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내쫓는 법
조선시대의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지난번 글에서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 글에서 이혼 문제를 다루는 것은, 조선시대 이혼에 따른 문제가 주로 여성과 관련하여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성호는 「아내를 내쫓는 법(出妻)」(8권, 인사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법에 개가(改嫁)한 여자의 자손은 청직(淸職)을 허락하지 않는다. 때문에 사족(士族)은 개가를 수치로 안다. 그 폐단은, 아내가 아무리 패악스런 짓을 해도 번번이 아내를 내쫓는 법이 없다는 핑계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여자의 권리가 너무 무거워 가정의 도리가 무너진다.
개가한 사람의 자손을 청직에 등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아내는 이혼을 당했지만, 이혼하기 전에 낳은 자식은 생모가 재혼을 할 경우 벼슬길이 막힌다. 이 때문에 아무리 아내가 ‘막돼먹은’ 행동을 하더라도 이혼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같은 글에서 성호는 ‘사나운 아내’를 둔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그중 하는 일마다 아내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사내들은 끝내 집안을 보전하게 되고, 천성이 거세어 아내와 드잡이판을 벌이며 반목하는 경우는 종신 골머리를 앓으며 엉망이 된 집안 꼴을 감추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런 것을 보면 임병양란 이후 본격적으로 성립한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완벽하게 침묵시켰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호는 가부장제 내에서 저항하는 여성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세태를 두고 “지금 풍속으로 말하자면, 아내 앞에서 숨을 죽이고 눈을 감는 것이 마치 ‘하동사자후(河東獅子吼)’*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이혼(離昏)」, 15권, 인사문〕라면서 한탄한다. 성호는 이혼에 대한 법이 없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국법에 아내를 내쫓는 데 대한 조문이 없다. 유모(兪某)란 사람이 자기 아내의 음란한 행실을 고하고 두 차례에 걸쳐 소송을 벌였으나 옥사(獄事)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아내 역시 성품이 패려궂어 부부의 예의가 없었다. 조정의 중신들은 모두 나라에 아내를 내쫓는 법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혼」)
유모의 아내의 음란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정 중신들은 국법에 조문이 없다며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혼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혼의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데 그 구체적인 사례는 임병양란 이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이후로는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이혼에 관한 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경국대전』 형전 ‘금제(禁制)’에 “혼서(婚書)를 받아놓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여 결혼을 한 자는 주혼자(主婚者)를 논죄하고 이혼시킨다”라고 하는, 이혼에 관한 법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사기결혼에 대한 법적 해결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이혼과는 성격이 다르다 할 것이다.
성호는 『성호사설』 여러 곳에서 이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모든 귀책 사유는 여성 쪽에 있다. 「아내를 내쫓는 법」에서 그는 희한한 일화를 하나 인용한다. 풀어서 옮기면 이러하다. 이조판서가 어떤 무관을 추천하여 수령에 임명하려고 하니 참의(參議)가 이견을 낸다. “그 무인으로 말하자면 정실 아내를 구타했다고 소문이 나 있는데 어찌 목민관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조판서의 답은 이랬다. “아내는 본디 남편의 짝이지요. 하지만 술은 있는데도 없다 하고, 첩은 없다고 하는데도 있다고 우기며 남편의 뜻을 거스르고 요란스레 구니 남편의 마음에 때로는 치고도 싶을 것이요, 저 무부(武夫)를 어찌 각박하게 탓할 것이 있겠소?”
무슨 말인가? 손님이 왔다. 술을 마시다 보니 모자란다. 있는 줄 알고 더 내오라고 하지만 아내는 술을 많이 마시는 남편이 싫다. 그래서 없다고 답한다. 남편은 분명 첩이 없다고 하는데도 아내는 첩을 숨겨두고 있다며 의심하며 잔소리를 쏟아낸다. 그러니 사내가 아내를 치고 싶지 않겠는가? 이런 말이다. 성호는 비록 이 말이 농담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병통을 맞힌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고는 이어서 이런 말을 한다.
나라에서 악을 징계할 때, 가르쳐서 따르지 않으면 법으로 다스리고 법을 다스려도 따르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위엄이 집행되게 하려는 것이다.
저 여자들은 타고난 본성이 불량한 데다가 또 내쫓는 법이 없으니, 성인의 지혜라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들이 투기하는 버릇은 본디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불효하는데도 불구하고 감히 내쫓지 못하니, 세도(世道)의 수준이 늘 떨어지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 없이 쫓겨나는 여자가 많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 말은 여자를 편드는 말일 뿐이다. 성인이 어찌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칠출(七出)*의 제도를 세웠겠는가? 법에는 폐단이 되는 바가 없지 않다. 하지만 불효ㆍ불순하고 예교(禮敎)를 망치고 집안을 어지럽히는 것이 더욱 해가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성호는 못된 아내를 내쫓는 법이 없기에 세상이 이렇게 타락했노라고 개탄한다. 그러고는 마침내 주자까지 회의하기에 이른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다(婦棄夫)」(7권, 인사문)에서 그는 『주자어류』에 실린 이야기 한 편을 인용한다. 어떤 여성이 남편의 벌이가 아주 시원치 않자, 친정 부모가 딸을 데려다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려 했고 끝내 소송이 벌어졌다. 여성이 승소하여 이혼을 할 수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도심(道深)이란 사람은 “어떻게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혼하자 하고, 또 관청에서 허락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비판했지만, 주자는 “이런 일은 한쪽만 보고서는 속내를 모르는 법이다. 남편이 무능해 아내를 먹여 살릴 수가 없고, 아내도 또한 생활 방도가 없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이 경우는 대의(大義)로만 구속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다른 곡절이 있는지 신중히 따져보자는 것이다. 나는 주자의 신중한 생각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호는 주자의 말이 매우 의심스럽다며 주자를 비판한다.
성호는 비판의 근거로 『소학』에 실린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한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물었다. “혹 외로운 과부가 빈궁하여 의탁할 데가 없는 경우 재가(再嫁)를 해도 될까요?” 정자는 “단지 후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을까 두려워하였기에 이런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굶어 죽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일이고, 절개를 잃는 일은 큰일이다”라고 답한다. 성호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가난한 외로운 청상과부라도 마땅히 개가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젊은 아내가 집을 떠나서야 되겠는가? 만약 생활 방도가 없다 하여 다른 남자를 찾는다면 이것은 돈 있는 사내만 찾는 것이요,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는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관청에서 엄하게 처단하여 그 간사한 생각이 싹트는 것을 잘라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자는 대로 허가해주니, 장차 그 버릇을 본받아 제멋대로 날뛰는 악을 어떻게 금할 수 있을 것인가?
남편이 돈을 벌지 못한다, 병이 들었다 하여 아내가 남편을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역도 동시에 성립해야 성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성호의 주장을 밀고 나가면, 아내는 남편이 어떤 경우에 있다 하더라도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남편을 떠날 수 없을 것이고, 결국은 남편을 위해 젊은 나이에 수절을 하거나 목숨을 끊게 될 것이다. 조선 사회는 결국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선에 단계적 부계친족제, 곧 가부장적 친족제도가 정착되는 시기는 17세기 중반부터다. 여성의 시집살이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고, 고부 갈등과 부부 사이의 분쟁으로 이루어지는 가정 내부의 갈등과 폭력도 이로 인해 본격화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길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하동사자후(河東獅子吼): 옛날 진계상(陳季常)이란 사람이 사나운 처 하동(河東) 유씨(柳氏)가 소리를 지르면 꼼짝도 못했다는 데서 비롯된 말.
*칠출(七出): 아내를 버리는 일곱 가지 경우.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은 자, 자식을 낳지 못한 자, 음란한 자, 질투하는 자, 몹쓸 병이 있는 자, 말이 많은 자, 도둑질하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