치 가벼운 털을 불고 마른 나뭇가지를 꺾는 것처럼 했지만 감히 무어라 말 한마디 하지 못했으니, 이는 모두 역적 최우의 잘못되고 망령된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20세기 이후 한국의 역사학은 최씨 무인정권이 주도한 전쟁을 민족의 위대하고 끈질긴 저항성을 찬양하는 도구로 삼는다. 하지만 그 당시 전쟁으로 죽어간 숱한 사람들에게 그 저항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또 잿더미로 변한 나라는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성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거란에서 몽고까지 무릇 세상이 세 번이나 변했는데, 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진 것을 보고 조심하지 않고 뒤에서도 빠지게 되었으니, 정말 이상하다 하겠다.” 그렇구나. 나는 오늘날 한국이 고려와 조선, 구한말의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