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매되는 사람들, 노비
20대 후반 『경국대전』을 처음 보았을 때다. 상속에 관한 조문이 있었는데, 상속의 예로 노비를 들고 있었다. 즉 아들에게는 노비 몇을 주고, 딸에게는 몇을 준다는 식이었다. 재산 상속이라면 토지나 가옥의 상속을 생각하던 나에게 조선시대 상속이 토지가 아니라 노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재산으로 알고 나누어준다는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어릴 적 독서물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은 노예제를 제재로 삼고 있다. 남북전쟁이 노예 해방을 위한 링컨의 휴머니즘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코미디에 가깝지만,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과 링컨, 흑인 노예 등의 어휘 조합이 한국인에게 노예제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물론 나는 선량하고 관대한 백인 주인, 착한 기독교인 흑인 노예란 설정을 시답잖게 생각한다. 한데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보고 노예제가 천하에 둘도 없는 악법이라며 동정을 표해마지않는 사람도 조선 사회가 노예제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조선의 노예제는 오래된 것이다. 고조선의 팔조금법에도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고 되어 있으니 정말 오래된 전통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조선의 노비는 노예와 다르다 하지만, 노비와 노예는 결코 다르지 않다. 문헌에는 노비란 말이 쓰일 곳에 노예란 말도 적지 않게 쓰이기 때문이다.
노비제란 당연히 천하에 둘도 없는 악법이다. 성호는 노비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우리나라 노비의 법은 천하 고금에 없는 것이다.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 동안 고통을 받으니 그도 너무나 불쌍한데, 게다가 어미의 신역을 따르도록 법까지 만들어두었음에랴! 그런즉 어미의 어미, 그리고 그 어미의 어미의 어미로부터 미루어 저 십대(十代), 백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시대 어떤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저 아득한 후세의 외손이 하늘과 땅에 가득 찰 정도의 무한한 고뇌를 받고도 벗어날 길이 없게 만든 것이다.
만약 이 지경에 빠지게 되면 안회(?回)와 백기(伯奇)도 효성스러운 행실을 가질 수 없을 것이고, 관중(管仲)과 안영(晏?)도 자신의 지혜를 베풀 곳이 없을 것이며, 맹분(孟賁)과 하육(夏育)도 그 용맹을 펼칠 데가 없어서, 마침내 둔하고 천한 하등의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더구나 남의 집에서 상전을 받들며 노역하는 자를 학대하고 모질게 부려 살아갈 방도가 없게 하니, 천하에 궁한 백성으로 노비보다 더한 자는 없을 것이다.〔「노비(奴婢)」, 12권, 인사문〕
한 번 노비가 되면 영원히 노비가 된다.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른다. 어머니가 노비면 그 사람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건 노비 어머니가 낳은 자식은 영원히 노비가 된다. 인간 개체는 원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생물학적 탄생은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내던져지는 것이다. 나는 노비로 살고 싶지 않지만, 나는 노비로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다. 내가 안회와 백기 같은 효성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관중과 안연 같은 빼어난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맹분과 하육 같은 용맹을 뽐낸다 하더라도, 나는 상전의 턱짓에 몸을 움직여야 하는 살덩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노비는 어떻게 사는가. 성호는 「노비를 제사 지내는 글(祭奴文)」(12권, 인사문)에서 노비의 삶을 그린다.
우리나라의 종과 주인의 관계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같다. 하지만 임금은 신하에게 벼슬을 주어 귀하게 만들어주고, 녹봉을 주어서 그를 먹여 살린다. 은혜가 이미 크다. 은혜를 갚으려 생각하지 않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다.
주인이 노비를 대하는 방식은 이렇다. 노비는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고, 고역은 그에게만 떠맡겨진다. 주인이 화가 날 때 노비에게는 형벌만 있을 뿐이고, 주인에게 기쁜 일이 있어도 상을 내리는 법은 없다. 작은 잘못에도 불충한 놈이라고 꾸짖는다. 무엇 때문인가?
신하가 되려는 사람은 벼슬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에 어깨를 비비고 길을 뚫고 나아가 구차하게 영리(榮利)를 도모한다. 하지만 노비는 그와는 달리 도망을 가려 해도 갈 곳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상전에게 매여 있을 뿐이다.
신하가 윗사람을 섬기는 일이란 윗사람을 위해 바삐 쏘다니거나 계획을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은 진흙 구덩이와 벌건 숯불에 들락거려야 하는 일이다. 매를 맞고 욕을 듣는 것은 다반사니, 사실 주인은 노비의 원수인 것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자발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하의 잘못이다. 왜냐? 그는 충성의 대가로 벼슬과 녹봉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은 노비를 잘 먹이고 잘 입히지 않는다. 온갖 노역으로 부리고 화가 나면 형벌을 가한다. 기쁠 때가 있어도 노비에게 상을 내리지 않는다. 조그만 잘못에도 충성을 다 바치지 않는다고 꾸짖는다. 임금의 신하가 되려고 나아가는 자들은 길에 가득하다. 어깨를 비비고 나아갈 정도다. 하지만 노비는 도망갈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매여 있다. 신하는 임금의 명령을 받아 말을 타고 어디를 바삐 다니거나, 머리를 써서 계획을 세울 뿐이다. 하지만 노비의 일은 아주 다르다. 진흙 구덩이에 뒹굴고 벌건 숯불 속에 뛰어들어 궂은 일, 난처한 일을 대신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매를 맞고 욕을 듣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이것이 노비의 생활이다. 하여, 성호는 단정한다. 노비에게 주인은 사실 “원수다!”
「지고의 노비문서를 불태움(焚地庫?籍)」(13권, 인사문)에서 성호는 노비의 불만이 역사의 고비에 어떻게 분출하는가를 증언한다. 지고(地庫)는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뒤 고려시대의 사초(史草)을 옮겨 간직한 곳이다. 고려시대의 사초가 지금 남아 있다면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노비들이 불태운다. 성호의 말을 들어보자.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왜적이 한양 도성에 들어오기 전에 난민들이 지른 불에 여러 궁궐과 관청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 가장 먼저 태운 것이 장례원(掌?院)이었다. 장례원은 노비 문서를 보관한 곳이다.” 노비들이 가장 먼저 불태운 것은 노비 문서를 관장하는 관청인 장례원이었다는 사실은 노비의 불만이 평소 내연(內燃)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여기에 성호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고려 때의 노예군(奴?軍)들이 공모하여 먼저 노비 문서를 불태웠으니,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은 성격의 일이다.” 억눌리는 자의 불만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성호는 ‘자기 고장에 살았던 ‘관(管)’이란 노비의 무덤을 지나다가 제문을 지어 위로하기도 하는 등 노비의 고통에 공감했다. 어느 날 남의 집에서 잠을 청하던 그는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비들의 대화를 듣는다. 자신들이 겪은 원통한 사연들이었다. 들어보니 모두 까닭이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주인의 말을 듣고 완악한 노비라고 지목한다는 것이다. 균형 잡힌 성호의 생각은 이렇다. “송사란 반드시 양쪽 말을 들어본 뒤에야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있는 법이다. 왜 노비의 말이 도리어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는 것인가?”(「노비」)
성호는 노비제가 폐기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사회를 완전히 재구성하는 혁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호의 개혁안은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백성에게 노비의 매매를 금하자(禁民賣奴)」(12권, 인사문)에서 그는 노비법을 없애지 못한다면 매매를 허락하지 말자고 말한다. 매매가 금지되면 노비가 남아돌아가는 집안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노비를 부려먹는 데도 한계가 있을 테니, 노비도 한가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둘째 노비의 매매를 금하면 백성을 속여 노비로 팔아먹는 일이 사라진다. 즉 노비의 새로운 공급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셋째 노비의 매매가 있다 하더라도 일정한 기간을 넘지 않도록 하고 자손까지 노비로 삼지 않게 한다. 이 방법은 결국 노비를 없앨 것이다. 이것이 성호의 생각이었다.
성호는 「당장과 이장(黨長里長)」(7권, 인사문)에서 조선이란 나라가 허약한 것도 노비 때문이고 백성이 가난한 것도 노비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노비가 된 사람이 무슨 흥이 나서 농사를 열심히 짓겠는가. 노비가 사회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일이 무어 있겠는가? 노비가 우글거리는 사회는 저주받은 사회이고 발전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
노비는 주체 없는 인간이다. 노비는 자신의 신체와 시간을 스스로 처분하지 못한다. 노비의 신체와 시간은 주인의 소유물이다. 지금은 노비가 없는 시대다. 한데 여러분은 자신의 신체와 시간을 얼마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체를 어디에 구금하고 또 시간을 약탈당하고 있지는 않으신가. 그것이 혹 이 시대의 가장 거룩한 명사인 군대와 학교와 직장은 아닌지 모르겠다.