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길들이는 방법
성리학이라 하면 보수적이고 실학이라고 하면 진보적이란 것이 한국인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나면서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태어난 것을 아닐 터이니, 당연히 학교 교육, 특히 국사 교육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실학자들이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는 예외 없이 금과옥조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연구자들의 뇌리에 장착되어 있다. 말하자면 박지원의 사유를 비판하거나 정약용의 생각에 토를 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 사항에 속한다. 웃기는 일이 아닌가. 학문 한다는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지, 전제를 합리화하는 정해진 과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 예로 실학자의 여성관을 검토해보자. 실학자라 해서 여성 문제에서도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여성에 대한 성리학의 정의는 『소학(小學)』에서 이루어지는데, 조선 건국 이후 거의 이백 년 이상이 지난 뒤, 곧 임병양란을 거친 뒤 비로소 이 책에 의한 여성이 출현한다.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여성상, 그리고 지금까지 남성이 바라는 여성의 모습은 바로 『소학』이 만들어낸 것이다. 오직 집안에만 있으면서, 상냥한 말씨, 다소곳한 태도로 남편을 섬기고(곧 남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섬기고, 자식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여성,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질투하지 않는 여성! 남편이 젊어서 죽건 늙어서 죽건, 결코 다시 결혼하지 않는 여성! 밥과 빨래 등 가사노동도 솜씨 있게 해내되, 도무지 가족을 위해 쉴 줄 모르는 여성! 이런 여성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소학』이었다.
노비에 대해서 한없는 동정을 표했던 성호다. 그렇다면 그는 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부인에게는 바깥 일이 없다(婦人無外事)」(13권, 인사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는 안에서 자리를 바로잡고, 남자는 밖에서 자리를 바로잡는다. 남녀가 자기 자리를 바로잡는 것이 천지의 대의이다. 사가(私家)의 도(道)는 나라 정치에도 통한다. 그러므로 부인에게는 바깥 일이 없다는 것이다. 부인의 처지임에도 바깥 일을 간섭하면 집안이 반드시 망한다. 하물며 나라의 일이겠는가?
여성이 위치할 곳은 오직 집안이다. 그것은 천지의 대의, 곧 진리다. 여성이 집안 바깥의 일에 간섭을 하면 집안이 망한다. 나라의 일에 간섭을 하면 당연히 나라도 망하게 되어 있다. 여성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가?
성호는 「부녀자에 대한 가르침(婦女之敎)」(16권, 인사문)에서 자기 가문에서는 신부를 맞이하면 효도와 공경은 가르칠 필요가 없는 당연한 것으로 치고 다음 세 가지를 가르친다고 한다. 뭔가? 근면, 검소, 남녀 분별이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근면하면 궁핍하지 않고, 검소하면 절약할 것이다. 그리고 “옛날에 자식을 가르칠 때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고 하였기에, 여성들이 엄격히 지킬 것은 이 세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호의 말은 모두 『소학』에 근거를 둔 것으로 근면, 검소와 같은 덕목들은 예나 지금이나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은 덕목을 여성 교육에 중요한 것으로 꼽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다.
같은 글에서 성호는 또 여성에게는 공부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글을 읽고 의리를 풀이하는 것은 남자의 일이다. 부인은 아침과 저녁, 여름과 겨울, 때에 맞추어 옷과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맞을 때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어느 겨를에 책을 읽을 수 있겠는가. 나는 고금의 역사에 통달하고 예의에 대해 말하는 부인을 많이 보았으나, 그 사람들이 그것을 꼭 실천하는 것도 아니었고 도리어 폐해만 한없이 많았다.
우리나라 풍속은 중국과 같지 않아, 무릇 문자의 공부란 힘을 쏟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니 부인에게는 맡길 일이 아닌 것이다. 『소학』과 『내훈(內訓)』의 등의 책도 모두 남자의 임무에 속한다. 부인은 잠자코 따져 그 책에 실린 말을 알아듣고 일을 할 때마다 조심스레 실천할 뿐이다. 규방의 부인이 만약 누에치고 길쌈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먼저 책을 집어 든다면 어찌 옳은 일이랴?
여성은 왜 공부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다른 이유가 없다. 책을 읽고 책의 내용을 궁리하는 것은 원래 남성의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일은 왜인지, 언제부터인지는 밝히지 않지만, 옷을 짓고 빨래를 하고 음식을 마련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 노동으로 제사를 준비하고 손님에게 주안상을 대령해야 한다.
성호가 드는 여성이 공부해서 안 되는 궁색한 이유는, 과거에 역사와 예의에 통달한 여성이 있기는 했지만 실천을 못하고 폐단만 낳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그는 구체적인 예는 밝히지 않는다. 또 조선은 중국과 달라 책을 읽고 공부를 하려면 한문을 익혀야 하는 법인데, 이는 원래부터 여자가 뜻을 둘 일이 아니라고 한다. 여성성(女性性)을 규정한 『소학』과 『내훈』등의 책도 여성이 직접 익혀서는 안 된다. 여성은 그저 남성이 가르쳐주는 대로 알아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 여성의 일은 누에 치고 길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하면서 책을 손에 들고 공부하는 일을 같이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호는 여성에 관한 한 성리학의 교설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처녀와 과부(室女寡婦)」(15권, 인사문)에서 성호는, 성(性)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어린 나이에 남자와 여자를 너무 일찍 분리하는 것이 아니냐는, 남녀칠세부동석의 교리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서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계속 같이 지내면서 서로 허물이 없어지다 보면 서로 성적으로 끌리는 일이 절로 생기게 된다”고 해명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한데 남녀칠세부동석의 교리는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여성을 남성에게서 분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의 아내가 될 여성, 좁혀 말하자면 나의 아내가 될 여성을 다른 남성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아내로서의 여성은 어려서부터 모든 남성과 격리되어 성장한 순수한 여성이어야 마땅하다. 좀더 덧붙이자면, 나의 아내가 될 사람은 현실에서는 물론 꿈속에서도, 상상으로도 남성과 접촉한 일이 없어야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남성은, 꿈과 상상은 물론이고 현실에서도 기생과 첩과 계집종과 기회가 닿으면 얼마든지 성적 접촉을 가질 수 있다.
이익은 같은 글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또 과부의 아들은 두드러진 행실이 없으면 어울려 친구가 되지 않았다. 이것 또한 지나치게 꺼리는 것 같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집에서 부녀자들에 대한 비방의 소리는 반드시 과부와 처녀 쪽에서 나온다. 이는 모두 과부와 처녀에게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 비방이란 것이 반드시 허물로 삼을 만한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조금이라도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곧 의심을 하는 것이다. 일단 의심을 받게 되면, 누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과부의 아들과는 친구가 되지 말라는 발언 역시 『소학』에 나오는 것이다. 이는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다. 사실 매우 부당한 요구다. 서얼 차별에 반대했던 성호, 노비제도를 비판했던 성호라면 여기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부와 처녀는 언제나 성적 의심의 대상이 되기에 약간의 근거 없는 소문도 치명적이라면서 조심에 조심을 다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런 주문이 나왔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스꽝스런 변명에 불과하다.
이런 성호니 여성의 수절은 당연히 찬미의 대상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東國美俗)」(15권, 인사문)에서 중국도 따라오지 못할 조선의 아름다운 풍속은 ‘미천한 여자도 절개를 지키고 개가하지 않는 것’인바, 그것은 국법이 개가한 자손의 자손에게는 청직(淸職)의 길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서얼의 차별에 대해 분노하던 성호는 어디로 갔는가?
실학자 성호에게 이런 모습이라니, 섭섭하신가. 아무리 생각이 트이고 진보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조선의 남자인 이상 한 치도 남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사정을 여기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